| 유적/용어명 | 낙랑구역고분군(平壤樂浪區域古墳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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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명 | 평양직할시 정오동·정백동·토성동·남사리 일대에 분포하는 고분군이다. 일제강점기 대동군 대동강면 정백리·석암리·오야리·토성리 및 남곤면 남정리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 지역은 대동강의 남쪽에 해당하는데, 토성동의 낙랑토성과 더불어 낙랑군 관련 유적이 가장 많이 분포하는 지역으로서 낙랑군의 치소와 지배층의 고분이 위치한 곳이다. 남사리의 북쪽 끝에 있는 오봉산(해발 58m) 동쪽 끝에서 동북방향으로 거의 평행하는 2개의 구릉이 길게 뻗어 있다. 동남쪽 구릉은 정오동의 중앙부를 지나고, 서북쪽의 구릉은 정백동의 중앙부를 지나는데, 이 두 개의 구릉에 고분이 집중되어 있으면서 정오동고분군과 정백동고분군을 이루고 있다. 토성동의 낙랑토성 남쪽의 낮은 구릉 일대에는 토성동고분군이 위치하고, 오봉산의 동북쪽 기슭에서 북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곳에 남사리1호분, 오봉산 주봉에서 동남쪽으로 약 600m 떨어진 곳에 남사리2호분이 있다. 낙랑구역 일대의 고분들은 1900년대 초부터 1990년대까지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대략 2,700여 기의 고분이 조사되었다. 해방 이전에는 일본인에 의해 2,000여 기의 고분이 확인되었다. 1907년 세키노 다다시(關野貞)가 전축묘를 발굴한 이래 총 71기의 귀틀묘와 전축묘를 발굴하였는데 그 중 57기의 조사 내용이 『고적조사보고서(古蹟調査報告書)』 등에 간략하게 실려 있다. 한편 낙랑묘제에 목곽묘가 있다는 사실이 처음 밝혀진 것은 1913년에 공사과정에서 오야리고분이 우연히 발견되면서부터이다. 이 지역의 낙랑고분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킨 계기는 1916년에 10기의 낙랑고분이 계획적으로 발굴되면서부터이다. 특히 석암리9호분에서 순금제 교구와 동경을 포함한 각종 청동기와 칠기 등이 다량 출토되면서 연구자는 물론이고 일반인의 관심까지 끌어 모았다. 물론 1916년의 조사가 한사군 관련 유적을 찾으려는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임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1917년을 기점으로 평양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조사가 확장되면서 낙랑고분의 분 포범위가 점차 분명해졌으며, 1924년과 1925년에는 다시 한 번 대동강 남안의 고분에 대한 대대적인 발굴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목곽묘의 내부 구조와 출토유물의 공반관계가 좀 더 선명하게 밝혀지기 시작하였으며, 발굴현장의 항공사진이 촬영되고 출토유물에 대한 학제간의 연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낙랑고분 전체의 분포도가 작성되고 행정구역별로 고분의 일련번호가 통일되는 것도 이 무렵이다. 그런데 1930년대가 되면서 한반도에서의 고적조사사업이 행정기구 개편으로 축소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 등에 의해 조선총독부의 외곽단체인 조선고적연구회가 설립되고 이후 낙랑유적 조사를 주도하였다. 1930년대에 전반적으로 다른 분야의 고적조사가 쇠퇴하는 가운데 낙랑유적만은 거의 한해도 빠지지 않고 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방법은 더욱 개선되어 봉토의 축조방법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 조사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35년과 1937년에는 낙랑토성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고 1940년이 되어서도 대동강 남안의 낙랑고분에 대한 조사는 빠짐없이 이루어졌다. 낙랑고분은 해방되기까지 그 조사와 연구를 일본 연구자들이 독점·주도하였고 한반도 북부가 오래전부터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는 역사관을 만드는데 유리한 물적자료로 이용되었다. 광복 후에는 북한의 과학원 및 민속학 연구소가 중심이 되어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1955년에 낙랑85호분이 발굴된 것을 시작으로 황해도 각지에서도 같은 시기 고분의 발굴조사가 이어졌다. 1958년에 정백동1호분이 발굴되고 ‘부조예군(夫租濊君)’ 도장이 발견되면서 낙랑고분 연구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들어와서는 소위 고조선 후기 문제를 해명한다는 명목으로 낙랑고분에 대한 발굴조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960년대의 조사에서는 전실묘보다 목곽묘가 더 많이 조사되었고 이후의 조사에서는 목관묘도 조사되어 이 일대의 낙랑고분들이 전 단계의 목관묘를 계승한 것으로 중국의 무덤과는 차이가 있다는 주장들이 활발하게 제기 되었다. 즉 낙랑고분의 변천과정을 설명하는데 적절한 자료가 많이 확보된 시기라 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낙랑고분의 전개과정에 대한 북한 학계의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한편 북한 학계는 1967년부터 1971년까지 정오동과 정백동 일대에 분포하는 124기의 고분을 발굴하여 목곽묘 2기와 귀틀묘 22기, 전축묘 2기를 고고학자료집 등을 통해 소개하였다. 1981~1984년 사이에는 328기의 고분이 발굴조사되었으나 이에 대한 보고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1990년 2월부터 1992년 12월까지 통일거리 건설과정에서 2,200여 기의 고분이 발굴되었는데, 역시 보고되지 않았다. 근년에 이르기까지 대동강 남안의 낙랑고분에 대한 발굴이 이루어져 낙랑군의 호구(戶口)를 기록한 목간 등이 발굴되었으나, 고분의 구조나 공반유물의 전모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낙랑구역고분군에서 조사한 고분은 봉분이 없는 것도 있고, 방대형 또는 타원형의 봉분이 있는 고분도 꽤 많이 확인되었는데 큰 것은 봉토의 지름이 30m에 달하는 것도 있다. 내부 구조를 보면 목곽묘·귀틀묘·전축분·횡혈식석실묘 등 다양하다. 목곽묘는 장방형 또는 방형의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판재나 각재로 곽을 만들고 목관과 부장품을 넣은 형태이다. 귀틀묘는 칸막이귀틀묘·두칸귀틀묘·전형귀틀묘·귀틀-돌무덤, 귀틀-벽돌무덤 등 여러 형식이 알려져 있다. 전축묘는 조사된 수가 상대적으로 적은데, 방이 하나인 것, 전후 2개의 방과 딸린 방으로 구성된 것으로 나뉜다. 횡혈식석실묘는 낙랑동·정백동·남사리 등에서 확인되었는데, 평면 형태가 세장방형이고, 한쪽 단벽을 입구로 이용한 형식, 장방형 현실에 오른쪽에 치우쳐 연도를 설치하고 평천장인 형식, 장방형 현실에 오른쪽에 치우쳐 연도를 설치한 삼각고임 천장 형식 등이 있다. 횡혈식석실묘는 3세기 후반부터 4세기 대에 걸쳐 만들어졌다. 낙랑구역에서는 많은 수의 고분이 발굴조사되어 다양한 형식이 확인되었을 뿐만 아니라 풍부한 유물이 출토되어 기원전 1세기 대부터 4세기 대까지 대동강 유역 묘제의 특징과 변천 모습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정인성·홍보식) |
| 참고문헌 | 락랑구역일대의 고분 발굴보고(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고고학자료집 6,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33), 락랑구역일대의 고구려 돌칸흙고분에 대하여(리순진, 조선고고연구 4,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1990) |
| 구분 | 용어 |
| 사전명 | 한국고고학 전문사전(고분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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