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적/용어명 | 제련(製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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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명 | 제련이란 원광原鑛을 용광로에 넣고 녹여 금속을 분리·추출해 내는 공정을 말하며, ‘취련吹鍊’이라고도 한다. 전통 제철에서는 ‘쇠부리’ 혹은 ‘쇠둑부리’라는 용어가 알려져 있는데, ‘쇠부리’의 경우 제철이라는 넓은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철광석·사철·토철 등의 광석을 원료로 하며, 제련로에 목탄·석탄·코크스 등의 연료와 함께 장입한 후 송풍해 고온으로 가열하면 용융점이 서로 다른 철과 불순물은 서로 분리되는 동시에 광석은 환원되어 철이 생성된다. 이를 화학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Fe2O3/Fe3O4 +C → FeOx → Fe+C/Fe/FeO 철광석·사철·토철+목탄 → 반환원괴 → 환원괴/철/산화 철 원료를 제련해 철을 얻는 전통적 방법에는 저온 고체 환원법과 고온 액체 환원법이 있다. 제철 원료를 반용융 상태의 저온으로 가열하면 철보다 용융점이 낮은 불순물들이 먼저 녹아내려 철은 일부 잔존한 불순물과 뒤섞인 덩어리 상태鐵塊로 남게 되는데, 이를 수거해 정련 단야·단련 단야 공정을 거쳐 판장쇠[철정鐵鋌]를 제작하는 괴련철 생산 방식이 저온 고체 환원법이다. 다른 하나는 고온으로 제철 원료를 완전히 녹여 쇳물 상태로 만든 후 이를 거푸집에 흘려 부어 판장쇠를 제작하거나 탈탄제를 투입하여 강鋼을 생산하기 위한 선철 생산 방식이다. 하지만 이러한 전통적 제련 방식에 대해서는 아직 불명확한 점이 많다. 형태, 크기 및 기술적 원리로 볼 때 고대 원통형 제련로에서는 주로 괴련철이 생산되었고, 일본의 유사 사례처럼 조선 시대 상자형 노에서는 선철이나 선철·괴련철 혼합물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 후기~근대 울산 쇠부리와 자강도 풍청리 일건 쇠부리에서는 주로 선철이 생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철 제련과 관련된 역사적 기록은 1834년에 이규경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수록한 연철변증설鍊鐵辨證說이 유일하다. 이에 의하면 네 벽을 쌓은 노(가마)에서 생철生鐵과 숙철熟鐵을 생산하는데, 노를 축조하는 방법은 동일하지만 전자는 한 줄, 후자는 아홉 줄의 바람구멍을 통해 송풍을 한다. 생철 제련이 숙철보다 어려우며, 생철은 한 노에서 60kg을 생산하고 숙철은 이에 못 미친다. 중국에서는 우마牛馬나 물을 이용한 송풍 방법이 이용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모르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는 전북 완주의 사례를 근거로 한 것이어서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한편 이의립李義立의 『탐광행적探鑛行績』과 글월을 모은 『구충당문집求忠堂文集』에는 선생이 울산 달천 광산을 재개발하게 된 경위와 생산품 등에 대한 간단한 언급이 있다. 조선 후기~일제 강점기 전통 제철 문화로는 달천 광산의 ‘쇠부리(석축형 제철로)’와 자강도 시중군 풍청리의 ‘일건’ 문화가 있다. 지금은 완전히 사라진 전통 제철 문화이지만 노의 크기와 구조, 축조 방식, 풀무 및 바람골의 구조, 원료와 연료, 생산품, 조업 방식 및 노동요인 불매 소리 등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전통 제철에서 철 원료를 제련하기 위해서는 노와 풀무, 원료·연료 저장소, 취사장 등 다양한 설비가 필요하며, 특히 고온을 내기 위한 노와 바람을 불어넣는 풀무 및 송풍관(바람골)은 조업의 성패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시설이다. 우리나라에서 노는 점토로 쌓아 올리는 것이 일반적이며, 수축률을 줄이기 위해 짚 등의 유기물이나 석재를 부재로 사용하기도 한다. 풀무는 4인용 혹은 8인용의 발풀무를 사용하며, 송풍관은 토기 제작과 유사한 방식의 도제陶製 송풍관이 사용되었으나, 울산 쇠부리 및 자강도 일건에서는 지하식 통로 형태의 바람골(바람구멍)을 통해 송풍하였다. 지금까지 조사된 철 제련 유적 중 제련로가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는 유적으로는 원삼국~삼국 시대 진천 석장리, 충주 칠금동·두정리, 청주 연제리, 김해 하계리·우계리, 창원 봉림동, 밀양 미촌리·임천리, 청주 송절동, 충주 대화리, 고려 시대 충주 본리·노계 마을, 조선 시대 충주 완오리, 김제 장흥리, 광양 황죽리 유적 및 울산 방리·천전리·서사리·대안동, 경주 모화리 ·용명리·녹동리, 청도 신원리 등 달천 광산 주변 지역의 석축형 제철로 유적들이 있다. 북한 지역에서는 자강도 시중군 노남리·중강군 토성리, 황해남도 신원군 장수산성 등의 고구려 초기 철 제련 유적들이 알려져 있다. 지금까지 발굴 조사에서 확인된 바에 의하면 고대의 경우 대부분 원통형의 노가 사용되었고, 고려 시대에는 타원형이 추가되며,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장방형의 상자형 노가 성행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전통 제철의 여러 가지 공정 중 제련은 가장 중요한 공정에 해당된다. 우리나라 중남부 지역에는 기원전 3~2세기경부터 철기 문화가 시작되지만 제련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달천 유적에서 조사된 채광 유구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기원전 1~기원후 3세기대로 편년되고 있지만, 제련 유적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화성 기안동, 석장리 유적 등 2~3세기대 유적이다. 이러한 현황과 무덤에서 출토되는 철기 유물의 양상 등으로 보아 우리나라에는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중국(낙랑)으로부터 제련 기술이 도입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본의 경우 야요이彌生 시대 중기 중반에 철기 문화가 시작되지만 제련 기술은 고훈古墳 시대 후기가 되어서야 우리나라 등으로부터 유입된다. 이처럼 철 제련 기술이 철기 문화의 시작과 상당한 시간적 낙차를 보이는 이유는 철의 생산이 국가의 형성 및 유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으로 이해되고 있다. 즉 철 소재의 유통을 통한 철기의 제작은 소재 공급자의 필요에 따라 그 물량이 통제될 수 있으나 자체적 제련 기술을 보유할 경우 이와 상관없이 철과 철기의 생산을 조절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국가 형성기의 경우 주조 괭이 보급을 통한 농업 생산력의 증대와 강철제 무기를 통한 군사력의 확보가 중요한 만큼, 자체적 철의 생산은 소국小國 혹은 국가 단위의 엄정한 통제와 관리하에 이루어졌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김권일) |
| 참고문헌 | 풍청리 련철 수공업장-《일건》에 대하여(리덕수, 문화유산 5,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 과학원출판사, 1958), 고등학교 금속 제련(홍익대학교 과학기술연구소, 교육부, 2000), 한국산업사 연구(권병탁, 영남대학교출판부, 2004), 영남지역 조선시대 제철문화의 기초적 연구-석축형제철로의 설정-(김권일, 영남고고학보 50, 영남고고학회, 2009), 한반도 고대 제철문화의 검토(김권일, 한반도의 제철유적, 한국문화재조사연구기관협회, 2012) |
| 구분 | 용어 |
| 사전명 |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생산유적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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