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릉
- 왕릉명
- 원릉
- 능주명
- 제21대 영조·계비 정순왕후
- 왕릉위치
-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
- 조성연대
- 1776년 왕릉, 1805년 왕후릉
- 왕릉형태
- 쌍릉
능의 조성
원릉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쌍릉으로 조성되었다. 영조는 원비 정성왕후가 잠든 서오릉의 홍릉 옆 자리에 묻히기를 바랐으나 정조가 지금의 위치에 능지를 정함에 따라 뜻을 이루지 못했다. 원릉이 있는 자리는 원래 효종의 능인 영릉이 있었던 곳으로 영릉은 1673년 풍수가 좋지 않다는 상소가 제기되어 경기도 여주 세종 영릉 옆으로 천릉되었다. 영릉 천릉 시 기존 석물 중 대부분은 땅 속에 파묻고 능을 옮겼다. 원릉 주변에서 간간이 땅에 묻혀 있던 석물이 노출된 모습을 확인되는데 이는 1659년 효종 영릉 최초 조성 당시 제작된 석물이다. 영조가 승하하자 국장은 사도세자의 아들인 손자 정조가 주관했다. 권력기반이 취약했던 정조는 왕위의 정통성을 내보이고자 영조의 국장에 심혈을 기울였고 3년에 걸쳐 진행된 국장 과정을 통해 왕권을 확립해나갔다. 1783년 조성된 영조릉이 봉분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하여 개수하였다. 1805년 정순왕후가 승하하자 영조릉 능침 왼쪽에 새로운 봉분을 조성하고 곡장은 기존의 곡장을 이어서 주위를 두르고 병풍석을 세우지 않고 난간석을 둘렀고, 각 봉분 앞에 석상을 하나씩 새로 배치하였다. 능의 중간에 사각 장명등석은 화문으로 장식해 놓았다. 문석인이나 무석인은 비교적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으나 입체감이 떨어지는 편이고, 현실성이 반영되어 사실적인 미소를 띠고 있다.
능주 소개
영조(英祖, 1694~1776)는 조선 제21대 왕이다. 본관은 전주이며 이름은 금(衿), 자는 광숙(光叔), 호는 양성헌(養性軒)이다. 숙종의 세 아들 중 둘째이며, 어머니는 화경 숙빈 최씨이다. 비는 서종제(徐宗悌)의 딸 정성왕후이고, 계비는 김한구(金漢耉)의 딸 정순왕후이다. 1699년(숙종 25) 연잉군에 봉해졌으나 어머니의 출신이 미천했던 관계로, 노론의 유력자인 김창집(金昌集)의 종질녀로서 숙종의 후궁이던 영빈 김씨의 양자로 들어갔다. 덕분에 숙종 말년 왕위계승 문제가 표면화되었을 때 그 이복형인 왕세자(후일 경종)를 앞세운 소론 측에 대립했던 노론의 지지와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1720년 숙종이 승하하고 왕세자가 즉위해 경종이 되었지만, 건강이 좋지 않고 또 아들이 없었다. 이에 노론측은 왕실 최고 존장자인 대비 김씨(숙종의 제2계비인 인원왕후)의 지지를 받아 연잉군을 경종의 뒤를 이을 왕세제로 책봉하도록 하였다. 그 후 신축옥사와 임인삼수옥(壬寅三手獄)을 겪은 상황에서 경종이 재위 4년만인 1724년 후사 없이 요절함에 따라 보위에 올라 국왕이 되었다. 즉위한 후에는 한때 노론 정권을 수립했으나 이후 노론과 소론을 고르게 등용함으로써 공동 정권을 구성하는 탕평책을 기본 정책으로 삼아 당쟁의 격화를 완화시켰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집권 세력 내부의 분열이 있었는데, 1749년(영조 25) 이래 대리청정을 해온 왕세자를 둘러싸고 표면화되어 종국에는 1762년(영조 38) 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임오화변을 불러일으켰다. 영조는 52년이라는 오랜 기간 왕위에 있었고 비상한 정치능력을 가진데다 탕평책으로 인해 어느 정도 정치적 안정을 구축했기에 국정운영을 위한 제도개편이나 문물의 정비, 민생대책 등 여러 방면에 적지 않은 치적을 쌓았다. 가혹한 형벌을 폐지 또는 개정하였으며, 신문고 제도를 부활시켜 백성들의 억울한 일을 직접 알리게 했다. 금주령을 내려 사치 낭비의 폐습을 교정하고 농업을 장려하여 민생의 안정에 힘썼으며, 기민(饑民)의 실태를 조사하여 그들을 구제하고자 균역법을 제정하였고 세제의 합리화를 기했다. 한편 북관군병에 조총 훈련을 실시하고, 1729년 화차를 제작하였다. 성품이 학문을 좋아하여 스스로 서적을 찬술하였고, 인쇄술을 개량해 많은 서적을 간행하였으며, 필요한 것은 널리 반포시켜 일반 백성들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신학풍에 대한 이해도 깊어 유능한 학자를 발굴해 실학을 진작시키기도 하였다. 영조는 그 어머니의 신분이 미천함에서 오는 심적 갈등에 이복형인 경종의 독살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를 받았으며, 심지어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는 유언비어에 시달리고는 마침내는 왕으로서의 존재를 부정당하는 무신란까지 겪었다. 또한 자녀에 따라 극단적인 애증을 나타내 사도세자의 울화병을 유발하고 부자간의 갈등을 초래했다. 이런 인간적 결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조는 재위기간 군주로서의 위상을 확립하였으며, 탕평에 의한 정국안정을 바탕으로 그의 치세의 시기부터 현저해지는 조선왕조의 사회경제적 변화에 대응하여 민생문제의 해소를 통해 민심을 다독이고 각 방면에 걸쳐 부흥기를 마련한 각별한 군주였다. 서예에도 조예가 깊어 역대 국왕 중 가장 많은 어필을 남겼다. 1776년 83세로 죽으니 조선시대 역대 왕 가운데서 재위기간이 가장 긴 52년이나 되었다. 처음에 올린 묘호는 ‘영종(英宗)’이었으나, 1890년(고종 27)에 ‘영조(英祖)로’ 고쳐 올렸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원릉(元陵)이다. 정순왕후(貞純王后, 1745~1805)는 조선 21대 왕 영조의 계비이다. 본관은 경주이며, 오흥부원군 김한구(金漢耉)의 딸이다.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서씨가 죽자 1759년(영조 35) 왕비에 책봉된 뒤 가례를 행하였다. 1772년(영조 48)에 ‘예순(睿順)’을 비롯하여 1804년(순조 4)에 이르기까지 ‘성철(聖哲)’, ‘명선(明宣)’, ‘융인(隆仁)’ 등의 존호를 받았다. 소생은 없으나 사도세자와의 사이에 틈이 생겨 참소가 심하더니, 아버지 김한구의 사주를 받아 나경언(羅景彦)이 세자의 비행을 상소하자 서인으로 폐위시켜 뒤주 속에 가두어 죽게 하였다. 그 뒤 당쟁에서 세자를 동정하는 시파(時派)와 그에 반대하는 벽파(僻派)의 대립에서 벽파를 옹호하였으며, 정조가 죽고 순조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하면서 시파 등의 신서파(信西派)를 배격하여 천주교에 대한 일대 금압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가환(李家煥) 등 천주교 신앙의 선구자들이 옥사당하고 정약종(丁若鍾) 등 실학자들이 처형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1805년(순조 5)에 승하하였으며, 시호는 ‘예순 성철 명선 융인 정순왕후(睿順聖哲明宣隆仁貞純王后)’이다. 능호는 ‘원릉(元陵)’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영조릉과 쌍릉으로 조성되었다.
왕릉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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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문화유산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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