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릉
- 왕릉명
- 명릉
- 능주명
- 제19대 숙종·1계비 인현왕후, 2계비 인원왕후
- 왕릉위치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475-92번지
- 조성연대
- 1701년 인현왕후릉, 1720년 숙종릉, 1757년 인원왕후릉
- 왕릉형태
- 동원이강릉
능의 조성
명릉은 하나의 정자각에 쌍릉(명종과 인현왕후)과 단릉(인원왕후)으로 구성된 동원이강릉이다. 명릉은 우측에 숙종·인현왕후의 쌍릉이 있고 좌측에 인원왕후의 능이 단릉으로 구성된 동원이강 형식이며, 능호는 모두 명릉으로 통일되어 쓰이고 있으나 숙종과 인현왕후릉, 인원왕후릉의 석물 양식이 서로 크게 달라 시대적인 차이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18세기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명릉도」를 보면 본래 명릉의 능역은 지금보다 훨씬 광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황실재산 찬탈과 1970년대 군부대 주둔 등으로 인해 본래의 모습은 훼손되었으며 지금은 안산인 용두산 주변으로 민가와 농가, 도로가 조성됨에 따라 연지가 없어지고 홍살문으로 이어지는 진입로가 도심지와 맞닿아 있는 등 현저히 축소된 형국을 보여준다. 「신형도」에 의하면 명릉은 재실 앞에 나 있는 좁은 길을 따라 금천교를 지나 홍살문 쪽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따라서 현재 서오릉관리사무소 옆에 있는 재실은 명릉에 속한 재실이라고 볼 수 있다. 명릉 재실은 전면 행랑채 일부와 재실 본동만 남기고 모두 훼철된 상태이며 근래 보수를 거쳐 새롭게 단장하였다. 인현왕후릉을 조성할 무렵 숙종은 등극 후 아버지 현종의 능 등 총 여섯 번 이상의 산릉을 치르는 중이었다. 당시 왕실은 몇 차례 산릉공사를 진행하면서 인력동원과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숙종은 이를 타개하고자 국상 절차와 의물 마련, 석물 크기 등 산릉과 관계된 업무를 간소화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작고 소박한 후릉의 제도를 가장 이상적으로 여기고 명릉의 석물을 정종 후릉의 양식을 범본으로 삼아 제작하였다. 인현왕후릉을 만들면서 정식으로 정자각을 조영했기 때문에 이후 숙종과 인현왕후릉을 조성할 때에는 길흉을 한 공간에서 함께 할 수 없다는 의론에 따라 가정자각을 지어 흉례를 행하였고 능이 완성되면 정자각에서 길례를 치르게 되어 가정자각은 철거하였다. 1745년 명릉의 봉분이 붕괴될 위험에 처하자 왕릉의 수개를 진행하였다. 인원왕후릉의 위치는 숙종이 미리 정하여 전하였기 때문에 현재의 위치에 있을 수 있었다. 이때 조형된 석물은 기존의 표현 방식에서 벗어나 신체 크기와 골격이 갸름해지고 약간 미소를 띤 표정을 짓는 등 매우 현실감이 느껴지는 왕릉 조각이 등장했으며 삼지창 투구를 쓴 무석인이 제작되는 등 조선 고유의 특징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능주 소개
숙종(肅宗, 1661~1720)의 본관은 전주이고 이름은 순(焞), 자는 명보(明譜)이다. 현종의 외아들로, 어머니는 청풍부원군 김우명(金佑明)의 딸 명성왕후이다. 비는 영돈녕부사 김만기(金萬基)의 딸인 인경왕후이고, 계비는 영돈녕부사 민유중(閔維重)의 딸인 인현왕후이며, 제2계비는 경은부원군 김주신(金柱臣)의 딸인 인원왕후이다. 1661년 8월 15일 경덕궁 회상전에서 태어나 1667년 정월 왕세자에 책봉되었고, 1674년 8월에 즉위하여 재위 46년 되던 1720년 6월 8일 경덕궁 융복전에서 승하하였다. 숙종의 치세 기간은 조선 중기 이래 지속되어 온 붕당정치가 절정에 이르렀고 서인과 남인이 분열하는 가운데 당폐가 심하게 일어난 시기였다. 여러 번의 환국을 일으켜 정국의 주도권을 잡기를 꾀하였다. 이 과정에서 노론·소론 사이의 명분 논쟁 등 소론·노론의 분쟁과 대결 등으로 인해 당파간의 정쟁은 전대에 비할 수 없으리만큼 격심하였다. 이러한 정쟁격화는 붕당정치의 폐단이 폭발하면서 나타난 현상이기는 하나, 한편으로는 앞서 현종 때의 예송 논쟁으로 손상된 왕실의 권위와 상대적으로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려 한 왕의 정국운영 방식의 결과이기도 하다. 재위 기간 동안 왕권은 도리어 강화되어 임진왜란 이후 계속되어온 사회 체제 전반의 복구정비 작업을 활발하게 추진하면서 많은 치적을 남겼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대동법을 전국에까지 확대시켰고 전정에 있어서 전국에 걸친 양전을 사실상 종결하였다. 이 시기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하는 상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주전을 본격화하여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상평청·호조·공조 및 훈련도감·총융청의 군영과 개성부, 평안·전라·경상감영에서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통용하게 하였다. 숙종 재위 기간에 이루어진 이러한 경제 시책은 조선 후기의 상업 발달과 사회 경제적 발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대외 관계에 있어서는 압록강변의 옛 땅의 회복 운동을 시작으로 정계비를 세웠다. 일본에는 1682년과 1711년 두 차례에 걸쳐 통신사를 파견, 수호를 닦고 왜관무역에 있어서 왜은 사용의 조례를 확정지었다. 특히 막부를 통하여 왜인의 울릉도 출입 금지를 보장받아 울릉도의 귀속 문제를 확실히 하였다. 숙종은 과거 정치 논리에 의해 희생된 인물들을 복권시키는 데에도 신경을 썼다.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을 복관시켰다. 또한 노산군(魯山君)을 복위시켜 단종으로 묘호를 올리고, 폐서인되었던 소현세자빈 강씨를 복위시켜 민회빈(愍懷嬪)으로 추숭하는 등 과거를 청산하는 정책을 단행하였다. 송설체(松雪體)를 잘 썼으며, 100여 점이 넘는 서화 작품에 감평(鑑評)을 남기는 등 역대 조선 군주 중 서화 감상에 가장 조예가 깊었던 왕으로 유명하다. 시호는 ‘현의 광륜 예성 영렬 장문 헌무 경명 원효 대왕(顯義光倫睿聖英烈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이다. 능호에 대해서는 왕후의 능호를 그대로 쓴 인조 장릉(長陵)의 예에 따라 숙종의 능 역시 먼저 승하한 계비 인현왕후의 능호를 이어 ‘명릉(明陵)’으로 호칭되었다. 인현왕후(仁顯王后, 1667~1701)는 조선 제19대 왕 숙종의 첫 번째 계비이다. 본관은 여흥이다. 아버지는 여양부원군 민유중(閔維重)이며, 어머니는 은진 송씨로 송준길(宋浚吉)의 딸이다. 1681년(숙종 7)에 가례를 올리고 숙종의 계비가 되었다. 예의가 바르고 덕성이 높아 국모로서 존경을 받았으나, 왕자를 생산하지 못하여 왕의 총애를 잃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희빈 장씨에게서 왕자(후의 경종)가 출생하자, 숙종의 관심은 희빈 장씨에게 쏠리게 되었다. 1689년에 숙종이 왕자를 원자로 봉하고 세자로 책봉하려하자, 송시열 등 노론 인사들이 상소를 올려 이에 반대함으로써 숙종과 심하게 대립하였다. 숙종이 이들을 면직 또는 사사시키고 남인들을 등용하자 이른바 기사환국이 일어났으며, 지위가 오른 희빈 장씨의 간계로 폐서인이 되어 안국동 감고당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 뒤 숙종이 폐비에 대한 처사를 후회하고 있던 중에 1694년 소론파의 김춘택(金春澤)·한중혁(韓重爀) 등이 폐비복위운동을 일으키자, 이를 저지하려는 남인측 인사인 김덕원(金德遠)·권대운(權大運) 등을 유해하여 사사시키는 갑술옥사를 거쳐 다시 복위되었다. 이듬해 숙종은 자신의 사위이자 그림에 해박했던 김진규(金鎭圭)를 시켜 인현왕후의 초상을 그림으로써 국초 정안 이후로 폐지되었던 왕후의 어진 제작을 부활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신료들은 옛 기록에 왕비의 초상을 그리는 것에 대한 뚜렷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강력히 반대하였고, 결국 무산되었다. 숙종이 인현왕후의 초상을 그리게 하고자 한 일에 대해 사관(史官)이 “대개 임금이 중전(中殿)의 간험(艱險)을 갖추어 맛보고, 아름다운 덕이 있으며 허물이 없음을 생각하여 후세의 자손으로 하여금 모두 안색(顔色)을 우러러봄을 얻게 하고자 하였으며……”라고 기록한 실록 기사를 통해 평소 인덕이 많았던 왕후의 소양을 엿보게 한다. 1701년 음력 8월 14일 병으로 35세의 젊은 나이로 창경궁 경춘전에서 승하하였다. 같은 해 8월 20일 시호가 ‘효경 숙성 장순 의열 정목 인현 왕후(孝敬淑聖莊純懿烈貞穆仁顯王后)’로 정해졌고 능호는 ‘명릉’, 전호(殿號)는 ‘경녕(敬寧)’으로 숙종과 같은 능침에 자리하고 있다. 인현왕후를 주인공으로 하여 쓴 궁중수필 『인현왕후전』이 전한다. 인원왕후(仁元王后, 1687~1757)는 조선 제19대 왕 숙종의 두 번째 계비이다. 본관은 경주이다. 이조판서 김남중(金南重)의 3대손이며, 경은부원군 김주신(金柱臣)의 딸이다.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가 승하하자, 간택되어 궁중에 들어가 다음 해 왕비로 책봉되었다. 1711년 천연두를 앓았으나 소생했고, 2년 뒤에 ‘혜순(惠順)’이라는 호를 받았다. 숙종이 승하한 뒤 왕대비로 있으면서 1722년 ‘자경(慈敬)’, 1726년 ‘헌열(獻烈)’, 1740년 ‘광선 현익(光宣顯翼)’, 1747년 ‘강성(康聖)’, 1751년 ‘정덕(貞德)’, 1752년 ‘수창(壽昌)’, 1753년 ‘영복(永福)’, 1756년 ‘융화(隆化)’ 등의 많은 존호(尊號)를 받았으며, 사후에는 ‘정의 장목(定懿章穆)’이라는 휘호(徽號)를 받았다. 슬하에 소생은 없다. 시호는 ‘혜순 자경 헌렬 광선 현익 강성 정덕 수창 영복 융화 정의 장목 인원왕후(惠順慈敬獻烈光宣顯翼康聖貞德壽昌永福隆化定懿章穆仁元王后)’라 하였고, 능호는 명릉으로 서오릉 경역 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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