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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효공이보신도비(貞孝公李俌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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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화도읍 녹촌리 궁말의 능원대군(陵原大君) 사당 좌측에 후손에 의해 건립된 정효공이보신도비명이다. 능원대군 이보(1592∼1656)는 선조(宣祖)의 아들이 정원군(定遠君 추존 元宗)의 둘째 아들이며, 인빈김씨(仁嬪金氏)의 손자이다.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고, 시호는 정효(貞孝)이다. 이 비석은 귀부이수(龜趺螭首)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귀부는 거북꼬리가 틀어 올려져 있으며 전체적으로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으며 귀갑문(龜甲紋)이 새겨져 있다. 이수는 정면에 두 마리의 용이 운문 속에 새겨져 있으며, 한 마리는 입을 벌리고 있으며, 다른 한 마리는 입을 다물고 있다. 찬자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학문뿐 아니라 글씨에도 능해 양송체(兩松體)를 잘 구사한 송시열(1607∼1689)이며, 서자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우의정 등의 관직을 역임했으며 송준길(宋俊吉)의 문인(門人)으로 글씨를 잘 썼던 조상우(1640∼1718)이다. 전액은 공(公)의 아들인 이함(1633∼?)이다. 비문의 전반부에는 출생과 성품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중반부에는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왕을 모시고 남한산성에서 항쟁한 내용과 강화에 반대하였던 일화를 담고 있다. 청(淸)나라와 강화가 성립된 후 일체 조정에 일에 관여하지 않았으며, 명(明)나라에 대한 절의를 끝가지 지켰다. 후반부에는 공의 가계도와 양주 풍양현에 초장되고, 26년 후에 양주 백록동 언덕에 이장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비문의 마지막에 ‘대명숭정무진후정해십월(大明崇禎戊辰後丁亥十月)’, 즉 1647년(인조 25)에 건립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 기록에 따르면 공이 죽기 전에 비석을 세웠다는 것이기 때문에 잘못된 해석으로 판단된다.
조선국 왕자 능원대군(朝鮮國王子綾原大君) 겸 오위도총부총관(兼五衛都摠府都摠管) 증시(贈諡) 정효공(貞孝公)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좌의정 겸 연경연사 감춘추관사 세자부(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世子傅) 송시열(宋時烈)은 삼가 글을 짓고,
남가덕대부(男嘉德大夫) 영은군(靈恩君)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兼五衛都摠府都摠管) 신(臣) 이함(李涵)은 하교를 받들어 삼가 전액(篆額)하며,
숭정대부(崇政大夫) 행 이조판서 겸 지경연사 춘추관사 세자좌빈객(行吏曺判書兼知經筵春秋館事世子左賓客) 신 조상우(趙相愚)는 하교를 받들어 삼가 글씨를 쓰다.
공경히 생각하건대, 우리 선조대왕(宣祖大王)께서 덕을 닦으시고 인을 행하시어 임금의 교화를 성취시키셨는데, 그 때에 능원대군(綾原大君) 휘 보(俌)가 친손자로서 계승해 받으시고 향기를 이어 받으시어, 성대하고 아름다운 자손들을 많이 두었다. 그러나 그 일을 자랑하지 아니하시었으므로 사람들이 무어라 칭송할 줄을 몰랐으니, 그것이 더욱 지극한 덕이 되는 것이다. 우리 원종공량대왕(元宗恭良大王)께서는 처음에 왕자의 한 분으로서 정원군(定遠君)에 봉해지셨는데, 선묘(宣廟)께서 특별히 좌상(左相) 구사맹(具思孟)의 따님을 간택하시어 그 부인을 삼으신 뒤에 만력(萬曆) 임진년에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파천(播遷)하셨을 때 성천(成川)의 우거하시던 집에서 공이 탄생하시었다. 어렸을 때부터 언어와 동작에 있어서 늘 임금의 사랑을 받으셨고, 11세 때에는 선묘께서 승하하시자 능히 소찬(素饌)을 드시며 슬피 사모하시었고, 복을 벗게 되자 백부(伯父)이신 의안군(義安君) 휘 성(珹)에게 양자로 가서 법례(法例)대로 관직을 받으셨다. 그 때에 광해군(光海君)이 혼암하고 포악하여 동기(同氣)들을 죽여 없애고, 모후(母后)를 유폐(幽閉)하였다. 또 사형 당할 죄수를 꾀어서 무옥(誣獄)을 일으켜 공의 아우인 능창군(綾昌君) 전(佺)이 원통하게 죽게 되었으므로 공량왕께서 그 일로 병환이 위독해지시니, 공께서 약을 맛보며 옆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고 항상 재계하고 목욕하고서는 하늘에 빌었다. 그러다가 상을 당하게 되자, 죽을 들고 피눈물을 흘리며 우시어 거의 생명을 잃을 지경이시었다. 그런데도 음식에 맛있는 재료를 첨가할 것을 우려하시어 반드시 앞에서 조리하게 하였으며, 관직을 제수 받았으나, 그대로 문을 걸어 잠그고 슬픔을 참으셨다.
천계(天啓) 계해년에 인조대왕께서 모후의 명령으로 대통을 계승하시자, 한(漢) 나라 도원(悼園)의 고사(故事)에 의거하시어 사묘(私墓)를 흥경원(興慶園)이라 고치시고, 어머님 구씨(具氏)의 존호(尊號)를 계운궁(啓運宮)이라 하시었다. 그러므로 공께서는 양자 가신 곳에서 돌아오시어 흥경원의 제사를 받들게 되어 특별히 정일품의 품계에 승진되셨다. 계운궁의 상사를 당해서 공이 기운을 잃고 수척하여 일어나지도 못하시므로, 인조대왕께서 우시며, ‘몸을 위태롭게 하지 말라.’고 경계하시었으나, 하사하시는 약에 혹시 자양(滋養)이 될 것이 섞였을까 우려하시어 받기만 하고 복용하지 않으셨다. 숭정(崇禎) 임신년에 원종(元宗)의 휘호(徽號)를 올리고 종묘(宗廟)로 올려서 모시니, 공은 작위가 대군(大君)으로 승진되시어 지위가 종반(宗班)의 으뜸이 되시었다. 병자년 호란(胡亂)에 대가(大駕)를 호위하고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가셨는데 성의 포위가 더욱 급하여지자, 공은 눈물을 뿌리시며 분개해서 말씀하시기를 “군신과 부자는 각자 충성과 의리를 다해야 하며 그러다가 만일 불행하게 된다면 역시 종사를 위하여 성을 등지고 죽기를 결단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하시니, 듣는 자가 숙연하였다. 오랑캐가 세자를 인질로 내줄 것을 요구하자, 공은 우시며 말씀하시기를, “세자께서는 나라의 근본이시니 결코 허락할 수 없는 일입니다. 신이 대신 가겠습니다.”라고 하였으나, 성상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 후에 오랑캐가 조약을 체결하고 갔으나, 나라의 일에 있어서는 차마 말할 수 없는 점이 있었다. 공이 그로부터는 절대로 조정의 반열에도 참석하지 않으셨고, 모든 글에는 그대로 대명의 연호를 쓰셨다. 김 문정공(金文正公)이 오랑캐 조정에서 만길 석벽같은 절개를 세우시니, 공이 흠모하고 쳐다보기를 항상 태산이나 북두성같이 하시었다. 성상께서는 공의 뜻에 누가되게 하지 않으시려고 한 번도 사행(使行)에 포함시키지 않으셨는데, 오랑캐 사신은 그것을 가지고 위협하였지만 공은 의연한 태도로 동요하시지 않았다. 여러 이름 있는 재상들이 한 번은 참소를 당해 오랑캐에게 잡혀 가게 되었는데, 또 여러 붙잡혀간 자녀를 속죄(贖罪)할 능력이 없는 부모들에게 공이 모두 아낌없이 자금을 보태주었다. 그래서 집안에 대대로 전해오는 보물들이 모두가 씻은 듯이 비게 되었다. 하사받은 집에 바깥사랑이 없었으므로 성상께서 지어주려 하셨으니 공이 힘써 사양하며 말씀하시기를 “무릎을 용납할 정도면 충분히 편안합니다. 현재 춘궁이 곤궁을 겪고 전쟁으로 인한 상처가 두루 퍼져있으며 수재와 한재가 빈번히 이어지고 백성들이 곤궁하니, 지금이야말로 상하의 군신이 걱정하고 경계해야 할 시기인 것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백성을 고생시키면서 개인의 일을 벌리겠습니까!”라 하시니, 성상께서 그만두셨다. 마침내 대내의 별당(別堂)을 헐어서 집을 지어주셨으니, 이른바 담은당(湛恩堂)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또 한번은 전장을 자신이 점유하여 하사하는 법을 따르라고 하시었으나 끝내 따르지 않으셨고, 전후에 하사한 물건도 모두 소박하고 무늬가 없었으니 공의 뜻에 맞게 하신 것이었다.
갑신년 3월에 유적(流賊)이 북경(北京)을 함락시키고 대명 황제가 붕어(崩御)하시자, 공이 문을 닫고 곡읍(哭泣)하면서 자고 먹는 것도 오랫동안 폐하시었다. 정해년에 강씨(姜氏)의 의옥(疑獄) 사건이 일어나자, 공은 은혜를 온전히 할 것을 비밀리에 청하고, 인해서 몸을 닦고 집을 다스리는 방도를 말씀해 올렸다. 기축년에 인조대왕께서 승하하시자 지극히 슬퍼하시며 사모하시었으며, 슬픔이 밀려오면 번번이 곡을 하셨다.
효종대왕(孝宗大王)께서 즉위하시어 여러 가지 정치를 엄숙하게 하셨는데, 공이 대궐에 나가실 때 종자가 함부로 따라 들어갔음으로, 공께서 차자를 올려 처벌해주시기를 청하기를“법을 시행하는 것은 친하고 귀한 이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하시었다, 성상께서 한번은 정조(政曹)에 하교 하시기를 “숙부가 나이 많으신데 그 마음을 위로해 기쁘게 해 드릴 것이 없으니, 그 셋쩨 아들 형(瀅)을 특별히 승자(陞資)시켜 주원(廚院)의 부제조(副提調)가 되게 하라.”하시고, 조금 있다가 그 형 함(涵)과 함께 관작을 올려서 군(君)을 봉하시고, 또 얼마 안 되어서 식(湜)을 네 자급(資級)을이나 초과하여 승진시켜서 대행인(大行人)을 삼아서 연경에 사신으로 보내시니, 사람들은 영광으로 여겼으나 공의 뜻은 매우 즐겁지가 않았다. 그러나 역시 감히 말하지도 못하였다. 병신년 원단(元旦)에 문안하는 반열에 나갔다가 병이 도져서 가마에 태워 돌아오니, 성상께서 들으시고 크게 놀라시어 급히 인평대군(麟坪大君) 요(㴭)를 시키시어 중사(中使)와 태의(太醫)를 거느리고 가서 구호(救護)하게 하셨으나, 그날 저녁에 공이 돌아가셨다. 성상게서 자주 상청(喪廳)에 나가시어 좌우의 사람까지 슬픔에 잠기게 하셨고, 부인께 물으시기를 “숙부가 관심을 갖고 계신 일은 무슨 일이었습니까?” 하시니, 대답하시기를 “단지 임금을 사모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뿐이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염습(斂襲)하는데 옷과 이불이 없어서 모두 대내에서 하사하신 것에 힘입어서 치렀으니, 죽은 이를 보내는 예절이 특별히 보통 관례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3월 17일에 예법을 갖추어 양주군(楊州郡) 풍양리(豐壤里) 자좌(子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으니, 조모(祖母)이신 인빈(仁嬪)의 묘소(墓所)와 가까웠다.
후일에 연신(筵臣) 조복양(趙復陽)이 아뢰기를 “능원대군은 효행(孝行)과 청절(淸節)이 한 세상의 어진 공자(公子)이신데, 아직도 시호(諡號)를 내려주는 은전이 없습니다.” 하니, 성상께서 “본가에서 미처 청하지 못했는데 곧바로 주는 경우도 있는가?”하시니, 정승 정태화(鄭太和)가 고사를 아뢰어서 드디어 정효(貞孝)라고 내려주셨으니, 청백하고 절개를 지키는 것을 “정(貞)”이라 하고, 자혜롭고 부모를 사랑하는 것을 “효(孝)”라고 한다.
공은 따뜻하고 부드럽고 간결하고 종용하며, 공손하고 검소하고 인후하시어, 여러 숙부를 공경하여 섬기기를 마치 낳아주신 분처럼 모시었고, 항상 능창군이 원통하게 죽은 것을 지극한 아픔으로 여기셔서 그의 측실에게서 낳은 딸을 거두어 길러서 시집까지 보내셨고, 서모 김씨가 자식이 없는데 대접하기를 지극히 후하게 하시었다.
매양 관직에 겸임되는 일이 있으면 겸손하시어 해면(解免)해주기를 빌어 소장을 여러 번 올렸으며, 항상 초연하여 사물 밖에 홀로 서시었으나 오직 충숙공(忠肅公) 수(睟)가 전에 모후를 위하여 절개를 세웠고, 현주(玄洲) 윤신지(尹新之), 동회(東淮) 신익성(申翊聖), 무하당(無何堂) 홍주원(洪柱元)이 왕실의 의빈(儀賓)으로 문학과 행의가 있었으므로 마음을 털어놓고 서로 친해서, 오면 술을 주고받으며 기쁨을 다하고서야 헤어졌다. 혹시 전택을 장만하여 자손의 생계를 삼으라고 권하면 말씀 하시기를 “내가 왕실의 지친으로 30년이나 부귀를 누렸으니 그것으로 이미 족한 것이라. 자손은 제대로 봉급이 있을 것인데 다시 무엇을 더 해주랴!” 하시었다. 무릇 음악이나 미색이나 재물에는 일체 마음을 두지 않으셔서 인평대군이 한번은 생신날에 와서 아름다운 옷을 드리니 곧 사양하시며 말씀하시기를 “내 성품에 맞지 않는 것이다.” 하셨다. 대내에서 하사한 곱고 좋은 것은 절하고 받은 뒤에 친족의 가난한 이에게 나눠주셨으므로 집에는 없었다. 항상 관가의 곡식을 대부받고서 갚지 못하여 인조(仁祖)께서 대내에서 대신 갚게 하시고는 공에게 알리지 못하게 하시었다. 좋은 때나 명절날이면 두 성인께서 매양 편전으로 불러들이시어 조용히 담화하시는데 화기가 애애하였다. 간혹 그 당시 정치의 잘하고 못한 것과 시정의 여론을 물으시면 하나도 대답해 알리는 것이 없었으며, 행동을 항상 지극하고 근엄하게 하시어 비록 자제나 비복들이 뵈어도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셨고, 농담하고 방탕하게 구는 자를 보시면 반드시 얼굴빛을 고치시고 조용히 침묵하셨다.
관혼상제는 반드시 『주자가례(朱子家禮)』와 『격몽요결(擊蒙要訣)』에 따르시고, 변해야 할 예법이 있으면 반드시 물으시고 행하셨으며, 감히 자신의 마음대로 하지 않으셨다. 항상 말씀하시기를 “관혼은 그것이 성인되는 시초이고 만복의 근원이므로 더욱 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하셨다. 인평대군이 공복(功服)과 시마복(緦麻服)이라는 이유로 유연(遊宴)을 중지하지 않자, 공이 그것을 말리셨는데, 인평대군이 말하기를 “사동산(謝東山)이 거문고와 피리를 폐지하지 않았고 죽림칠현(竹林七賢)들이 방달(放達)했으나, 고금에 모두 칭송합니다.” 하니, 공이 정색하시고 말씀하시기를 “옛사람이 행한 일이 반드시 다 옳은 것은 아니다.” 하시고, 이어서 탄식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진(晉) 나라의 이름난 선비들이 마침내 신성한 중국을 침몰시켰다. 사대부는 마땅히 충무후(忠武侯)가 몸을 아끼지 아니하고 생명을 바쳤던 것처럼 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세속에서는 음사(淫祀)를 숭상하였고 종척(宗戚)들이 더욱 심하였으므로 공이 말씀하시기를 “제사 지낼 귀신이 아닌데 제사 지내는 것은 아첨하는 것이다. 하물며 화와 복은 선악에서 말미암으니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계속한다면 빌 곳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일찍이 자제들을 경계하여 말씀하시기를 “항상 성하고 가득한 것을 두려워하면 가득 찼어도 넘치지 않는 것이니, 너희들은 땅을 골라서 밟고 말 할 때에만 말하여, 자기의 분수를 지키고 자기의 생명을 온전하게 한다면, 큰 사람이 되었다고 할 것이다.”라고 하시었으니, 어찌 공처럼 어질고 덕 있는 분을 누가 짝할 수 있겠는가. 병자년 후에 스스로 지키신 것은 높고 높아서 미치지 못할 바이다. 오랑캐 사신이 오고 가는 데는 비록 비복이라도 절대로 나가 보지 못하게 하시었으므로 조정에서 모든 임명서에 오랑캐의 더러운 연호를 감히 쓰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끝내 그 더러운 때가 오르지 않았으니 비록 해나 달과 빛을 다툰다고 하여도 가할 것이다.
공의 부인은 문화 유씨(文化柳氏)로 부덕이 구비되셨고, 생산도 많으셨으나 항상 기르지 못하였다. 그 중에 영걸(英傑)이라 하는 아이가 있어 지극한 성품을 지녔는데, 역시 일찍 죽어서 공께서 더욱 애통해하시고 아까워하시었다. 김만성(金萬成)의 따님이 공을 모시어 다섯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는 영풍군(靈豐君) 식(湜)으로 유씨 부인께서 아들로 정하시었는데, 항상 예전의 훈계를 잘 지키어 가정이 조용하여 사람 없는 집과 같았다. 다음은 영은군(靈恩君) 함(涵)이요, 또 다음은 영신군 (靈愼君) 형(瀅)이요, 또 다음은 영춘군(靈春君) 정(涏)이요, 끝은 영순정(靈順正) 유(浟) 요이다. 큰 따님은 유순창(柳壽昌)의 아내가 되었고, 그 다음은 영정(英淨)이라고 하는데 천품이 특이하여서 공이 매우 사랑하셨으나 공이 돌아가시자 슬픔으로 지쳐서 먹지 못하다가 죽었는데 나이 18세였다. 성상께서 그 집의 문에 효녀 정문을 세워주셨고, 끝은 유성삼(柳省三)의 아내가 되었다가 남편이 죽자 자결해서 남편을 따랐다. 영풍군의 장남은 금천부정(錦川副正) 기(榰)요, 다음은 금창부정 (錦昌副正) 온(榲)이요, 세 따님의 사위는 홍기학(洪箕學),윤속(尹涑), 백시휘(白時輝)요, 서얼 자녀는 금남수(錦南守) 동(棟), 금양수 (錦陽守) 양(樑)이다. 영은의 세 아들은 다 부정(副正)이니 하성(夏城) 장(樟),하산(夏山)재(梓),하천(夏川) 의(椅)이다. 해창부정(海昌副正) 해(楷)와 서영세(徐永世)는 영신군의 아들과 사위이다. 상(相)과 미(楣)는 관직을 받지 못했는데 영춘군의 아들이다. 파성부정(坡城副正),파산부정(坡山副正), 파릉수(坡綾守)는 영순의 세 아들 빈(彬)과 삼(杉), 측실이 낳은 참(槮)이다. 금천은 두 아들이 있으니 동선정 병(炳)과 동창수 정(炡)이다. 안팎으로 증손과 현손이 매우 많아서 다 기록하지 못한다. 공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내가 보기에 사대부들이 칭송할 만한 덕도 없고, 기록할 만한 공도 없으면서 아름다운 시호를 받고 비석을 세워서 사람들에게 자랑한들 자기에게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하시고, 자손들을 돌아보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하셨으므로, 영풍군 형제가 행장을 편찬하면서도 감히 칭송하는 말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뜻을 나에게 보이었다. 내가 가만히 생각하건대 공의 좋은 말씀과 착한 행실은 진실로 다 기록할 수 없으나, 오직 꺾이지 않는 절개와 대명을 향한 정성은 쇠나 돌이라도 뚫을 것이니, 사마부(司馬孚)는 비교할 것이 못되고 고죽군(孤竹君)의 두 아들만이 같이 말할 수 있을것이오, 그 예절을 좋아하고 선을 행하는 것으로는 하간(河間)이나 동평(東平)과 서로 위아래가 될 만한 것이다. 아, 우리 열성조의 교화가 아니시면 어찌 그럴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묘지가 좋지 못하여 뒤에 잘못되는 일이 있을까 염려스러우나, 집의 재산이 쓸쓸해져서 이장(移葬)할 계획을 세울 수 없다고 한다. 예전에 위(魏) 나라의 신릉군(信陵君)은 유명한 하나의 공자이었으나, 한(漢) 나라 고조(高祖)가 다른 세대의 사람에 대해서도 느낀 바가 있어서 그 묘지를 수호하게 하였으니, 누가 그런 의리를 성상께 진달할 것인가.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시경(詩經)의 관저(關雎)를 노래하여 인지(麟趾)에 미쳤으니,
왕화의 흡족함으로 상서로움이 호응하여 저절로 이른다.
아름다우신 정효공은 공량왕(恭良王)의 아드님이시고 선묘(宣廟)의 손자이시니
특별하게 총애 받으시다 중간에는 화를 당하였다.
동기의 죽음 슬퍼하였고
또 다시 부친상을 당하시어 피눈물에 눈귀마저 흐려졌네.
성주(聖主)께서 하늘의 명을 받으시어 나라 운수 태평을 회복하니,
사묘(私廟)를 원(園)으로 바꾸어 공께서 그 제사를 주관하시었네.
계운궁(啓運宮)은 지존이 아드님이신지라 공께서 모시고 봉양하니
지위 높고 물건 구비되었네.
원(園)에서 태묘(太廟)로 올려 모시니 공의 지위 높아졌건만
공은 조심조심 떨어질듯이 겁내시었네.
결백한 몸가짐은 옥병에 물을 담은 듯하고,
수많은 재물은 티끌처럼 여겼다네.
병자년· 정축년이 되어서는 외로운 성 하마터면 무너질 것을
공께서 의리 분발하여 한나라의 북지왕(北地王) 같이 하시었으나
일은 틀려졌고, 공께서만 의리 높이셨다.
갑신년 봄이 되어 우리 천자 돌아가시니
공께서 피눈물로 우셨으나 같이 죽지 못한 걸 한탄하셨네.
주나라 존중하는 한결같은 생각은 처음이나 끝이나 변함 없었으니,
임금의 아우 아니시면 그 누가 그 아름다운 덕 좋아하실까.
인성(仁聖)의 근원이 어찌 가지에서 쇠하겠는가.
아, 정효공이시여! 좋은 명예 그치지 않으리.
공이 돌아가신 지 26년 된 신유신 봄에 성상께서 교지를 내려 이르시기를, “능원대군은 왕실의 종친으로 그 효행과 절의가 가히 종실신하의 의표가 될 만하다.” 하시고, 예관을 보내어 그 묘에 제사를 지내게 했다. 공은 처음에 양주의 풍양현에 장사 지냈는데, 기사년 8월에 양주의 동쪽 백록동(白鹿洞) 오향(午向) 의 언덕에 이장하자, 예조에 명하여 □14과 석회 300석과 장생전(長生殿)의 재관(梓棺) 1부(部)를 내려 예우로 장례하였다. 해도(該道)로 하여금 역군(役軍)을 보내주게 하고 또 성빈(成殯), 계빈(啓殯), 조전(祖奠), 견전(遣奠)을 내려주어 장례를 준비하게 하였다. 조석상식(朝夕上食)과 주전(晝奠)은 중사(中使)를 보내서 처음과 같이 호상(護喪)하게 하고, 또 별도의 중사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그 뒤 사당을 세울 때는 해조(該曹)로 하여금 쌀과 베를 내어 돕게 하였으니, 모두가 특별한 은전이었다.
아들 식(㵓)은 소덕(昭德)에 승진시키고, 함(涵)은 가덕(嘉德)에 승진하고, 형(瀅)은 흥록(興祿)에 승진시키고, 정(涏)은 승헌(承憲)에 승진시켰다. 손자 기(榰)는 도정(都正)에 승진시켜 작위를 물리어 군(君)으로 봉하고, 온(榲)은 도정을 증직하고, 장(樟)·재(梓)·의(椅)·삼(杉)·참(槮)은 모두 도정으로 승진시켰으며, 량(樑)은 행정(行正)에 승진시켰다. 증손자 병(炳)과 정(炡)는 모두 동선(東善君)과 동창군(東昌君)에 봉하고, 욱(煜)은 도정으로 승진시켰다. 처녀(處女) 영정(英淨)은 그 효행으로 정려문(旌閭門)을 세워주고, 유성삼(柳省三)의 처 영순(英順)은 그 열행(烈行)으로 정려문을 세워주었다.
부부인(府夫人) 유씨(柳氏)는 기묘년 9월에 손자 기로 인하여 상이 송상국(宋相國)으로 하여금 비문을 짓게 했으며, 신유년 중간에 다른 사람에게 명하여 고치게 했으나, 갑술년에 연신(筵臣)의 아뢴 일로 인해서 처음 지은 것으로 새기게 하라고 명령했다. 정해년 2월에 내사(內司)에 특명을 내려서 치석(治石)하게 하고 곧 신 최석정(崔錫鼎)에게 명하여 그 발문(跋文)을 짓게 했다. 공은 마음이 돈독하고 우애와 은총이 비할 바가 없었고 행의(行誼)와 지절(志節)이 뛰어나 모든 종족(宗族)들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 이하 판독불능 -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 신 최석정(崔錫鼎)은 하교를 받들어 삼가 발(跋)을 짓다.
숭정(崇禎) 무진 정해 10월 일에 내수사 명을 받들어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