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국(高麗國) 조산대부 예빈경(朝散大夫 禮賓卿) 고공(高公) 묘명(墓銘)
고공(高公)은 이름이 영중(瑩中)이고, 자는 여회(如晦)로, 전주 옥구현(全州 沃溝縣)
1사람이다. 아버지 돈겸(惇謙)은 공생(貢生)
2으로서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벼슬이 감찰어사(監察御史)에 이르고 당세의 이름난 선비가 되었는데, 군기주부(軍器主簿) 박현인(朴玄仁)의 딸과 결혼하여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문장으로 세상에 알려졌고, 일찍이 남성시(南省試)에서 으뜸을 차지하여 ▨판(▨版)에 올랐으며, 갑신년(의종 18, 1164 )에 ▨ 과거[春官]에 급제하였다.
3 관례에 따라 황주목사 겸 장서기(黃州牧使 兼 掌書記)가 되었는데 치적이 우수하다고 평가되었으므로 임기가 차자 국학학정(國學學正)이 되고, 사문박사(四門博士)를 역임하였다. 서도(西都)가 ▨ 북쪽의 길이 막혔는데,
4 금(大金國)에 고주사(告奏使)를 파견하게 되자 공은 서기관(書記官)으로서 위험을 무릅쓰고 사잇길을 따라 사명을 완수하였다. 돌아오자 담당 관리가 아뢰어 왕명을 잘 받들었다고 ▨ 포상하니, 그 공으로 대관서령 겸 직사관(大官署令 兼 直史館)이 되었다. 추밀원당후관(樞密院堂後官)을 거쳐 감찰어사(監察御史)에 이르고, 거듭 승진하여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이 되었다. 서해도
5 청▨사(西海道 淸▨使)가 되어 나가자, 너그럽고 간편하게 힘써 다스렸으므로 온 고을이 되살아났다. 병부낭중(兵部郞中)을 거쳐, 얼마 뒤 이부낭중 국자사업(吏部郞中 國子司業)이 되고, 여러 차례 옮겨 중서사인 지제고 겸 국학직강(中書舍人 知制誥 兼 國學直講)이 되었다. 병부시랑(兵部侍郞)을 거쳐 기미년(신종 2, 1199) 겨울에는 예빈경(禮賓卿)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에는 남성시(南省試)를 주관하여 진화(陳澕) 등 23인을 뽑으니, 모두 당시의 이름난 문사들이었다.
6
임술년(신종 5, 1202)에는 여러 차례 글[表]를 올려 은퇴하기를 원하여, 조산대부 예빈경 동궁시강학사(朝散大夫 禮賓卿 東宮侍講學士)로 물러났다. 진신 기구(搢紳 耆舊)들과 함께 한적하고 우아하게 교유하면서 진솔회(眞率會)를 만들어 시와 술로 스스로 즐겼으며, 바위에 구로회(九老會)라고 새겨서 세상에 알렸다.
7 무진년(희종 4, 1208) 9월 상순일에 병으로 집에서 돌아가시니, 그 달 23일에 하원군(河源郡)
8 북쪽 기슭에서 화장[茶毗]하였다. 유골을 거두어 임시로 광▨난야(廣▨蘭若)에 모셔두었다가, 이듬해 9월 15일 송림현(松林縣)
9 동쪽 산기슭에 장례지냈다.
공은 성품이 맑고 조용하고 욕심이 적었으며, 뛰어나게 총명하였다. 처음 성균시(成均試)에 응시하였을 때 ‘나라는 지극히 공정한 기구이다[國者至公之器]’라는 시로 ▨ 시험을 치러서 1등으로 뽑혔는데, 그 끝 구절에
한 번 기울어지면 다시 바로 세우기가 어려우니
원컨대 임금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신중하소서.
라고 하니, 온 세상이 찬탄하였다. 이는 비단 한 때의 문장의 본보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또한 인생의 거울이 되는 것이니, 공의 ▨ 충성스럽고 바르게 풍간(諷諫)하려는 ▨ 뜻이 벼슬을 하기도 전에 나타난 것이 이와 같았다.
아, 공이 벼슬한 이래 분수를 ▨(〔지켜〕) 나라를 걱정하여서, 다섯 차례나 사신으로 갔다왔으면서도 털끝만큼도 이익을 취하는 바가 없었으며, 청렴하고 검소하고 부지런함을 몸소 ▨ 명성을 떨쳤다. 대각(臺閣)에 ▨▨ 문장으로 전장(典章)을 가다듬은 것이 많았고, 고향 친척[鄕黨]의 자제에 이르기까지 가난하여 스스로 능히 업을 잇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가깝고 먼 것을 가리지 않고 모두 집으로 불러서 혹은 기르기도 하고, 혹은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고향 친척 중에서 공의 덕분으로 성공한 사람도 매우 많았다.
공은 검교태자사사(檢校太子司事) 이양서(李陽舒)의 딸과 결혼하여 6남 2녀를 두었다. 장남 간(간)은 행의안군
10감무(行義安郡監務)가 되었고, 차남 홍조(洪照)는 출가하여 승과[浮屠選]에 급제하였으나 일찍 죽었다. 3남 일(佾)은 산직(散職)으로 양▨▨(良▨▨)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녹(祿)을 받지 못하였다. 4남 주(做)는 ▨ 북원(北原)
11의 수령으로 나갔다가 임기가 차자 내시(內侍)에 속하게 되었고, 5남 정(侹)은 지금 당진현
12 감무(唐津縣監務)인데, 모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6남 천(倩)은 상의직장동정(尙衣直長同正)이 되었다. 장녀는 위위주부(衛尉主簿) 최입기(崔立基)에게 시집갔는데 지금 일선현
13령(一善縣令)이 되었다. 차녀는 흥위위녹사(興威衛錄事) 김선용(金璿瑢)에게 시집갔는데 나와 함께 과거에 급제하였고, 또한 같이 한림(翰林)에서 근무하여 외람되게 ▨ 가장 가깝게 지내고 있다. 내게 ▨(묘지명을) 청하니 사양하였으나 어쩔 수 없이 글을 짓는다.
명(銘)하여 이른다.
문장으로 세상을 상서롭게 하니 호랑이와 봉(鳳)새처럼 뛰어났으며
한결같은 절의(節義)는 쇠붙이나 돌보다도 더욱 단단하였네.
지위 또한 귀하여져서 구극(九棘, 大臣)의 빛난 벼슬에 잇달아 올랐고
장수하고 또 평안하게 지내면서 해수(亥首)
14의 높은 나이를 누리고
훌륭한 자식과 사위들이 난옥(蘭玉)과 같이 뜨락에 가득 찼도다.
아, 창성하였으니, 돌에 새겨 먼 후세에 전하노라.
대안(大安)
15 1년 기사년(희종 5, 1209) 9월 일
문림랑 감문위장사(文林郞 監門衛長史) 이원로(李元老)
<후면>
고려국(高麗國) 예빈경(禮賓卿) 고공(高公) 묘명(墓銘)
〔출전:『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