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신높이 116.9cm 귀부 가로 197.0cm 세로 182.0cm 이수 높이 56.0cm
소재지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20 태안사
서체
행서(行書)
찬자
/각자
/서자
손소(孫紹)
/ 문민(文旻)
/ 미상
지정사항
보물
연구정보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이(가) 개방한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谷城 泰安寺 廣慈大師塔碑)
저작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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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태안사(泰安寺)에 있는 신라말 고려초의 선사 광자대사 윤다[廣慈大師 允多, 864(경문왕 4)~945(혜종 2)]의 비. 고려초의 문인 손소(孫紹)가 짓고 정간(井間)을 치고 행서체의 글씨를 문민(文旻)이 새겨 대사가 입적한 5년 뒤인 950년(광종 1)에 세웠다. 보물로 부근에 보물로 지정된 광자대사탑과 함께 보존되어 있다. 약 150년 전에 비신이 무너져 큰 조각 2개와 여러 개의 작은 조각으로 나뉘어져 있고 비신의 오른쪽 윗부분과 아랫부분이 많은 손상을 입었다. 귀부의 머리 부분과 이수의 가운데 부분도 없어졌으며 현재 남은 비신 조각을 곁에 따로 새 대좌를 만들어 세워 놓았다. 비문은 광자대사가 태어나 출가하여 교화 활동을 하다 태조가 사신을 보내 초청하자 궁궐에 있다가 흥왕사에서 머물고 태조의 아들이자 성종의 부친이 되는 대종욱(戴宗旭)이 제자가 되고 동리산 대안사로 돌아와 입적한 생애를 기술하였다. 특히 비문 말미에 복전(福田) 수와 법석을 열거하여 3천석에 이르는 본전식(本傳食), 예식(例食), 500결의 전답과 143결의 시지(柴地), 염전, 23명의 노비를 상세히 기록하여 사원경제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유당(有唐) 고려국(高麗國) 무주(武州) 고(故) 동리산(桐裏山) 태안사(大安寺) 교시(敎諡) 광자대사비명(廣慈大師碑銘)과 서문(序文).
대저 허공을 쳐서 메아리를 나타나게 하는 것은 진실로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능력에 응하는 진실만은 취하고 소리를 감추려 한 것이니, 어찌 이것이 미혹에 처하는 술문(術門)이 아니겠는가. 비록 넓으나 피안(彼岸)으로 나아갈 수 없고, 비록 밝으나 그 경지를 넘기는 어려운 것이다. … 다생(多生)의 법기(法器)를 주조하였다. 그리하여 불교가 발상 한지 약 1천년 후에 비로소 중국으로 전래되었고, 그로부터 약 5백 성 상을 지난 뒤에 우리나라 스님들이 중국으로 유학하러 가서 현철(賢哲)을 만나고 법을 전해 받아 귀국하였다.
그 중에는 칠정(七淨)1을 이어 받아 걸출하였으며, 혹은 … 대사의 법휘는 윤다(允多)요, 자는 법신(法信)으로 경사(京師) 출신이다. 그의 조 부모는 귀족으로서 고관(高官)을 역임하였으며, 효도와 의리를 소중히 여겨 충효의 본이 되었다. 이렇게 가문을 지켰지만, 난리가 나서 몰락하였다. 그러나 명성과 칭송은 많은 사람들의 귀와 귀로 들렸고, … 불사(佛事)를 닦아 산악(山岳)과 같은 정기를 받아 잉태하고 또 어려움 없이 분만하였으니, 효감(孝感)을 말미암아 순산함이 마치 가을에 서리를 맞은 씀바귀가 쉽게 뽑히듯 산고 없이 함통(咸通) 5년(경문왕 4, 864) 4월 5일에 탄생하였다. … 예의와 법도는 아무리 위급한 조차전패(造次顚沛)의 경우라도 예를 그르치지 아니하였다. 지극히 효도를 다하여 선침(扇枕)2의 칭송은 어려서부터 고향 주변에 널리 알려졌으며, 추회(搥灰)와 같이 민첩한 변재는 바람을 타고 멀리까지 퍼져 갔다.
나이 겨우 7~8세에 … 허락하지 못하였다. 허락을 받지 못한 대사(大師)는 잠연(潛然)히 실망하였고, 이를 본 어버이는 설득하되 “출가 수도하는 것도 이익이 없지 않으나 옹자(翁子)인 주매신(朱買臣)의 금의 출세(錦衣出世)하는 것이 어찌 산승(山僧)의 취납(毳衲)인 … 사해(四海)로 행각하였다. 다니거나 머무름에 오직 외로운 자신의 그림자와 벗할 뿐이었다. 이와 같이 어느덧 염량(炎涼)이 바뀌어 수년이 지났다.
이로부터 다시 발걸음을 돌려 요동(遼東)을 거쳐 길을 재촉하여 전라남도 곡성군 태안사가 있는 동리산(桐裏山)으로 가서 … 뜻이 간절하면 땅에서 갑자기 샘물이 솟아오르게 된다. 도(道)는 몸 밖에 있지 않으며 부처님은 마음에 있는 것이다. 숙세(宿世)로부터 익힌 자는 순간인 찰나(刹那)에 깨닫게 되고 몽매한 자는 만겁에도 생사에 윤회하여 벗어나지 못하니, … 구족계를 받은 후로는 다만 원숭이 같이 단단히 얽어 매였고, 말 같은 의식 또한 놓아두지 아니하였다.
계(戒)를 받은 후로부터 유발(油)을 기울어지지 않게 하였다. 계를 지키려는 굳은 마음은 주야로 한결같고, 수도하려는 강철 같은 마음은 순간에도 쉬지 아니하였다. 대문과 창문을 열고 들어가지 아니하여도 … 전하였고, 혜철은 여(如)인 도선(道詵)에게 전하였으며, 여(如)인 도 선(道詵)은 우리 광자(廣慈)스님에게 전하였으니, 즉 서당의 증손(曾孫)인 셈이다. 대사는 서당(西堂)의 법통을 전해 받았으니, … 지야(祇夜)3를 의지하고, 무사(無師)의 취지(趣旨)를 스승으로 하되 반드시 수다라(修多羅)를 가자(假藉)하였다. 드디어 일심(一心)을 닦는 자로 하여금 일음(一音)의 교리를 믿게 하며, … 항상 본사(本寺)를 잊지 아니하다가 고산(故山)으로 돌아왔다. 이틀째 되던 날 밤에 갑자기 산적이 절에 침입하여 의물(衣物)을 빼앗고자 상방화상(上方和尙)의 방으로 들어왔다.
대사는 … 이 광경을 지켜본 대중들은 감탄하였다. 그날 밤 꿈 에 한 전장(戰將)이 법당에 들어가 … 꿈을 깨고 놀라 일어나 세수한 … 밤중에 나비의 꿈을 꾼 것은 …
칠정화(七淨華)의 준말로 각지(覺支)에 비유한 것이다. 칠정화 (七淨華)란 ①계정(戒淨), ②심정(心淨), ③견정(見淨), ④도의정(度疑淨), ⑤분별도정(分別道淨), ⑥행단지견정(行斷知見淨), ⑦열반정(涅槃淨)을 말한다. ↩
선침온피(扇枕溫被)의 준말로 노자(老子)의 행(行)을 가리킨다. 여름 더울 때에는 어버이의 베개를 시원하도록 부채질을 하고, 겨울 추울 때는 침석(枕席)을 따뜻하게 해 드린다는 뜻이다. ↩
12부경(十二部經)의 하나이다. 구역(舊譯)에는 중송게(重頌偈), 신역(新譯)에는 응송(應頌)이라 했다. 전단(前段)에서 장행(長行)으로 설한 경문(經文)을 다시 거듭 설한 것이므로 중송(重頌)이라 한다. ↩
유당(有唐) 고려국(高麗國) 무주(武州) 동리산(桐裏山) 대안사(大安寺) 광자대사비문(廣慈大師碑文)과 아울러 서문.
태상(太相) 전수예빈령(前守禮賓令) 원봉령(元鳳令) 겸지제고(兼知制誥) 상주국(上柱國) 사자금어대(賜紫金魚袋) 신(臣) 손소(孫紹)가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사찬(沙粲) (결락) 監 (결락) 賜緋魚 (결락) 는 비문을 쓰다.
대저 허공을 쳐서 메아리를 나타나게 하는 것은 진실로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능력에 응하는 진실만은 취하고 소리를 감추려 한 것이니, 어찌 이것이 미혹에 처하는 술문(術門)이 아니겠는가. 비록 넓으나 피안(彼岸)으로 나아갈 수 없고, 비록 밝으나 그 경지를 넘기는 어려운 것이다. 지극한 이치가 그 가운데 있으니 그루터기만 지키게 하는 자는 견성(見性)할 수 없으며, 진종(眞宗)은 마음 밖에 있어서 규관(窺管)하는 사람은 심인(心印)을 전해 받을 수 없다. 여러 생(生) 동안 도아(道芽)를 심었으므로 비로소 다생(多生)의 법기(法器)를 주조하였다. 그리하여 불교가 발상한지 약 1천년 후에 비로소 중국으로 전래되었고, 그로부터 약 5백 성상을 지난 뒤에 우리나라 스님들이 중국으로 유학하러 가서 현철(賢哲)을 만나고 법을 전해 받아 귀국하였다. 그 중에는 칠정(七淨)을 이어 받아 걸출하였으며, 혹은 십지(十智)를 쌓아서 높이 빼어났으니, 옛부터 희유할 뿐 아니라 지금도 존귀한데, 선과 교를 양전(兩全)하여 쌍미(雙美)한 분이 계시니 곧 우리 스님이시다. 대사의 법휘는 윤다(允多)요, 자는 법신(法信)으로 경사(京師) 출신이다. 그의 조부모는 귀족으로서 고관(高官)을 역임하였으며, 효도와 의리를 소중히 여겨 충효의 본이 되었다. 이렇게 가문을 지켰지만, 난리가 나서 몰락하였다. 그러나 명성과 칭송은 많은 사람들의 귀와 귀로 들렸고, 입과 입으로 옮겨 자자하였다. 어머니는 박씨(朴氏)로 성품이 온화하여 사람됨이 정결하였다. 어릴 때부터 속되지 않았으며 未長 (결락) 經. 성심성의로 불사(佛事)를 닦아 산악(山岳)과 같은 정기를 받아 잉태하고 또 어려움 없이 분만하였으니, 효감(孝感)을 말미암아 순산함이 마치 가을에 서리를 맞은 씀바귀가 쉽게 뽑히듯 산고 없이 함통(咸通) 5년 4월 5일에 탄생하였다. 대사가 처음 봉시(蓬矢)를 쏘는 날에 쌍주(雙柱)가 절륜(絶倫)하였다. 장차 강보(襁褓)의 나이를 지나 삼정(三亭)이 전려(轉麗)하여 (결락) 멀리 집 밖에 나가서 놀되, 항상 장소를 일정하게 하였고, 예의와 법도는 아무리 위급한 조차전패(造次顚沛)의 경우라도 예를 그르치지 아니하였다. 지극히 효도를 다하여 선침(扇枕)의 칭송은 어려서부터 고향 주변에 널리 알려졌으며, 추회(搥灰)와 같이 민첩한 변재는 바람을 타고 멀리까지 퍼져 갔다. 나이 겨우 7~8세에 이미 불교에 몸을 던져 수도할 뜻을 품었으니, 부모에게 와문(蝸門)을 이별하고 선교(禪敎)에 입문하기를 청하였다. 이 때 부모는 더욱 애절하여 倍 (결락) 前. 더욱 애정에 얽혀 허락하지 못하였다. 허락을 받지 못한 대사(大師)는 잠연(潛然)히 실망하였고, 이를 본 어버이는 설득하되 “출가 수도하는 것도 이익이 없지 않으나 옹자(翁子)인 주매신(朱買臣)의 금의출세(錦衣出世)하는 것이 어찌 산승(山僧)의 취납(毳衲)인 누더기로 고행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하면서, 슬피 울며 거듭 거듭 만류하여 뜻을 바꾸도록 하였으나, 어버이는 마침내 아들의 뜻이 굳고 굳어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마침내 허락하였다.
대사는 다음날 부모의 슬하를 떠나 (결락) 걷고 걸어서 구름처럼 사해(四海)로 행각하였다. 다니거나 머무름에 오직 외로운 자신의 그림자와 벗할 뿐이었다. 이와 같이 어느덧 염량(炎涼)이 바뀌어 수년이 지났다. 이로부터 다시 발걸음을 돌려 요동(遼東)을 거쳐 길을 재촉하여 전라남도 곡성군 태안사가 있는 동리산(桐裏山)으로 가서 상방화상(上方和尙)을 친견하였다. 서로 면목(面目)을 대하고 형용(形容)을 돌아보았으니 며칠 후 상방화상(上方和尙)을 시봉하게 되었다. 화상이 말하기를 “(결락) 옛 사람이 말하되 마음이 오롯하면 돌도 가히 뚫을 수 있고, 뜻이 간절하면 땅에서 갑자기 샘물이 솟아오르게 된다. 도(道)는 몸 밖에 있지 않으며 부처님은 마음에 있는 것이다. 숙세(宿世)로부터 익힌 자는 순간인 찰나(刹那)에 깨닫게 되고 몽매한 자는 만겁에도 생사에 윤회하여 벗어나지 못하니, 부처님께서 일러 주시되 ‘정신이 어두운 자는 재삼 여러 번 일러주어야 하지만 근기(根機)가 수승한 사람은 말을 생략한다’ 하였으므로, 너는 스스로를 잘 살펴보고, 나의 말에 걸려 있지 말라”고 하였다. 스스로 (결락) 가야갑신수(伽耶岬新藪)에서 구족계를 받은 후로는 다만 원숭이 같이 단단히 얽어 매였고, 말 같은 의식 또한 놓아두지 아니하였다. 계(戒)를 받은 후로부터 유발을 기울어지지 않게 하였다. 계를 지키려는 굳은 마음은 주야로 한결같고, 수도하려는 강철 같은 마음은 순간에도 쉬지 아니하였다. 대문과 창문을 열고 들어가지 아니하여도 대도(大道)를 보았으며, 곤륜산에 오르거나 여해(驪海)에 들어가지 않고도 쉽게 신주(神珠)를 얻었다. 도덕 또한 고매하여 아름다운 명성은 사방에 떨쳤고, 법을 배우고자 하는 법려(法侶)들이 8표(八表)로부터 모여 들었다. (결락) 법조(法祖). 서당지장(西堂智藏)은 혜철(慧徹)에게 전하였고, 혜철은 여(如)인 도선(道詵)에게 전하였으며, 여(如)인 도선(道詵)은 우리 광자(廣慈)스님에게 전하였으니, 즉 서당의 증손(曾孫)인 셈이다. 대사는 서당(西堂)의 법통을 전해 받았으니, 수고롭게 서학(西學)을 하지 않고도 세상의 인연을 동성(東城)에 베풀었다. 참으로 실제(實際)가 본공(本空)한 줄 깨달았으며 (결락) 동인(東人)을 바른 길로 인도하였다. 무학(無學)의 종지인 선(禪)을 배우되 마침내 지야(祇夜)를 의지하고, 무사(無師)의 취지(趣旨)를 스승으로 하되 반드시 수다라(修多羅)를 가자(假藉)하였다.
드디어 일심(一心)을 닦는 자로 하여금 일음(一音)의 교리를 믿게 하며, 구결(九結)에 얽힌 사람으로 하여금 점차로 구업(九業)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여러 가지 방편으로 인도하였으니, 위력으로 사견(邪見)을 꺾고 교화한 인연이 제잠(鯷岑)에 두루하였으며, (결락) 심사구도(尋師求道)한 자취가 도야(桃野)에 두루 닿지 아니한 곳이 없었다. 행각 중에 있으면서도 항상 본사(本寺)를 잊지 아니하다가 고산(故山)으로 돌아왔다. 이틀째 되던 날 밤에 갑자기 산적이 절에 침입하여 의물(衣物)을 빼앗고자 상방화상(上方和尙)의 방으로 들어왔다. 대사는 우연히 뜻밖의 일을 당하였으나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선좌(禪座)에서 움직이지 아니하였고, 위봉(威鋒)을 당하여서는 오히려 그들의 악한 마음을 버리게 하여 지혜의 칼로써 마구니들을 항복시켰다. 적도(賊徒)들이 (결락) 충돌함이 없었다. 대사는 도적들에게 죄란 본래 없는 것이라 하여 허물을 탓하지 아니하니 스님의 말이 끝나자 도적들은 공손히 예배하고 물러갔다. 이 광경을 지켜본 대중들은 감탄하였다. 그날 밤 꿈에 한 전장(戰將)이 법당에 들어가 칠구(七軀)의 물타나(勿陀那)를 보았는데, 맨 끝에 있는 물타나(勿陀那)가 대사를 향하여 (결락) 중인(重忍)이란 두 글자를 적었다. 꿈을 깨고 놀라 일어나 세수한 다음 단정히 앉아 생각하되 “이상하고 이상하다. 백일천하(白日天下)에 의심하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고, 밤중에 나비의 꿈을 꾼 것은 고인(古人)이 겪은 사실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되, ‘한번 참는 것은 영원한 기꺼움을 얻게 되고, 또 한번 참는 것은 세상을 살아감에 편안함을 얻게 된다’고 하였으니, 중인(重忍)이란 두 글자가 어찌 비범한 일이겠는가!” (결락) 대사는 이로 인하여 길이 참선하며 오래도록 이 절에 있게 되었다. (결락) 黃波 (결락) 선의 근본을 통달하였고 성인의 말씀을 초연히 여겼으며, 성색(聲色)의 소굴을 떠나 시비(是非)의 관문을 벗어나게 되었다. 납자(衲子)들은 (결락) 스님의 문 앞에 가득하고 의리를 사모하며 인(仁)을 따르는 이들이 구름과 안개처럼 모여들었다. 참선학도하는 자들은 빈손으로 와서는 마음 가득 채워 돌아갔다. 효종대왕(孝宗大王)은 대사가 산곡(山谷)에서 드날리는 도풍(道風)을 흠모하여 윤한(綸翰)을 보내어 지혜의 눈을 뜨게 해 주시고 나라 또한 복되게 해주기를 발원하였다. 이미 이때에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져 자주 병화(兵火)가 일어났고, 궁예(弓裔)는 어지럽게 난동하고 견훤(甄萱)은 자칭 왕이라 하여 이름을 도용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천명이 왕건에게로 돌아가 고려라는 새 나라를 건립하게 되었다. (결락) 한 때 낭연(狼煙)이 높이 올라 왕래하기가 고통스러웠으므로 스님들은 따로 왕을 도울 길을 찾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신성대왕(神聖大王)이 때를 타고 성주(聖主)가 되어 한대(閒代)의 명군(明君)으로 나라를 편안하게 하고 세속을 편하게 하는 굉기(宏機)를 풍부하게 가졌으며, 불법을 보호하고 진리에 계합(契合)하는 신술(神術) 또한 능통하였다. 나라 일을 보는 여가에는 마음을 항상 현문(玄門)에 두었다.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대사의 명성을 널리 들었기에 낭관(郞官)으로 하여금 어찰(御札)을 가지고 스님이 계시는 동리산으로 보내어 청하되 “도덕을 앙모한 지 이미 오래되오니 스님의 거룩한 모습 뵙기를 원합니다”라 하면서 “스님께서는 이미 연로하셔서 보행하시기 힘들 터이오니, 말을 타고 구중(九重)으로 오신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대사가 말씀하시되 “노승(老僧)이 출가한 이래로 이제 80세에 이르기까지 아직 말을 탄 적이 없습니다. 산승(山僧)도 역시 왕의 국민이니 어찌 감히 왕명을 거역하겠습니까”하고 석장망혜(錫杖芒鞋)한 보행으로 연하(輦下)에 도착하니 임금이 크게 기꺼워하여 의빈시(儀賓寺)에 모시고 며칠 동안 편안히 쉬시게 한 다음, 상전(上殿)으로 영입하였고 임금 스스로 상(床)에서 내려와 공손히 영접하여 빈객(賓客)의 예로써 대우하였다. 군신들이 이를 보고 그윽이 놀랐다. 임금이 묻되 “옛 스님이 말하길 마음이 곧 부처라 하니 이 마음은 어떤 것입니까?” 대사가 대답하되 “만약 열반의 경지에 도달한 이는 불(佛)과 마음에도 머물지 아니합니다.” 다시 임금이 묻되 “부처님께서 어떤 경지를 지나서야 이 열반의 세계에 이르게 됩니까?” 하였다. 대답하되 “부처님은 지나는 과정이 없으며, 마음도 또한 그대로일 뿐 경과함이 없습니다”하니, 재차 묻되 “짐이 하늘의 도움을 받아 란세를 구제하기 위해 흉폭한 무리들을 주살하였으니, 어떻게 하면 생민(生民)을 잘 보호할 수 있겠습니까?” 대답하되 “전하께서 오늘의 묻는 그 마음을 잊지 않으시면 국가가 부강하고, 생민(生民)이 매우 행복할 것입니다.” 또 임금이 묻되 “대사는 어떠한 덕행으로 중생을 교화하십니까?” 대답하되 “신승(臣僧)은 힘이 없어 자신을 구제함은 가능하지만, 어찌 감히 다른 사람의 결박을 풀어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이때 왕은 옥음(玉音)이 낭랑하여 구름이 일어나는 듯한 질문을 꺼리지 아니하였고, 대사는 사변(四辯)이 물이 흘러가듯하여 걸림 없는 것이 마치 병에 물을 쏟아 붓는 것처럼 답하였으니 육조(六祖)스님의 뜻인 도(道)에 저촉하려 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스님의 말씀은 (결락) 三道 (결락)라 하고, 지혜도 또한 (결락) 거지(去也)라 하였으니, 이상과 같이 문답한 것을 자세히 실으려면 글이 너무 번다해지므로 총괄하여 간략하게 기록하는 바이다. 엎드려 생각하노니 (결락) 이제 상(上)께서 (결락) 대왕(大王)의 위엄이 양요(兩曜)와 같고 설법하는 소리는 건곤(乾坤)에 미치며, 덕이 빼어나 두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백성을 다스리되 사당(邪黨)이 없게 하고, 오연(五衍)에 귀의하였으니, 어찌 중인도의 파사익왕이 삼보(三寶)를 존중한 것과 다르다고 하겠는가! 서천(西天)의 계일왕(戒日王)과 함께 정법(正法)으로 나라를 일으켜 세움과 동시에 문(文)을 닦고 근본을 심은 임금이니, 이와 같이 위대한 성군은 고금(古今)을 통하여 드물게 볼 수 있다고 하겠다. 대사(大師) (결락) 삼배(三拜)를 하고 물러가면서 흥왕사에 모시도록 명하였다. 그 후 황주원(黃州院) 왕욱(王旭) 낭관(郞官)이 멀리서 스님의 청풍(淸風)을 앙모하고 편지를 보내 제자가 되어 스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자 희망한다고 하였다. 드디어 열반을 수년 앞두고 산간(山間)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의령(內議令) 황보숭(皇甫崇)과 태상(太常) 충양일감(忠良日監)이 대사의 공양구(供養具)를 살피되 마치 집시자(執侍者)와 같이 하므로 대사는 더욱 마음이 불안하였다. 어느 날 임금께 고하되 “사슴이 들판에서 자유롭게 놀 듯 산중에서 조용하고 편안하게 있도록 놓아 달라”고 간청하였다. “외람되어 어명을 받아 왕성(王城)으로 내왕하니 점차 정에 끌려 부자유함이 헌학(軒鶴)과 양제(梁鵜)로도 비유할 수 없나이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신승(臣僧)의 작은 생각을 가납하시어 구름처럼 고산에 돌아가서 마치 고기가 깊은 물에서 노는 것과 같이 하여 주시면 그 은혜 참으로 크다 하겠나이다”하였다. 이 같은 스님의 간청을 들은 왕은 허락하여 동리산(桐裏山)으로 돌아가게 하고 본도(本道)의 수상(守相)에게 명하여 전결(田結)과 노비를 헌납하여 향적(香積)을 제공토록 하였으며, 외호의 가풍(家風)을 잊지 아니하고 항상 팔연(八行)의 예를 펴서 돈독한 단월이 되어 불교의 보존과 유지의 의무를 받아서 각기 진뢰(陳雷)를 본받았다. 진실로 (결락) 舊分.
대사는 개운(開運) 2년전총(旃䝉) 대황락(大荒落) 2월 2일에 대중을 불러 놓고 말씀하되 “생(生)이란 유한한 것이며, 멸(滅) 또한 그 시기가 미정(未定)한 것이다. 내 이제 떠나고자 하니 각기 뜻있게 잘 살도록 하라. 부처님께서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는 곧 너희들의 위대한 스승이라’ 하였으니, 나도 또한 이 말씀으로 너희들에게 당부하노니 너희들이 이를 잘 준수한다면 내가 죽는 것이 아니다”하고 향을 피우고 염불을 하게 하고 합장하고 엄연(奄然)히 입적하니 속년(俗年)은 82세요, 승랍은 66이었다. 이 때 스님들은 통곡하면서 나루터의 다리와 큰 집의 들보가 이미 무너졌다 탄식하였고, 신백(神伯)들은 애통해 하면서 법륜(法輪)의 문이 영원히 닫혔다고 슬퍼하였다.
심지어 새들마저 답답해하고, 짐승들은 슬퍼하였을 뿐만 아니라 평소 귀를 시원하게 해주던 (결락) 잔잔하게 흐르는 석간수도 애성(哀聲)으로 변하였고, 다년간(多年間) 눈을 즐겁게 하던 산에 덮인 자욱한 구름도 모두 참담한 빛으로 변하였으며, 곤충과 식물들까지도 애통해 한 이 사실을 지필(紙筆)로 어찌 다 적을 수 있으리오.
당시의 이러한 기조(奇兆)를 왕에게 보고하였더니 임금이 본산(本山)에 대사의 탑을 세우게 하되, 경비는 모두 국고에서 부담하게 하고 역부(役夫)로는 부근 주민을 동원토록 하였다. 공사를 마치고 나니 장엄이 주밀(周密)하고 조탁(彫琢)도 매우 우아하였다. 상수문인(上首門人)들이 다시 조정에 건의하되 “선사신(先師臣) 아모가 다행하게 임금님의 도움을 입어 탑을 세웠으니, 국은(國恩)이 망극하여 생전과 사후에 걸쳐 함께 영광이오나 아직 탑에 따른 비명(碑銘)이 없어 선사께서 생전에 쌓은 도행(道行)이 점차로 (결락) 윤몰(淪沒)할까 두렵사오니 비를 세우도록 윤허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하였다. 왕은 수비(樹碑)를 허락하시고 미신(微臣)인 저에게 비문을 지어 스님의 선화(禪化)를 의양(宣揚)토록 하라 명하셨으나, 소(紹)는 칠보시(七步詩)를 지을 만한 재주도 못되며 학문(學問)도 오거(五車)의 책도 읽지 못한 변변치 아니한 선비이므로 굳게 사양하였지만 마지못하여 주생(朱生)과 같이 근부(斤斧)를 잡고, 예씨(禰氏)를 칭찬하는 것이니 부득이하여 억지로 엮어 비문을 지었다. 명(銘)하여 가로되,
위대하신 태안사 광자대사여!
진리의 방편을 요달하시고
깨치신 그 법문(法門) 심오하오며
지극한 그 이치 깊고도 깊네.
그의 덕화(德化) 해동에 널리 전하고
도덕은 해가 뜨는 동국을 덮었네.
자재한 그 행적 구름과 같고
지혜는 달빛이 맑은 물에 비치듯
파란(波瀾)과 이기(理氣)는 하늘을 찌르듯
평등한 그 마음 대원경(大圓鏡) 같아
갑자기 오늘에 열반하시니
어디서 다시 만나 선(禪)을 들으랴!
계족산(鷄足山) 산중에서 열반하시니
운수(雲水)처럼 곳곳으로 행각(行脚)하다가
이곳을 열반지로 정하고 나서
지금까지 이곳서 정진하셨네.
호랑이의 싸움을 그치게 하고
개미를 구제하듯 자비가 깊어
강설(講說)을 할 적에는 돌들도 경청하였고
나무도 그를 항해 점두(點頭)하였다.
어느 날 꿈에 양영간(兩楹間)에 누었다가
신 한 짝만 남겨놓고 홀홀히 갔네.
스님의 분상(分上)엔 설(說)할 만한 법 없건만,
광자(廣慈)란 그 칭호가 있게 되었네.
삼업(三業)은 청정하여 연꽃과 같고
육진(六塵)은 탕제(蕩除)되어 청량과 같아
행각(行脚)을 마치고 동리산(桐裏山)으로 돌아와
모든 대중 한 곳에 모아 놓고서
수발다라 비구가 최후법 듣는 듯
살타파륜이 법을 구함과 같도다.
현묘(玄妙)한 그 말씀은 넓고도 깊어
대혜(大慧)의 지혜라야 헤아릴 수 있네.
내 이제 피안(彼岸)에 오르려 하니
겁화(劫火)가 이내 몸을 태울 것일세.
대중들은 우러러 쳐다보다가
하늘을 부르면서 애통하였네.
이 비석 영원토록 우뚝 솟아서
만세(萬歲)가 지나도록 상하지 않고
영원히 이 비문도 남아 있기를
애오라지 비명(碑銘)을 기록하노라.
광덕(光德) 2년 세차 경술 10월 15일 세우고,
문민(文旻)이 글자를 새기다.
[출전 :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1(1994)]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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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문검색 - 참고문헌
논문
2003
박윤진, 2003, 「高麗初 高僧의 大師 追封」『韓國史學報』14
단행본
1994
李智冠, 1994,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1】, 伽山文庫
논문
1988
金杜珍, 1988, 「羅末麗初 桐裏山門의 成立과 그 思想 -風水地理思想에 대한 再檢討」『東方學志』57, 연세대 국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