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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忠州 淨土寺址 法鏡大師塔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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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정토사 터에 있는 신라 말 고려 초의 선사 법경대사 현휘(法鏡大師 玄暉, 879~941)의 비이다.
고려초의 문인 최언위(崔彦撝)가 짓고 제액은 태조가, 비문은 구족달(仇足達)이 비면에 정간(井間)을 치고 해서로 써서 광예(光乂)·장초(壯超)·행총(幸聰)·행초(行超)가 새겨서 대사가 입적한 2년 후인 943년(태조 26)에 세웠고 음기는 944년에 썼다.
원래 비의 자리가 충주댐 건설로 수몰되어 인근에 옮겨 세워져 있는데, 귀부와 이수를 갖춘 전형적인 양식이며 비신은 상태가 양호하나 군데군데 총 자국이 패여 있다.
비문은 41행에 1행 89자의 구성으로 된 대형 비이다. 비문 내용은 법경대사가 전주에서 태어나 출가한 후 당에 건너가 도건(道虔)의 법을 받고 돌아와 태조에 의해 국사 대우를 받고 정토사에 머물며 이 지역 호족 유권열(劉權說)의 귀의를 받고 활동하다 입적한 사실을 기술하였다.
음기에 도속(道俗)의 많은 사람들을 열거하여 대덕, 대통 등 승려와 좌승, 원보, 원윤, 좌윤, 그리고 지방 자체의 집사부, 병부, 창부 등의 조직을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에 원주, 전좌, 사, 직세, 도유나의 확대된 삼강직이 보인다.
유진(有晉) 고려(高麗) 중원부(中原府) 고(故) 개천산(開天山) 정토사(淨土寺) 교시(敎謚) 법경대사(法鏡大師) 자등탑비명(慈鐙之塔碑銘)과 서문(序文).
태상(太相) 검교(檢校) 상서(尙書) 좌복야(左僕射) 전수병부시랑(前守兵部侍郞) 지한림원사(知翰林院事) 신(臣) 최언위(崔彦撝)가 왕명을 받들어 찬하고, 사찬(沙粲) 전수흥문감경(前守興文監卿)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 받은 신(臣) 구족달(具足達)이 왕명에 의하여 쓰다.
대저 새벽달은 높이 떠올라 사방(四方)의 밖에 있는 눈까지 비추고, 봄바람은 멀리 불어 먼지를 천령(千嶺)의 끝까지 쓸어버린다. 그러므로 목성(木星)이 밝게 나타나서 일어나는 현무(玄霧)를 흩어 버리고, 청훈(靑暈)은 멀리까지 비추어 방서(芳序)의 법운(法雲)을 일으키니, 혹은 물색(物色)을 얼게 하고, 때로는 따뜻한 햇빛으로 녹여 버리기도 한다. 이러한 태평세계의 아름다움을 모아 사리불[離日]의 빛을 격발한다. 그런 까닭에 이기(二氣)가 서로 돕고 삼광(三光)이 함께 조화(助化)하니, 가히 하늘에 달린 일광(日光)은 모든 것들의 의지(依止)와 선망(羨望)이 된다. 진리(眞理)를 넓히는 것은 언어문자(言語文字)에 있으니, 언어문자로써 실상(實相)을 찾아야 한다. 그저 시험 삼아 말하자면 큰 보배 덩어리만이 보배가 아니요, 기로(岐路)에서 방황하는 사람에게는 오직 촌음(寸陰)의 시간도 귀하기 그지없다. 아무도 찾지 못하는 황제(黃帝)의 굉주(宏珠)를 눈먼 소경인 망상(罔象)이 추로(秋露)에서 찾아냈다. 그러므로 유교(儒敎)의 골풍(骨風)은 오직 삼백여수(三百餘首)의 시(詩) 속에 담겨 있고, 노교(老敎)는 오천여언(五千餘言)의 『도덕경(道德經)』에 실려 있다. 공자는 인의(仁義)의 근원을 말하였고, 노담(老聃)은 현허(玄虛)의 이치를 풀이하였다. 그러한 즉 … 감히 진리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즉 세계인 역중(域中)의 모든 종교와 방내(方內)의 모든 담론(譚論)이 어찌 정각(正覺)의 도(道)를 이루고 일심(一心)을 알고서야 가히 얻어지는 것과 같겠는가. 또한 진여(眞如)의 성(性)이 청정하여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인 삼제(三際)에 걸쳐 있으나 다르지 않는 것을 깨닫는 것과 같으리오. 그러므로 맑은 지혜로 얻어진 육종신통(六種神通)은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오롯한 삼매(三昧)는 취할 것도 행함도 없는 경지인 것이다. 대개 방편(方便)의 문을 연유하는 것이 마치 비밀스럽고 미묘[秘微]한 뜻을 알게 하는 것과 같으니, 모든 사물의 뜻을 잘 가리켜 마음속에 진리가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극(至極)의 도는 평이[希夷]하여, 말과 생각으로서는 능히 알 수 없으며, 선종[玄宗]의 이치는 멀고도 아득하여 명언(名言)으로 는 능히 터득할 수가 없다. 이런 까닭에 공(孔)·노(老)·장자(莊子)가 각기 자신의 교(敎)인 일방(一方)에만 집착하여 마침내 삼교(三敎)가 서로 돌아보지 않아 통하기 어려워졌다.
언어문자 밖에서 혜업(慧業)을 닦는 것은 마치 목마른 사슴이 아지랑이를 쫓다가 맑은 연못가에 다다르게 되며, 바다 속에 놀던 거북이가 물 위에 뜬 나무 조각을 만나는 것과 같다 하겠다. 법(法)의 본체(本體)는 본래 생(生)하는 것이 아닌데 망견(妄見)이 일어남으로 인하여 가히 취할 대상을 보게 되는 줄을 깨달으면 항상 떳떳하고 여연(如然)하다. 시원한 법우(法雨)를 만나게 되고, 문득 뜨거운 번뇌가 사라지게 되니, 기꺼이 미진(微塵)과 같은 많은 대중(大衆)을 만나서 미혹(迷惑)한 고해(苦海)로부터 구제할 수 있는 것이다.
보리(菩提)와 열반과 법성(法性)은 상주(常住)하는 영원의 법이니, 이것으로써 불토(佛土)를 장엄하고 중생(衆生)을 깨닫게 하며, 천상(天上)과 인간(人間)을 모두 제도하고 대승보살을 교화할 때에 비로소 묘용(妙用)이 자재(自在)함을 생각할 수 있으며, 가히 만행(萬行)을 두루 정진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옛날 여래(如來)께서 5비구를 위하여 3승의 교리를 말씀하심으로부터 45년 동안 중생을 교화하시다가 교화의 인연이 끝남으로써 대중을 모아놓고 내외(內外)의 호법(護法)을 당부하고 열반에 들고자 할 때, 무상(無上)의 법인(法印)을 비밀리 가섭(迦葉)에게 전하면서 널리 세간에 유포토록 하라 하시고, 이어서 호념(護念)하고 근수(勤修)하여 법인(法印)인 혜명(慧命)을 영원히 상속하여 단절함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가섭존자(迦葉尊者)가 법안(法眼)을 전해 받고는 다시 아난(阿難)에게 전해 주었다. 이로부터 조사와 조사[祖祖]가 서로 전하며 심심(心心)이 함께 보전되어 왔다. 그 중에 응진보살(應眞菩薩)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원각대사(圓覺大師)인 달마대사이다. 그는 동토(東土)인 중국으로 건너와서 선법(禪法)을 전파하려 하였으나, 그 기틀에 맞는 근기(根機)를 만나지 못하여 법을 전하지 못하다가 혜가(慧可)를 만나서야 비로소 정법안장(正法眼藏)과 신의(信衣)를 전해 주었다. 당(唐)나라 때 이르러 정통으로 승습(承襲)한 자가 여섯이니, 달마는 혜가(慧可)에게, 혜가는 승찬(僧璨)에게, 승찬은 도신(道信)에게, 도신은 홍인(弘忍)에게, 홍인은 혜능(慧能)에 게로 전승하였다. 혜능 이후에 양계(兩系)로 나누어졌으니, 하나는 남악회양(南岳懷讓)의 계파(系派)요, 다른 하나는 청원행사(靑原行思)의 계통(系統)이다.
이 양계(兩系)의 밑으로 전승의 계보가 소소(昭昭)하니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리오. 상법(像法)과 말법시대(末法時代)에 이르러서는 세상이 경박하고 거짓되어 대도(大道)는 자취를 감추고 미언(微言)은 단절되었으니, 이러한 시대에 기묘(奇妙)함을 탐색하는 상근기(上根機)와 진리에 계합한 진인(眞人)이 아니면 어찌 퇴폐한 풍속을 바로잡고 다시 법륜(法輪)을 중흥할 수 있겠는가. 반드시 진리의 세계로 한걸음 한걸음씩 나아가고 마음을 고요한 곳에 두고 정진하는 출중한 사람이 때때로 세상에 나와 그 시대에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그러한 대사(大師)가 있었으니, 법휘는 현휘(玄暉)이고, 속성은 이씨(李氏)다. 그의 선조는 주나라[周朝] 때 비덕(閟德)인 주하사(柱下史) 벼슬을 지낸 노자(老子)의 후손이었다. 영현(榮苦縣)을 도망쳐 나왔는데,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 하니, 마치 맹자(孟子)가 태어난 추향(鄒鄕)과 같았다. 하늘은 좋은 임금이 나타나 세상을 잘 다스리지 못함을 탄식한다고 하였으니, 공자(孔子)와 같은 사람이 아니면 이를 알 수가 있겠는가. 성당(聖唐)이 요동(遼東)을 원정(遠征)할 때 먼 조상이 종군(從軍)하여 여기까지 왔다가 고역(苦役)에 얽혀 되돌아가지 못하고 정착하였으니, 지금의 전주(全州) 남원(南原)이다. 아버지의 휘(諱)는 덕순(德順)이니, 특히 『노자(老子)』와 『주역(周易)』에 정통하였고, 거문고와 시(詩)를 좋아하였다. 백구(白駒)가 쓸쓸한 공곡(空谷)에 있는 것처럼 미처 재질(才質)이 알려지지 않아 조정의 부름을 받지 못하던 야인시절(野人時節)을 보냈으나, 학(鶴)이 울면 새끼는 보이지 않는 알 속에서 화명(和鳴)하여 부화할 때와 같이 명성(名聲)이 세상에 알려졌어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더욱 고상하게 살았다.
어머니 부씨(傅氏)는 잠깐 낮잠을 자며 꿈을 꾸었는데, 아내[阿㜷]가 아들을 위하여 보시(布施)하는 꿈을 꾸었으니 구마라다(鳩摩羅䭾)가 감득(感得)한 상서(祥瑞)를 증명하는 것이고, 어머니에게 아들이 되게 모자(母子)의 인연을 맺게 해달라고 간청한 것은 마치 학륵나존자(鶴勒那尊者)에게 나타내 보인 서상(瑞祥)과 같았으니, 이미 돌아간 현인(賢人)들의 상서가 모두 그러하였듯이 대사 또한 그러하리라 하였다. 13개월 동안 모태 중에 있다가 건부(乾符) 6년(헌강왕 5, 879) 1월 1일 오시(伍時)에 탄생하였다.
대사는 선천적으로 성자(聖姿)를 지니고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아이들이 하는 장난은 하지 않았다. 불상이나 어른을 보면 합장(合掌)하고, 앉을 때는 가부좌(跏趺坐)를 맺고 앉으며, 땅과 담벽 등에는 불상(佛像)과 탑형(塔形)을 그렸다. 고기에 물을 먹여 살리고 벌레들에게는 먹이를 주어 구제하기도 하였다. 속가(俗家)에 살고 있는 것이 마치 소 발자국에 고인 적은 물에 사는 고기와 같아서 답답함을 느꼈으니, 넓고 깊은 망망대해에 놀고자 하여 진세(塵世)인 속가(俗家)를 버리고 입산(入山)할 것을 결심한 다음, 부모에게 허락해 주실 것을 간청하였다. 어버이는 창자를 자르는 듯한 아픔을 참고서 말하기를 “전일(前日)의 꿈을 생각하니 참으로 부처님과의 인연이 부합하는구나. 이미 숙세(宿世)부터 깊은 인연이었다고 생각하며 전세前世의 불연(佛緣)으로 나 또한 제도 될 터이니, 갈 길을 너에게 맡기나 속히 불위(佛位)에 올라 삼계(三界)의 도사(導師)와 사생(四生)의 자부(慈父)되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대사는 영원히 속세[塵世]를 떠나 산을 찾고 고개를 넘어 동으로 길을 가다가 영각산사(靈覺山寺)에 이르게 되었다. 심광대사(深光大師)를 찾아 법문을 듣고 마음에 크게 얻은 바가 있었다. 심광대사가 말하되 “미루어 5조(祖)인 동산(東山)의 법통을 생각하고 마치 5조 와 6조를 만나서 더욱 환희하였으니, 어찌 주야(晝夜)를 분간할 수 있었겠는가”라 말하고는, “앞으로 나의 도(道)를 천양(闡揚)함이 다른 사람이 아니고 바로 너에게 있다”고 하였다.
조종(祖宗)을 살펴보니 종엄(崇嚴)의 적자(嫡子)이며, 또한 마곡(麻谷)의 법손(法孫)으로서 족히 성도(聖道)를 알았으니, 그의 전(傳)한 바는 조계 6조(曹溪六祖)를 존조(尊祖)로 하여 대대로 서로 마음이 계합하여 법경대사(法鏡大師)까지 이르렀다. 강서(江西)의 법통(法統)이 동국(東國)의 해우(海隅)1까지 전파하여 옴에 성주사(聖住寺)의 무염회상(無染會上)은 천하에 비길 바가 없었다. 이에 그의 회하(會下)에서 진리를 탐구하도록 허락받았다. 그 후 부지런히 불교를 연마하여 사문(寺門) 밖으로 외출하지 않았으며 항상 초당(草堂)에 머물렀다. 심광대사께서는 대사에게 실천을 강조하시고 분별하는 의론(議論)은 용납하지 아니하였으니 실로 후생 가외(後生可畏)라고 할만하다.
그 후로부터 대사의 덕은 날로 새로워지니 숙세부터 선근(善根)을 심고 선천적으로 영성(靈性)을 갖춘 사람이 아니면 그 누가 능히 이와 같은 경지(境地)에 이를 수 있으리오. 건녕(乾寧) 5년(효공왕 2, 898) 가야산사(伽倻山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부터는 계주(戒珠)가 다시 청정하였고 위의(威儀)가 더욱 엄전하였다. 부처[善逝]의 선(禪)을 닦되 항상 마음에 화두(話頭)를 놓지 아니하고, 문수(文殊)의 지혜에 계합(契合)하여 경계를 비추되 항상 얽매임이 없는 경지에 있었으며, 삼장(三藏)의 문구(文句)를 연설하되, 해(解)와 행이 상응(相應)하고, 사분(四分)2의 율장(律藏)을 천양하되 부지런히 신(信)과 행(行)을 함께 닦게 하였다. 그러므로 분별의 문답과 시조(詩調)의 음영(吟詠) 등을 끊고, 하는 말마다 도를 높히며, 말마다 속된 말은 뱉지 아니하니, 몸은 마치 진리를 쌓아 놓은 무더기와 같았다. 그러므로 삼장 속에 내재한 교리를 궁구하면서도 진리의 당체는 일리(一理) 중에 있으며, 반드시 인(仁)을 일으켜 태평성세를 만들어 중생을 구제하였다. 이때에 태조(太祖)가 층암절벽의 벼랑에 떨어지기 직전이었으니 비록 성스러운 운이 많았으나 전쟁의 어려운 시기를 겪게 되니 화성이 땅을 비추며 금호(金虎)인 소인배(小人輩)들이 관직을 맡아 세상을 어지럽게 하였다.
이러한 때 남쪽 무주(武州)가 안전하다는 소문을 듣고 그 곳에 가 서 피난하여 수도하면서 여생을 보내리라고 결심한 대사는 동려(同侶) 11인과 함께 망망한 먼 길을 따라 그 곳에 도착하니, 과연 많은 사람들이 모여 편안하게 살고 있었다. 얼마 지난 후 남해지방(南海地方)에 많은 사찰이 있다기에 다시 그곳으로 가서 마땅한 정처를 구하러 다니다가 홀연히 도적의 소굴을 만나게 되었다. 물건을 강탈한 후방으로 끌고 가서 차례로 죽이고 대사의 차례가 되어 칼로 목을 치려하였으나, 대사는 신색(神色)이 태연할 뿐만 아니라, 청운(靑雲)의 눈빛은 더욱 빛나서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태연자약(泰然自若)하였다. 그들의 우두머리는 대사의 풍도(風度)가 늠름하며 말소리 또한 정성스러움[切切]을 보고는 크게 감격하여 칼을 버리고 엎드려 절을 하고는 스승으로 모시겠다고 간청하였다. 승냥이와 이리 같은 잔혹한 마음을 고치고 예의(禮義)를 알게 하였으니, 마치 현장법사(玄奘法師)가 서역(西域)의 구법 도중 국경(國境)을 무단 침범한 죄로 죽게 되었을 때, 도리어 그들을 교화한 것과 남양 혜충국사(慧忠國師)가 남양(南陽)으로 가다가 도적의 소굴을 만났을 때 동행(同行)은 빨리 피하고자 하였으나, 마침내 도적이 칼을 목에 들이댔음에도 저들을 제자로 교화한 것과 같다고 하겠다. 대개 선성(先聖)들의 조난을 당한 것이 이와 같아서 만리(萬里)가 동풍(同風)이듯 이 대사의 악인교화(惡人敎化)도 피차 같은 것이라 하겠다.
그 후 대사는 “내가 여기에 머물게 되면 앞으로 나아갈 길이 막혀 버리리라”하시고, 천우(天祐) 3년(효공왕 10, 906) 해안(海岸)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우연히 당(唐)나라로 가는 배를 만나 편승(便乘)을 간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목적지인 피안(彼岸)에 도달하여 이리 저리 서상(西上)했는데 행도가 지지부진했다. 길을 동양(東陽)으로 돌려 팽택(彭澤)을 지나 드디어 구봉산(九峯山)에 이르러 경건한 마음으로 도건대사를 친견 하게 되었다. 마침 도건대사가 뜰에 서 있었으니 절을 하고 엎드려 미처 일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도건대사가 대사를 보고 “도리(闍梨)는 머리가 희구려”하거늘, 대사가 대답하되 “현휘(玄暉)는 아무리 보아도 저 자신을 알 수 없나이다”하니, 다시 “무엇을 알지 못한다는 말인가”하였다. 대답하되 “저의 머리가 희다고 하신 말씀의 뜻입니다”라고 하였다. 도건대사는 “추억을 더듬어보니 너와 이별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지금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되었구나”하였다. 나아가[昇堂] 도건대사의 오묘한 경지(境地)를 보고 입실(入室)해서 참선(參禪)하는 것을 기뻐하였더니, 겨우 10일이 되자마자 심요(心要)를 전해 받아 묵묵히 서로 계합(契合)하였다. 마치 병의 물을 다른 병에 옮겨 부은 것과 같아서, 중화(中和)를 갖추어 평이평직(平易平直)한 마음으로 승강(昇降)과 주선(周旋)하는 절조(節操)를 얻었다.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을 살펴보니 모두 불성(佛性)으로 돌아가 그 본체(本體)는 차별이 없어서 함께 일승(一乘)으로 회통(會通)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번 송문(松門)에 의탁한 지 어언 10년[十槐律]이 경과 한 지금 홀로 병(缾)과 육환장(六環杖)을 지니고 사방(四方)으로 순례(巡禮)하여 이름난 승경(勝境)은 모두 순례하고 수려(秀麗)한 명산(名山)에선 한 철씩 지내곤 하였다. 천태산(天台山)의 이적(異跡)을 앙모(仰慕)하여 곳곳마다의 풍속을 보면서 영외(嶺外)로 행각(行脚)하되, 지극한 마음으로 천태조사(天台祖師)의 탑에 참배하고는 호남(湖南)으로 발길을 돌려 이름난 선백(禪伯)들을 친견하였다. 그리고 다시 북으로 유연(幽燕)을 거쳐 서쪽으로 공촉(邛蜀)을 둘러보았으며, 혹은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국경을 넘나들기도 하였다. 많은 성(城)을 몰래 넘기도 하면서 사명(四明)에 당도 하여 홀연히 … 새를 만났는데, 동방(東方)으로부터 전하는 소식이, 지금 본국(本國)에는 전쟁의 안개가 걷히고 바다에는 점차 파도가 사라져서 외난(外難)은 모두 소멸되고 다시 중흥(中興)을 이루었다는 것이었다.
동광(同光) 2년(태조 7, 924)에 본국에 돌아오자 모든 백성이 서로 경하(慶賀)하여 환영하는 함성이 천지를 진동하였으니, 마치 교지군(交趾郡)으로 달아났던 구슬이 다시 합포(合浦)로 돌아오고, 진(秦)나라로 팔려갔던 보벽(寶璧)이 무사히 조(趙)나라로 되돌아온 것과 같이 하였다. 이는 오직 우담발화가 한 번 나타나고, 가장 아름다운 금[摩勒金]이 거듭 비추는 것과 같았다.
태조가 특사를 보내어 교외(郊外)에서 영접하게 하였으니, 융성한 총애의 영광(榮光)이 당시로는 으뜸이었다. 다음날 궁궐[九重]로 맞아들여 3등의 품계를 내리고 지극한 마음으로 찬앙하여 국사로서 우대하였다. 대사가 중생들의 마음 가운데에 덮인 안개를 흩어주는 설법(說法)을 할 때에는 자주 불자(拂子)를 흔들었고, 태조는 대사의 도풍(道風)을 흠망하여 희색이 만만(滿滿)하였다. 대사는 어로(語路)가 풍류(風流)로우며, 언천(言泉)이 경절(境絶)하여 아직까지 얻지 못하였던 것을 얻게 하였으며, 현묘(玄妙)하고 또 현묘하여 홀연히 현현(玄玄)한 법담(法譚)을 듣게 하였으니, 마음에 가득한 번뇌를 모두 제거하고 우아한 경지를 얻어서 마침내 거울 같이 밝고 맑은 마음을 품게 하였다.
대사는 이어서 말씀하시길 “모든 인연이란 그 실체가 없고 중법(衆法)은 마침내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니, 마치 영약(靈藥)과 독초(毒草)가 함께 숲 속에 공존(共存)하고, 감로(甘露)의 샘물과 수렁의 탁한 물이 땅 속에서 같이 솟아오르는 것과 같으므로 이 이치를 잘 분별하여 미혹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태조의 불심(佛心)은 더욱 돈독해지고 대사를 자주 친견하려는 마음이 깊고 간절하여 가까운 곳인 중주(中州) 정토난야(淨土蘭若)에 주지(住持)토록 청하였다. 대사는 스스로 생각하되 “방금 입당유학(入唐遊學)을 마치고 창명(滄溟)을 헤쳐 귀국하여 항상 주석(住錫)할 만한 유곡(幽谷)을 생각하던 터이라 이를 버리고 다시 어디로 가리요”하고는 문득 행장(行裝)을 정돈하였다. 한광(漢廣)을 건너고 유유히 산을 넘어 그곳에 가서 주석하니, 주변이 매우 아름답고 산천(山泉)이 수려(秀麗)하였다. 중주에 소문을 듣고 기꺼운 마음으로 찾아오는 사람 이십만[百千]이나 되었다.
대사가 자리를 정하고 선탑(禪榻)을 펴자 사방으로부터 오는 대중 이 모당(茅堂)을 가득히 채웠으며, 마치 도마죽위(稻麻竹葦)와 같이 그 수 가 한량이 없었으나, 대사는 가르침에 있어서는 조금도 권태를 느끼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어려웠지만 뒤에는 얻어가지게 되어 마치 안개처럼 모였다가 구름같이 돌아갔으며, 대사의 지도 또한 학류(學流)를 유인(誘引)한 다음 종지(宗旨)를 일러 주었으니, 진리는 깊고 미묘하나 말씀은 간결하며, 관찰력은 예리하고, 뜻이 깊어 육도(六度)의 모범 이며 인천(人天)의 으뜸이었다. 이 때 좌승(佐丞)인 유권열(劉權說)이란 신하가 있었는데, 이는 마치 은(殷)나라 고종(高宗)의 재상(宰相)인 부열(傅說)과 같았다. 나라의 충신이며 재가(在家)의 제자(弟子)였다. 이부(尼父)인 공자를 찬양하는 선비이니 마치 안연(顔淵)의 무리와 같았고, 석가모니를 신봉(信奉)하였으니 아울러 아난(阿難)과 같은 류(類)라 하겠다. 특히 선종[禪境]에 이르러 대사를 친견하고 문득 피석(避席)의 의례(儀禮)를 폈으며, 깊이 구의(摳衣)3의 정성을 다하였다.
그 후 하국(下國)의 어진 군자(君子)들이 인(仁)을 구하러 모이고, 중원(中原) 지방의 선비들이 대사의 덕(德)을 흠모하여 무리를 이루어 찾아 와서 공경히 대사를 친견하였으니, 마치 백련(白蓮)이 안계(眼界)에서 핀 것과 같았고, 공손히 법문을 듣는 이에게는 감로수가 심원(心源)에 내리는 것과 같았다. 그러므로 대사는 여러 승려들의 으뜸이라고 할 만하였다. 천군(天君)이라는 법형(法兄)이 말하되 “대사는 선림(禪林)에서 대중을 거느리고 길을 열어 주었고, 천자(天子)의 관헌(官軒)에서는 보수(寶樹)가 우뚝 솟은 것과 같았으니 요부(澆浮)한 말법시대에 법왕(法王)의 교화를 펴신 분이다”라고 이르기도 했다. 그러나 상법(上法)을 알기는 쉬우나 상법을 행하기는 어려우며, 상법을 닦기는 쉬우나 상법을 깨치는 것은 더욱 어려운 것이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만행개공(萬行皆空)이라 하였는데 어찌하여 수행(修行)을 주장하는가”라고 하니, 대답하되 “본래 고락(苦樂)이 없건만 망습(妄習)이 그 원인이 되어 고통을 받게 되므로 중생들의 망심(妄心)이 없어지면 나의 고통(苦痛)도 따라서 사라지리니, 다시 어느 곳에서 아직도 보리를 찾고자 하는가”라고 하였다.
그 후 조정(朝廷)의 사류(士流)들이 왕명을 받들고 왕래하니, 중부(中府)인 중원(中原)의 길을 밟는 사람이 수천 명에 달했으며, 사류 중에 는 만에 하나라도 왕사(王事)에 분망하여 대사가 계시는 문턱을 밟지 못 한 사람은 큰 수치로 여기기도 하였다. 만약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선 사(禪師)를 배알하고 일심으로 앙모하여 항상 가르침을 들으면, 마치 긴 밤을 지내고도 아침의 시장함을 씻은 듯하며, 법설(法說)을 위해 종을 크게 친 다음에는 바닷물과 같이 짠 맛이 동매(同味)에 들어가서 법이 무본(無本)임을 관찰하고 마음은 본래 불생(不生)임을 관조(觀照)하게 되었다. 오직 최상승만이 중도(中道)의 이치에 머무니, 마치 싸늘한 가을바람이 불어옴에 백 가지 과실이 모두 영그는 것과 같으며, 너희들이 부 처님의 법을 능히 총지(摠持)하면 나도 또한 따라 기뻐할 것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위없는 깨달음의 수행 방법이 분파(分派)되어 선종(禪宗)이 성립되었다.
대사가 대중에 이르시되 “일찍이 내가 임금과 향화(香火)의 인연을 맺었으니, 마땅히 최후에 대왕전하(大王殿下)를 찾아가서 부처께서 마지막 부촉(付囑)하신 당부를 정성껏 왕과 신하에게 부탁하리라”하시고, 노구(老軀)를 무릅쓰고 병고(病苦)를 참으면서 바람처럼 달려가되 급 한 걸음으로 나아가 여러 날 만에 상도(上都)에 당도하였다. 당부의 한 가지만 바랄 뿐 다른 청은 전혀 하지 않기로 하였다. 태조를 만나 간절히 원하는 바를 여쭙자 태조가 답하기를, “불법(佛法)이 국왕으로 말미암아 흥하게 된다는 말이 진실로 빈 말이 아님을 알았으니, 원컨대 대사께서는 편안한 마음으로 수도하시어 오래도록 생령(生靈)을 보호해 주십시오. 저는 진리의 강역에 튼튼한 담장과 요새 같은 외호(外護)가 되어 사찰(寺刹)을 금성(金城)과 탕벽(湯壁)처럼 수호(守護)하겠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대사가 답하되 “보살의 큰 서원은 대승심(大乘心)을 발(發)하며, 호법을 마음에 새기고 자비(慈悲)를 널리 베푸는 것을 의무로 하는 것이니, 바로 이와 같이 하기 위해 지금 폐하[聖朝]를 찾아뵙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묻기를 “수행(修行)의 공적[功用]은 원근(遠近)의 차이가 있습니까?”하니, 답하되 “한 방울의 물이라도 바위에 떨어지면 곧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것과 같음을 아십시오”라고 하였다. 또 묻기를 “말을 알아듣고 서로 믿으면 먼저 아는 사람과 다를 바 없으니, 어린 동몽(童蒙)이 어떻게 관물발심(觀物發心)할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대답하되 “어린아이가 먹기를 거부하고 입을 다물면 유모(乳母)인들 그를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대저 금(金)이 산중(山中)에 감추어져 있으면 그 산을 보악(寶嶽)이다 일컫고, 구슬이 물속에 숨어 있으면 그 물을 진천(珍川)이라 하니, 진리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어서 이러한 뜻을 어찌 다 말 할 수 있겠습니까”라 하였다.
이 때 대사가 선상(禪牀)에 연좌(宴坐)하고 혜울(慧菀)에 경행(經行)하면서 심법(心法)을 연설한 오묘한 말씀은 본성과 근본[信根]을 논(論)한 절절(切切)한 법담이었다. 그러한 즉 진공(眞空)은 상(象)이 없고 실제(實際)는 언어를 초월하였거늘, 어찌 혜일(慧日)의 광명(光明)이 침몰(沈沒)하고야 비로소 대사의 열반(涅槃)이 빠른 줄 알았겠는가. 자비의 구름 빛이 사라졌으니, 홀연히 대사의 열반에 대한 슬픔으로 끌어 오르도다.
천복(天福) 6년(태조 24, 941) 11월 26일 이른 아침에 문인(門人)을 모아 놓고 이르되 “가고 머무는 것은 때가 있으나, 오고 감은 주(住)함이 없도다”하시고, 조용히 입적(入寂)하니, 주변에 있는 유물들은 모두 그대로였다. “너희는 힘써 유계(遺誡)를 봉행하여 종지를 무너뜨리지 않음으로써 나의 은혜를 갚으라”하였다. 열반에 들기 전날 저녁에 제자가 묻기를 “화상(和尙)께서 세상을 떠나시려는 마당에 법등(法燈)을 누구에게 부촉하시렵니까”하니, 대사가 말씀하시길 “등등마다 스스로 동자(童子)가 있어 점화(點火)한다”하고 하였다. 다시 묻되 “저 동자 는 어떻게 펴보입니까”하니, 답하시되 “별이 청천(靑天)에 가득 포열(布列)되어 있으니, 어떻게 알 수 있을 것인가”라 하고 말씀이 끝나자마자 단정히 앉아 열반에 드시니, 속년(俗年)은 63세요, 승랍(僧臘)은 41년이었다. 이 때 구름과 해는 처참하고, 바람과 샘물은 오열하며 산천이 진동하고, 새와 짐승들은 슬피 울며, 제천(諸天)이 창언(唱言)하되 사람마다 눈이 없어졌다하고 주변 열군(列郡)들의 군민은 한(恨)을 머금고 울먹였다. 세상은 공허하여 천인(天人)들마저 슬퍼하는 상심(傷心)을 가히 알 만 하였다. 성감(聖感)과 영응(靈應)이 어찌 거짓이겠는가. 제자 활행(闊行) 등 300여인이 울면서 유해(遺骸)를 받들고 3일 만인 그 달 28일 개천산(開天山) 북봉(北峰) 남쪽 기슭에 하관(下棺)하였으니, 이는 상교(像敎)를 준수 한 것이다.
임종하시기 직전 왕에게 표(表)를 받들어 고하니, “노승(老僧)이 뜻 하였던 바를 이룩하지 못하고 영원히 성상(聖上)을 하직하려 하여 인사에 대신한다”고 하였다. 태조가 표상(表狀)을 펼쳐 보시고 크게 애도하면서 시호(謚號)를 법경대사(法鏡大師), 탑명(塔名)을 자등지탑(慈燈之塔)이 라고 추증(追贈)하였다. 임금으로서 대사를 존중(尊重)함이 작연(焯然)하면서도 멀리서나마 깊이 추모하는 예의를 갖추었음을 알겠다. 이제 다시는 서울에서 함께 할 수가 없음을 한탄하였다. 대사는 오직 영악(靈岳)이 낳은 인물이었으며, 철인(哲人)으로 세상에 나타나서 불교[釋敎]를 부양(敷揚)하고 선종을 천양하였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세상에 현생(現生)하였고, 사람들의 고통을 근심하여 도를 넓혔으니, 그의 모습 은 온화하고 말씀은 과묵(寡黙)하였다. 굶주린 배로 찾아와서는 가득히 채워 돌아갔으니, 심수(心樹)의 꽃은 선명하고, 법류(法流)의 물은 청정하며, 달이 밝으니 강(江)이 더욱 넓어 보이고, 나뭇잎이 떨어지니 산이 한 층 더 높게 보임이라. 그러므로 첨복(簷蔔)이 신비로운 향내를 풍기고 제호(醍醐)의 뛰어난 맛과 같았다. 정도(正道)에는 본래 말이 없으나, 중생을 제도하는 방편에는 언설(言說)이 있게 되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사방으로부터 시주(施主)하는 신도들의 인연이 대중에게로 돌아오게 되었다. 재물(財物)이 있는 이나 없는 사람들이 모두 대사 회상(會上)의 대중수도에 심요(心要)한 사사공양(四事供養)을 마음으로나 물질로 넉넉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도는 능가(楞伽)인 선종에서 묻고, 스승은 인도(印度)에서 찾아 심심(甚深)한 미묘법(微妙法)을 얻어 듣고자 하였으며, 팔을 끊어 바쳐 위법망구(爲法妄軀)하였듯이 전심전법(傳心傳法)에 간절하였다. 드디어 일국(一國)으로 하여금 인(仁)으로 돌아가도록 실조(實助)하였으니, 제왕(帝王)의 덕화(德化)가 하는 일마다 천문입선(千門入善)하되 치우치지 않았고, 아울러 각계각층의 백성들의 마음을 촉촉이 적셔 주었다. 하신(下臣)인 제가 홀연히 대사의 비문(碑文)을 지으라는 성상의 교지(敎旨)를 받들었으나, 신(臣)은 재주가 봉황을 삼킨 양웅(楊雄)에 미치지 못하여 학문(學問)은 형설(螢雪)의 공(功)을 쌓지 못하였건만, 억지로 무딘 언사(言詞)를 나열하여 대사의 높은 선덕(禪德)을 고양(高揚)하노니, 바라는 바는 영원히 썩지 아니하여 길이길이 보여주길 바라는 바이다.
국주(國主)가 추모하여 전액(篆額)을 써서 돌아가신 대사에 대한 애통함을 나타내었다. 문인이 귀문(龜文)에 대해 감모(感慕)하되, 절학(絶學)의 슬픔을 표하는 바이다. 다음과 같은 명(銘)을 짓는다.
위대(偉大)하심이여 크게 깨달은 우리 대사님!
우리들의 우매함을 불쌍히 여기시도다.
아지랑이를 물로 여기지 말며
화성(化城)인 방편에 머물지 말라.
눈에 보이는 물색(物色)에 착(着)하지 말 것이니
일체(一切)의 명상(名相)은 오직 가명(假名) 뿐 일세.
오직 그 진실(眞實)만을 알아야 하니
시험 삼아 혜명(慧明)을 찾아볼지어다.
크신지라, 개천산 법경대사여!
마조(馬祖)의 법을 이은 보철(寶徹)의 손자(孫子)이시다.
체體를 갖춘 것이 두루 원만함은
마치 공자의 제자 안씨(顔氏)와 같도다.
도덕(道德)은 비둘기를 살린 것보다 높고
자비는 개미의 무리를 구제함보다 뛰어났도다.
불법(佛法)의 진종(眞宗)을 깊이 깨달았고
도건(道乾)의 법통을 전해 받았네.
해동(海東)에 전파하여 소륭(紹隆)하였고
사방에서 모여드는 납자(衲子)를 제접하되
깊고도 오묘한 밀지(密旨)로써 전하다.
신통과 묘용(妙用)은 모든 기(機)를 쉬게 하고
지혜의 흐르는 물은 빠르고 상쾌하여
마음의 갈래 나아갈 줄 알아서
아직까지 듣지 못한 것 못 들었고
여지껏 얻지 못했던 법 두루 얻었도다.
법체(法體)는 본래 거래(去來)가 없는 것이나
종지(宗旨)로는 남북종(南北宗)으로 나누어졌네.
성스러운 불심(佛心)을 깨치지 못하였다면
그 누가 선덕(禪德)이라 존숭(尊崇)하리요.
계행(戒行)은 청정(淸淨)하게 항상 지켰고
말씀은 언제나 한결 같았네.
마음으론 영기(靈器)를 전해 받았고
도덕으론 항상 성조(聖朝)를 도왔도다.
교화는 모든 중생에게 널리 입혔고
위력(威力)은 사특한 요망(妖妄)을 꺾었으며
처음 산중에서 연좌(宴坐)할 그 때부터
여러 차례 임금의 초빙을 받았도다.
생각은 깊고 깊어 과묵하시고
생활은 검소하여 사치함이 없도다.
의복(衣服)은 언제나 굵은 삼베 뿐 이었고
음식은 법희선열(法喜禪悅)로 수용(受用)하였다.
열반 소식 전해지자 임금이 슬퍼했고
법문을 듣고자 목말라 하였네.
오직 학인(學人) 지도하기를 좋아하여서
도중(中途)에서 그치는 일은 전혀 없었네.
천복(天福) 8년(태조 26, 943) 계묘(癸卯) 6월 정미삭(丁未朔) 5일 신해(辛亥)에 세우다.
휴자승(鑴字僧)은 광예(光乂)·장초(壯超)·행청(幸聽)·행초(行超) 등이다.
5부율(五部律) 중의 하나로, 제1분(第一分)은 비구(比丘)의 250계(戒)와 비구니(比丘尼)의 348계에 따른 연기(緣起) 및 계상(戒相)을 설(說)한 부분, 제2분은 수계건도(受戒犍度) 및 설계건도(說戒犍度), 제3분은 안거건(安居犍) 법제도(法第度), 제4분은 방사건도(房舍犍度)에서 비니증일건도(毗尼增一犍度)까지이다. ↩
유진(有晉) 고려(高麗) 중원부(中原府) 고(故) 개천산(開天山) 정토사(淨土寺) 교시법경대사(敎謚法鏡大師) 자등비명(慈燈碑銘)과 아울러 서문(序文).
태상(太相) 검교(檢校) 상서(尙書) 좌복야(左僕射) 전수병부시랑(前守兵部侍郞) 지한림원사(知翰林院事) 신(臣) 최언위(崔彦撝)가 왕명을 받들어 찬하고,
사찬(沙粲) 전수흥문감경(前守興文監卿) 사비은어대(賜緋銀魚袋) 신(臣) 구족달(具足達)은 왕명에 의하여 쓰다.
대저 새벽달은 높이 떠올라 사방(四方)의 밖에 있는 눈까지 비추고, 봄바람은 멀리 불어 먼지를 천령(千嶺)의 끝까지 쓸어버린다. 그러므로 목성(木星)이 밝게 나타나서 일어나는 현무(玄霧)를 흩어 버리고, 청훈(靑暈)는 멀리까지 비추어 방서(芳序)의 법운(法雲)을 일으키니, 혹은 물색(物色)을 얼게 하고, 때로는 따뜻한 햇빛으로 녹여 버리기도 한다. 이러한 태평세계의 아름다움을 모아 이왈(離曰)의 빛을 격발함일세. 그런 까닭에 이기(二氣)가 서로 돕고 삼광(三光)이 함께 조화(助化)하니, 가히 하늘에 달린 일광(日光)은 모든 것들의 의지(依止)와 선망(羨望)이 된다. 진리(眞理)를 넓히는 것은 언어문자(言語文字)에 있으니, 언어문자로써 실상(實相)을 찾아야 한다. 그저 시험 삼아 말하자면 큰 보배 덩어리만이 보배가 아니요, 기로(岐路)에서 방황하는 사람에게는 오직 촌음(寸陰)의 시간도 귀하기 그지없다. 아무도 찾지 못하는 황제(黃帝)의 굉주(宏珠)를 눈먼 소경인 망상(罔象)이 추로(秋露)에서 찾아냈다. 그러므로 유교(儒敎)의 골풍(骨風)은 오직 삼백여수(三百餘首)의 시(詩) 속에 담겨 있고, 노교(老敎)는 오천여언(五千餘言)의 『도덕경(道德經)』에 실려 있다. 공자는 인의(仁義)의 근원을 말하였고, 노담(老聃)은 현허(玄虛)의 이치를 풀이하였다. 비록 忘 (결락)을 념(念)하기는 하나, 감히 진리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즉 세계인 역중(域中)의 모든 종교와 방내(方內)의 모든 담론(譚論)이 어찌 정각(正覺)의 도(道)를 이루고 일심(一心)을 알고서야 가히 얻어지는 것과 같으며, 진여(眞如)의 성(性)이 청정하여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인 삼제(三際)에 걸쳐 있으나 다르지 않는 것을 깨닫는 것과 같으리요. 맑은 지혜로 얻어진 육종신통(六種神通)은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오롯한 삼매(三昧)는 취할 것도 행함도 없는 경지인 것이다. 대개 방편(方便)의 문(門)을 연유하는 것이 마치 비미(秘微)의 뜻을 알게 하는 것과 같으니, 모든 사물(事物)의 뜻을 잘 가리켜 마음속에 진리(眞理)가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극(至極)의 도(道)는 희(希)하고, 이(夷)하여 말과 생각으로서는 능히 알 수 없으며, 현종(玄宗)의 이치는 멀고도 아득하여 명언(名言)으로는 능히 터득할 수가 없다. 이런 까닭에 공(孔)·노(老)·장자(莊子)가 각기 자신의 교(敎)인 일방(一方)에만 집착하여 마침내 삼교(三敎)가 서로 통해서 돌아오지 못한다. 언어문자(言語文字) 밖에서 혜업(慧業)을 닦는 것은 마치 목마른 사슴이 아지랑이를 쫓다가 맑은 연못가에 다다르게 되며, 바다 속에 놀던 거북이가 물 위에 뜬 나무 조각을 만나는 것과 같다 하겠다. 法의 本體는 본래 生하는 것이 아닌데 妄見이 일어남으로 인하여 가히 취할 대상을 보게 되는 줄을 깨달으면, 떳떳하고 여여하고 시원한 법우(法雨)를 만나게 되고, 문득 뜨거운 번뇌가 사라지게 되니, 기꺼이 미진(微塵)과 같은 많은 대중(大衆)을 만나서 미혹(迷惑)한 고해(苦海)로부터 구제할 수 있는 것이다.
보리(菩提)와 열반과 법성(法性)은 상주(常住)하는 영원의 법이니, 이것으로써 불토(佛土)를 장엄하고 중생을 깨닫게 하며, 천상(天上)과 인간(人間)을 모두 제도하고 대승보살을 교화할 때에 비로소 묘용(妙用)이 자재(自在)함을 생각할 수 있으며, 가히 만행(萬行)을 두루 정진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옛날 여래(如來)께서 5비구를 위하여 3승의 교리를 말씀하심으로부터 45년 동안 중생을 교화하시다가 교화의 인연이 끝남으로써 대중을 모아놓고 내외(內外)의 호법(護法)을 당부하고 열반에 들고자 할 때, 무상(無上)의 법인(法印)을 비밀리 가섭(迦葉)에게 전하면서 널리 세간에 유포토록 하라 하시고, 이어서 호념(護念)하고 근수(勤修)하여 법인(法印)인 혜명(慧命)을 영원히 상속하여 단절함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가섭존자가 법안(法眼)을 전해 받고는 다시 아난(阿難)에게 전해 주었다. 이로부터 조조(祖祖)가 서로 전하며 심심(心心)이 함께 보전되어 왔다. 그 중에 응진보살(應眞菩薩)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원각대사(圓覺大師)인 달마스님이다. 그는 동토(東土)인 중국으로 건너와서 선법(禪法)을 전파하려 하였으나, 그 기틀에 맞는 근기(根機)를 만나지 못하여 법을 전하지 못하다가 혜가(慧可)를 만나서야 비로소 정법안장(正法眼藏)과 신의(信衣)를 전해 주었다. 당(唐)나라 때 이르러 정통으로 승습(承襲)한 자가 여섯이니, 달마는 혜가(慧可)에게, 혜가는 승찬(僧璨)에게, 승찬은 도신(道信)에게, 도신은 홍인(弘忍)에게, 홍인은 혜능(慧能)에게로 전승하였다. 혜능 이후에 양계(兩系)로 나누어졌으니, 하나는 남악회양(南岳懷讓)의 계파(系派)요, 다른 하나는 청원행사(靑原行思)의 계통(系統)이다.
이 양계(兩系)의 밑으로 전승의 계보가 소소(昭昭)하니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리오. 상법(像法)과 말법시대(末法時代)에 이르러서는 세상이 경박하고 거짓되어 대도(大道)는 자취를 감추고 미언(微言)은 단절되었으니, 이러한 시대에 기묘(奇妙)함을 탐색하는 상근기(上根機)와 진리에 계합한 진인(眞人)이 아니면 어찌 퇴폐한 풍속을 바로잡고 다시 법륜(法輪)을 중흥할 수 있겠는가. 반드시 진리의 세계로 한걸음 한걸음씩 나아가고 마음을 고요한 곳에 두고 정진하는 출중한 사람이 때때로 출세하여 그 시대에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그러한 스님이 있으니, 법휘는 현휘(玄暉)이고, 속성은 이씨(李氏)다. 그의 선조는 주조(周朝) 때 비덕(閟德)인 주하사(柱下史) 벼슬을 지낸 노자(老子)의 후손이었다. 영고현(榮苦縣)을 도망쳐 나왔는데,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 하니, 마치 맹자(孟子)가 태어난 추향(鄒鄕)과 같았다. 하늘은 좋은 임금이 나타나 세상을 잘 다스리지 못함을 탄식한다고 하였으니, 공자(孔子)와 같은 사람이 아니면 이를 알 수가 있겠는가. 성당(聖唐)이 요동(遼東)을 원정(遠征)할 때 먼 조상이 종군(從軍)하여 여기까지 왔다가 고역(苦役)에 얽혀 되돌아가지 못하고 정착하였으니, 지금의 전주(全州) 남원(南原)이다. 아버지의 휘(諱)는 덕순(德順)이니, 특히 노자(老子)와 주역(周易)에 정통하였고, 거문고와 시(詩)를 좋아하였다. 백구(白駒)가 쓸쓸한 공곡(空谷)에 있는 것처럼 미처 재질(才質)이 알려지지 않아 조정의 부름을 받지 못하던 야인시절(野人時節)을 보냈으나, 학(鶴)이 울면 새끼는 보이지 않는 알 속에서 화명(和鳴)하여 부화할 때와 같이 명성(名聲)이 세상에 알려졌어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더욱 고상하게 살았다. 어머니는 부씨(傅氏)니 잠깐 낮잠을 자며 꿈을 꾸었는데, 아내(阿㜷)가 아들을 위하여 보시(布施)하는 것을 구마라다(鳩摩羅䭾)가 감득(感得)한 상서(祥瑞)를 증명하는 것이고, 어머니에게 아들이 되게 모자(母子)의 인연을 맺게 해 달라고 간청한 것은 마치 학륵나존자(鶴勒那尊者)에게 나타내 보인 서상(瑞祥)과 같았으니, 이미 돌아간 현인(賢人)들의 상서가 모두 그러하였듯이 나 또한 그러하리라 하였다. 13개월 동안 모태 중에 있다가 건부(乾符) 6년 1월 1일 오시(午時)에 탄생하였다. 스님은 선천적으로 성자(聖姿)를 지니고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아이들이 하는 장난은 하지 않았다. 불상이나 어른을 보면 합장(合掌)하고, 앉을 때는 가부좌(跏趺坐)를 맺고 앉으며, 땅과 담벽 등에는 불상(佛像)과 탑형(塔形)을 그렸다. 고기에 물을 먹여 살리고 벌레들에게는 먹이를 주어 구제하기도 하였다. 속가(俗家)에 살고 있는 것이 마치 소 발자국에 고인 적은 물에 사는 고기와 같아서 답답함을 느꼈으니, 넓고 깊은 망망대해에 놀고자 하여 진세(塵世)인 속가(俗家)를 버리고 입산(入山)할 것을 결심한 다음, 부모에게 허락해 주실 것을 간청하였다. 어버이는 창자를 자르는 듯한 아픔을 참고서 말하기를 “전일(前日)의 꿈을 생각하니 참으로 부처님과의 인연이 부합하는구나. 이미 숙세(宿世)부터 깊은 인연이었다고 생각하며 전세(前世)의 불연(佛緣)으로 나 또한 제도될 터이니, 갈 길을 너에게 맡기나 속히 불위(佛位)에 올라 삼계(三界)의 도사(導師)와 사생(四生)의 자부(慈父)되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스님은 영원히 진세(塵世)를 떠나 산을 찾고 고개를 넘어 동으로 길을 가다가 영각산사(靈覺山寺)에 이르게 되었다. 심광대사(深光大師)를 찾아 법문을 듣고 마음에 크게 얻은 바가 있었다. 심광대사가 말하되 “미루어 5조(祖)인 동산(東山)의 법통을 생각하고 마치 5조(祖)와 6조를 만나서 더욱 환희하였으니, 어찌 주야(晝夜)를 분간할 수 있었겠는가”라 말하고는, “앞으로 나의 도(道)를 천양(闡揚)함이 다른 사람이 아니고 바로 너에게 있다”고 하였다.
조종(祖宗)을 살펴보니 종엄(崇嚴)의 적자(嫡子)이며, 또한 마곡(麻谷)의 법손(法孫)으로서 족히 성도(聖道)를 알았으니, 그의 전(傳)한 바는 조계6조(曹溪六祖)를 존조(尊祖)로 하여 대대로 서로 마음이 계합하여 법경대사(法鏡大師)까지 이르렀다. 강서(江西)의 법통(法統)이 동국(東國)의 해우(海隅)까지 전파하여 옴에 성주사(聖住寺)의 무염회상(無染會上)은 천하에 비길 바가 없었다. 이에 그의 회하(會下)에서 진리를 탐구하도록 허락받았다. 그 후 부지런히 불교를 연마하여 사문(寺門) 밖으로 외출하지 않았으며 항상 초당(草堂)에 머물렀다. 심광대사(深光大師)께서는 나에게 실천을 강조하시고 분별하는 의론(議論)은 용납하지 아니하였으니 실로 후생가외(後生可畏)라고 이를만 함이로다.
그 후로부터 스님의 덕은 날로 새로워지니 숙세(宿世)부터 선근(善根)을 심고 선천적으로 영성(靈性)을 갖춘 사람이 아니면 그 누가 능히 이와 같은 경지(境地)에 이를 수 있으리오. 건녕(乾寧) 5년 가야산사(伽倻山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부터는 계주(戒珠)가 다시 청정하였고 위의(威儀)가 더욱 엄전하였다. 선서(善逝)의 선(禪)을 닦되 항상 마음에 화두(話頭)를 놓지 아니하고, 문수(文殊)의 지혜에 계합(契合)하여 경계를 비추되 항상 함이 없는 경지에 있었으며, 삼장(三藏)의 문구(文句)를 연설하되, 해(解)와 행(行)이 상응(相應)하고, 사분(四分)의 율장(律藏)을 천양하되 부지런히 신(信)과 행(行)을 함께 닦게 하였다. 그러므로 분별의 문답과 시조(詩調)의 음영(吟詠) 등을 끊고, 하는 말마다 도를 높히며, 말마다 속된 말은 뱉지 아니하니, 몸은 마치 진리를 쌓아 놓은 무더기와 같았다. 삼장(三藏) 속에 내재한 교리를 궁구하면서도 진리의 당체는 일리(一理) 중에 있으며, 반드시 인(仁)을 일으켜 태평성세를 만들어 중생을 구제하고, 태조(太祖)가 층암절벽의 벼랑에 떨어지기 직전이었으나 다시 성성장구의 운(運)을 탔으며, 다시 일양시생(一陽始生)하는 백육양구(百六陽九)의 위난(危難)을 겪게 되어 화진(火辰)이 땅을 비추며 금호(金虎)인 소인배(小人輩)들이 관직을 맡아 세상을 어지럽게 하였다.
이러한 때 남쪽 무주(武州)가 안전하다는 소문을 듣고 그 곳에 가서 피난하여 수도하면서 여생을 보내리라고 결심한 대사(大師)는 동려(同侶) 11인과 함께 망망한 먼 길을 따라 그 곳에 도착하니, 과연 많은 사람들이 모여 편안하게 살고 있었다. 얼마 지난 후 남해지방(南海地方)에 많은 사찰이 있다기에 다시 그곳으로 가서 마땅한 정처를 구하러 다니다가 홀연히 도적의 소굴을 만나게 되었다. 물건을 강탈한 후 방으로 끌고 가서 차례로 죽이고 스님의 차례가 되어 칼로 목을 치려하였으나, 스님은 신색(神色)이 태연할 뿐만 아니라, 청운(靑雲)의 눈빛은 더욱 빛나서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태연자약(泰然自若)하였다. 그들의 우두머리는 스님의 풍도(風度)가 늠름하며 말소리 또한 절절(切切)함을 보고는 크게 감격하여 칼을 버리고 함께 절을 하고는 스승으로 모시겠다고 간청하였다. 승냥이와 이리같은 잔혹한 마음을 고치고 예의(禮義)을 알게 하였으니, 마치 현장법사(玄奘法師)가 서역(西域)의 구법 도중 국경(國境)을 무단 침범한 죄로 죽게 되었을 때, 도리어 그들을 교화한 것과 남양 혜충국사(慧忠國師)가 남양(南陽)으로 가다가 도적의 소굴을 만났을 때 동행(同行)은 빨리 피하고자 하였으나, 마침내 도적이 칼을 목에 들이댔음에도 저들을 제자로 교화한 것과 같다고 하겠다. 대개 선성(先聖)들의 조난을 당한 것이 이와 같아서 만리(萬里)가 동풍(同風)이듯이 대사(大師)의 악인교화(惡人敎化)도 피차(彼此) 같은 것이라 하겠다.
그 후 스님은 “내가 여기에 머물게 되면 앞으로 나아갈 길이 막혀 버리리라”하시고, 천우(天祐) 3년 해안(海岸)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우연히 당(唐)나라로 가는 배를 만나 편승(便乘)을 간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목적지인 피안(彼岸)에 도달하여 이리 저리 서상(西上)하다가, 길을 동양(東陽)으로 돌려 팽택(彭澤)을 지나 드디어 구봉산(九峯山)에 이르러 경건한 마음으로 도건대사[道乾(도건:道虔)大師]를 친견하게 되었다. 마침 대사(大師)가 뜰에 서 있었으니 절을 하고 엎드려 미처 일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대사(大師)가 스님을 보고 “도리(闍梨)는 머리가 희구려”하거늘, 스님이 대답하되 “현휘(玄暉)는 아무리 보아도 저 자신을 알 수 없나이다”하니, 다시 “무엇을 알지 못한다는 말인가”하였다. 대답하되 “저의 머리가 희다고 하신 말씀의 뜻입니다”라고 하였다. 대사는 “추억을 더듬어보니 너와 이별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지금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되었구나”하였다. 기꺼운 바는 승당(昇堂)하여 대사(大師)의 오묘한 경지(境地)를 보고 입실(入室)해서 참선(參禪)토록 하였는데, 겨우 10일이 되자마자 심요(心要)를 전해 받아 묵묵히 서로 계합(契合)하였다. 마치 병의 물을 다른 병에 옮겨 부은 것과 같아서, 중화(中和)를 갖추어 평역평직(平易平直)한 마음으로 승강(昇降)을 지켰다. 주선(周旋)하는 절조(節操)가 있었으나, 의리(義理)를 다하지 못하였으며, 사람 노릇을 함에 있어서는 반쪽 밖에 되지 못하였다.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을 살펴보니 모두 불성(佛性)으로 돌아가 그 본체(本體)는 차별이 없어서 함께 일승(一乘)으로 회통(會通)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번 송문(松門)에 의탁한 지 어언 십개괴율(十個槐律)이 경과한 지금 홀로 병(缾)과 육환장(六環杖)을 지니고 사방(四方)으로 순례(巡禮)하여 이름난 승경(勝境)은 모두 순례하고 수려(秀麗)한 명산(名山)에선 한 철씩 지내곤 하였다. 천태산(天台山)의 이적(異跡)을 앙모하여 곳곳마다의 풍속을 보면서 영외(嶺外)로 행각(行脚)하되, 지극한 마음으로 천태조사(天台祖師)의 탑에 참배하고는 호남(湖南)으로 발길을 돌려 이름난 선백(禪伯)들을 친견하였다. 그리고 다시 북으로 유연(幽燕)을 거쳐 서쪽으로 공촉(邛蜀)을 둘러보았으며, 혹은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국경을 넘나들기도 하였다. 많은 성(城)을 몰래 넘기도 하면서 사명(四明)에 당도하여 홀연히 (결락) 새[鳥]를 만났는데, 동방(東方)으로부터 전하는 소식이, 지금 본국(本國)에는 전쟁의 안개가 걷히고 바다에는 점차 파도가 사라져서 외난(外難)은 모두 소멸되고 다시 중흥(中興)을 이루었다는 것이었다. 동광(同光) 2년(924)에 본국에 돌아오자 모든 국민이 서로 경하(慶賀)하여 환영하는 함성이 천지를 진동하였으니, 마치 교지군(交趾郡)으로 달아났던 구슬이 다시 합포(合浦)로 돌아오고, 진(秦)나라로 팔려갔던 보벽(寶璧)이 무사히 조(趙)나라로 되돌아온 것과 같이 하였다. 이는 오직 우담발화가 한 번 나타나고, 마륵금(摩勒金)이 중중(重重)히 비추는 것과 같았다.
태조(太祖) 임금이 특사를 보내어 교외(郊外)에서 영접하게 하였으니, 융성한 총애의 영광(榮光)이 당시로는 으뜸이었다. 다음날 구중(九重)으로 맞아들여 3등의 품계를 내리고 지극한 마음으로 찬앙하여 국사(國師)로서 우대하였다. 중생들의 마음 가운데에 덮인 안개를 흩어주는 설법(說法)을 할 때에는 자주 불자(拂子)를 흔들었고, 임금은 스님의 도풍(道風)을 흠망하여 희색이 만만(滿滿)하였다. 스님은 어로(語路)가 풍류(風流)로우며, 언천(言泉)이 경절(境絶)하여 아직까지 얻지 못하였던 것을 얻게 하였으며, 현묘(玄妙)하고 또 현묘(玄妙)하여 홀연히 현현(玄玄)한 법담(法譚)을 듣게 하였으니, 마음에 가득한 번뇌를 모두 제거하고 우아한 경지를 얻어서 마침내 거울 같이 밝고 맑은 마음을 품게 하였다. 스님은 이어서 말씀하시길 “모든 인연이란 그 실체가 없고 중법(衆法)은 마침내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니, 마치 영약(靈藥)과 독초(毒草)가 함께 숲 속에 공존(共存)하고, 감로(甘露)의 샘물과 수렁의 탁한 물이 땅 속에서 같이 솟아오르는 것과 같으므로 이 이치를 잘 분별하여 미혹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임금의 불심(佛心)은 더욱 돈독해지고 스님을 자주 친견하려는 마음이 깊고 간절하여 가까운 곳인 중주(中州) 정토난야(淨土蘭若)에 주지(住持)토록 청하였다. 스님은 스스로 생각하되 “방금 입당유학(入唐遊學)을 마치고 창명(滄溟)을 헤쳐 귀국하여 항상 주석(住錫)할 만한 유곡(幽谷)을 생각하던 터이라 이를 버리고 다시 어디로 가리요”하고는 문득 행장(行裝)을 정돈하였다. 한광(漢廣)을 건너고 유유히 산을 넘어 그곳에 가서 주석하니, 주변이 매우 아름답고 산천(山泉)이 수려(秀麗)하였다. 중주(中州)에 소문을 듣고 기꺼운 마음으로 찾아오는 사람이 백천(百千)이나 되었다. 스님이 자리를 정하고 선탑(禪榻)을 펴자마자 사방으로부터 오는 대중이 모당(茅堂)을 가득히 채웠으며, 마치 도마죽위(稻麻竹葦)와 같이 그 수가 한량이 없었으나, 스님은 가르침에 있어서는 조금도 권태를 느끼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어려웠지만 뒤에는 얻어가지게 되어 마치 안개처럼 모였다가 구름같이 돌아갔으며, 스님의 지도 또한 학류(學流)를 유인(誘引)한 다음 종지(宗旨)를 일러 주었으니, 진리는 깊고 미묘(微妙)하나 말씀은 간결하며, 관찰력은 예리하고, 뜻이 깊어 육도(六度)의 모범이며 인천(人天)의 으뜸이었다. 이 때 좌승(佐丞)인 유인설(劉權說)이란 신하가 있었는데, 이는 마치 은(殷)나라 고종(高宗)의 재상(宰相)인 부설(傅說)과 같았다. 나라의 충신이며 재가(在家)의 제자(弟子)였다. 니부(尼父)인 공자(孔子)를 찬양하는 선비이니 마치 안연(顔淵)의 무리와 같았고, 석가모니 부처님을 신봉(信奉)하였으니 아울러 아난(阿難)과 같은 류(類)라하겠다. 특히 선경(禪境)에 이르러 스님을 친견하고 문득 피석(避席)의 의례(儀禮)를 폈으며, 깊이 구의(摳衣)의 정성을 오롯하게 하였다.
그 후 하국(下國)의 어진 군자(君子)들이 인(仁)을 구하러 모이고, 중원(中原) 지방의 선비들이 스님의 덕(德)을 흠모하여 무리를 이루어 찾아와서 공경히 스님을 친견하였으니, 마치 백련(白蓮)이 안계(眼界)에서 핀 것과 같았고, 공손히 법문을 듣는 이에게는 감로수가 심원(心源)에 내리는 것과 같았다. 그러므로 스님은 스님 중의 스님이라고 할 만하였다. 천군(天君)이라는 법형(法兄)이 말하되 “스님은 선림(禪林)에서 대중을 거느리고 길을 열어 주었고, 천자(天子)의 관헌(官軒)에서는 보수(寶樹)가 우뚝 솟은 것과 같았으니 요부(澆浮)한 말법시대(末法時代)에 법왕(法王)의 교화를 펴신 분이다”라고 이르기도 했다. 그러나 상법(上法)을 알기는 쉬우나 상법(上法)을 행하기는 어려우며, 상법(上法)을 닦기는 쉬우나 상법(上法)을 깨치는 것은 더욱 어려운 것이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만행개공(萬行皆空)이라 하였는데 어찌하여 수행(修行)을 주장하는가”라고 하니, 대답하되 “본래 고락(苦樂)이 없건만 망습(妄習)이 그 원인이 되어 고통을 받게 되므로 중생들의 망심(妄心)이 없어지면 나의 고통(苦痛)도 따라서 사라지리니, 다시 어느 곳에서 아직도 보리(菩提)를 찾고자 하는가”라고 하였다. 그 후 조정(朝廷)의 사류(士流)들이 왕명을 받들고 왕래하되, 중부(中府)인 중원(中原)의 길을 밟는 사람이 수천 명에 달했으며, 사류(士流) 중에는 만에 하나라도 왕사(王事)에 분망하여 스님이 계시는 문턱을 밟지 못한 것을 큰 수치로 여기기도 하였다. 만약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선사(禪師)를 배알하고 일심(一心)으로 앙모(仰慕)하여 항상 가르침을 들으면, 마치 긴 밤을 지내고도 아침의 시장함을 씻은 듯이 잊은 듯하며, 법설(法說)을 위해 운집종을 크게 친 다음에는 바닷물과 같이 짠 맛이 동매(同味)에 들어가서 법이 무본(無本)임을 관찰하고 마음은 본래 불생(不生)임을 관조(觀照)하게 되었다. 오직 최상승만이 중도(中道)의 이치에 머무니, 마치 싸늘한 가을바람이 불어옴에 백 가지 과실이 모두 영그는 것과 같으며, 너희들이 부처님의 법을 능히 총지(摠持)하면 나도 또한 따라 기꺼워하리니, 이것으로 말미암아 위없는 깨달음의 수행 방법이 분파(分派)되어 선종(禪宗)이 성립되었다.
대사(大師)가 대중에 이르시되 “일찍이 내가 임금과 향화(香火)의 인연을 맺었으니, 마땅히 최후에 대왕전하(大王殿下)를 찾아가서 부처님께서 마지막 부촉(付囑)하신 당부를 정성껏 왕신(王臣)에게 부탁하리라”하시고, 노구(老軀)를 무릅쓰고 병고(病苦)를 참으면서 바람처럼 달려가되 급한 걸음으로 나아가 여러 날만에 상도(上都)에 당도하였다. 당부의 한 가지만 바랄 뿐 다른 청은 전혀 하지 않기로 하였다. 임금을 만나 간절히 원하는 바를 여쭙자 임금이 답하되, “불법(佛法)이 국왕으로 말미암아 흥왕(興旺)된다는 말이 진실로 빈 말이 아님을 알았으니, 원컨대 스님께서는 편안한 마음으로 수도하시어 오래도록 생령(生靈)을 보호해 주십시오”하였다. 그 반면(反面)에 제자(弟子)는 “진리의 강역에 튼튼한 담장과 요새 같은 외호(外護)가 되리니, 사찰(寺刹)을 금성(金城)과 탕벽(湯壁)처럼 수호(守護)하겠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스님이 답하되 “보살임금의 큰 서원은 대승심(大乘心)을 발(發)하며, 호법(護法)을 마음에 새기고 자비(慈悲)를 널리 베푸는 것을 의무로 하리니, 바로 이와 같이 하기 위해 지금 성조(聖朝)를 찾아뵙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묻기를 “수행(修行)의 묘용(功用)이 원근(遠近)의 차이가 있습니까”하니, 답하되 “한 방울의 물이라도 바위에 떨어지면 곧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것과 같음을 아십시오”라고 하였다. 또 묻기를 “말을 알아듣고 서로 믿으면 먼저 아는 사람과 다를 바 없으니, 어린 동몽(童蒙)이 어떻게 관물발심(觀物發心)할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대답하되 “어린아이가 먹기를 거부하고 입을 다물면 유모(乳母)인들 그를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대저 금(金)이 산중(山中)에 감추어져 있으면 그 산을 보악(寶嶽)이다 일컫고, 구슬이 물 속에 숨어 있으면 그 물을 진천(珍川)이라 하니, 진리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어서 이러한 뜻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라 하였다.
이 때 스님이 선상(禪牀)에 연좌(宴坐)하고 혜울(慧菀)에 경행(經行)하면서 심법(心法)을 연설한 오묘한 말씀은 신근(信根)을 논(論)한 절절(切切)한 법담(法譚)이었다. 그러한즉 진공(眞空)은 상(象)이 없고 실제(實際)는 언어를 초월하였거늘, 어찌 혜일(慧日)의 광명(光明)이 침몰(沈沒)하고야 비로소 스님의 열반(涅槃)이 빠른 줄 알았겠는가. 자비의 구름 빛이 사라졌으니, 홀연히 스님의 열반에 대한 슬픔으로 끌어 오르도다.
천복(天福) 6년 11월 26일 이른 아침에 문인(門人)을 모아 놓고 이르되 “가고 머무는 것은 때가 있으나, 오고 감은 주(住)함이 없도다”하시고, 조용히 입적(入寂)하니, 주변에 있는 유물들은 모두 그대로였다. “너희는 힘써 유계(遺誡)를 봉행하여 종지(宗旨)를 무너뜨리지 않으므로써 나의 은혜를 갚으라”하였다. 열반(涅槃)에 들기 전날 저녁에 제자가 묻기를 “화상(和尙)께서 세상을 떠나시려는 마당에 법등(法燈)을 누구에게 부촉(付囑)하시렵니까”하니, 스님이 말씀하시길 “등등마다 스스로 동자(童子)가 있어 점화(點火)한다”하고 하였다. 다시 묻되 “저 동자(童子)는 어떻게 펴 보입니까”하니, 답하시되 “별이 청천(靑天)에 가득 포열(布列)되어 있으니, 어떻게 알 수 있을 것인가”라 하고 말씀이 끝나자마자 단정히 앉아 열반에 드시니, 속년(俗年)은 63세요, 승랍(僧臘)은 41이었다. 이 때 구름과 해는 처참하고, 바람과 샘물은 오열하며 산천이 진동하고, 새와 짐승들은 슬피 울며, 제천(諸天)이 창언(唱言)하되 사람마다 눈이 없어졌다하고 주변 열군(列郡)들의 군민은 한(恨)을 머금고 울먹였다. 세상은 공허하여 천인(天人)들마저 슬퍼하는 상심(傷心)을 가히 알 만하였다. 성감(聖感)과 영응(靈應)이 어찌 거짓이겠는가. 제자(弟子) 활행(闊行) 등 300여인이 울면서 유해(遺骸)를 받들고 3일 만인 그 달 28일 개천산(開天山) 북봉(北峰) 남쪽 기슭에 하관(下棺)하였으니, 이는 상교(像敎)를 준수한 것이다.
임종하시기 직전 왕에게 표(表)를 받들어 고하니, “노승(老僧)이 뜻하였던 바를 이룩하지 못하고 영원히 성상(聖上)을 하직하려 하여 인사에 대신한다”고 하였다. 임금이 표상(表狀)을 펼쳐 보시고 크게 애도하면서 시호(謚號)를 법경대사(法鏡大師), 탑명(塔名)을 자등지탑(慈燈之塔)이라고 추증(追贈)하였다. 임금으로서 스님을 존중(尊重)함이 작연(焯然)하면서도 멀리서나마 깊이 추모하는 예의(禮儀)를 갖추었음을 알겠다. 이제 다시는 서울에서 함께 할 수가 없음을 한탄하였다. 스님은 오직 영악(靈岳)이 낳은 인물이었으며, 철인(哲人)으로 세상에 나타나서 석교(釋敎)를 부양(敷揚)하고 선종(禪宗)을 천양하였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세상에 현생(現生)하였고, 사람들의 고통을 근심하여 홍도(弘道)하였으니, 그의 모습은 온화하고 말씀은 과묵(寡黙)하였다. 굶주린 배로 찾아와서는 가득히 채워 돌아갔으니, 심수(心樹)의 꽃은 선명하고, 법류(法流)의 물은 청정하며, 달이 밝으니 강(江)이 더욱 넓어 보이고, 나뭇잎이 떨어지니 산이 한 층 더 높게 보임이라. 그러므로 첨복(簷蔔)이 신비로운 향내를 풍기고 제호(醍醐)의 승미(勝味)지닌 것과 같았다. 정도(正道)에는 본래 말이 없으나, 중생을 제도하는 방편(方便)에는 언설(言說)이 있게 되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사방(四方)으로부터 시주(施主)하는 신도들의 인연이 대중(大衆)에게로 돌아오게 되었다. 재물(財物)이 있는 이나 없는 사람들이 모두 스님 회상(會上)의 대중수도에 심요(心要)한 사사공양(四事供養)을 마음으로나 물질로 넉넉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도(道)는 능가(楞伽)인 선종에서 묻고, 스승은 멀리 인도(印度)에서 찾아 심심(甚深)한 미묘법(微妙法)을 얻어 듣고자 하였으며, 팔을 끊어 바쳐 위법망구(爲法妄軀)하였듯이 전심전법(傳心傳法)에 간절하였다. 드디어 일국(一國)으로 하여금 인(仁)으로 돌아가도록 실조(實助)하였으니, 제왕(帝王)의 덕화(德化)가 하는 일마다 천문입선(千門入善)하되 치우치지 않았고, 아울러 각계각층의 백성들의 마음을 촉촉이 적셔 주었다. 하신(下臣)인 제가 홀연히 스님의 비문(碑文)을 지으라는 성상(聖上)의 교지(敎旨)를 받들었으나, 신(臣)은 재주가 봉황을 삼킨 양웅(楊雄)에 미치지 못하여 학문(學問)은 형설(螢雪)의 공(功)을 쌓지 못하였건만, 억지로 무딘 언사(言詞)를 나열하여 스님의 높은 선덕(禪德)을 고양(高揚)하노니, 바라는 바는 영원히 썩지 아니하여 미래제(未來際)가 다하도록 길이길이 보여주길 바라는 바이다. 국주(國主)가 추모하여 전액(篆額)을 써서 돌아가신 스님에 대한 애통함을 나타내었다. 문인(門人)이 귀문(龜文)에 대해 감모(感慕)하되, 절학(絶學)의 슬픔을 표하는 바이다. 명(銘)하여 가로되
위대(偉大)하심이여 크게 깨달은 우리 스님!
우리들의 우매함을 불쌍히 여기시도다.
아지랑이를 물로 여기지 말며
화성(化城)인 방편(方便)에 머물지 말라.
눈에 보이는 물색(物色)에 착(着)하지 말 것이니
일체(一切)의 명상(名相)은 오직 가명(假名) 뿐 일세.
오직 그 진실(眞實)만을 알아야 하니
시험 삼아 혜명(慧明)을 찾아볼지어다.
크신지라, 개천산(開天山) 법경대사(法鏡大師)여!
마조(馬祖)의 법을 이은 보철(寶徹)의 손자(孫子)이시다.
체(體)를 갖춘 것이 두루 원만함은
마치 공자(孔子)의 제자 안씨(顔氏)와 같도다.
도덕(道德)은 비둘기를 살린 것보다 높고
자비는 개미의 무리를 구제함보다 뛰어났도다.
불법(佛法)의 진종(眞宗)을 깊이 깨달았고
도건(道乾)의 법통을 전해 받았네.
해동(海東)에 전파하여 소륭(紹隆)하였고
사방(四方)에서 모여드는 납자(衲子)를 제접하되
깊고도 오묘한 밀지(密旨)로써 전하다.
신통과 묘용(妙用)은 모든 기(機)를 쉬게 하고
지혜의 흐르는 물은 빠르고 상쾌하여
마음의 갈래 나아갈 줄 알아서
아직까지 듣지 못한 것 못 들었고
여지껏 얻지 못했던 법 두루 얻었도다.
법체(法體)는 본래 거래(去來)가 없는 것이나
종지(宗旨)로는 남북종(南北宗)으로 나누어졌네.
성스러운 불심(佛心)을 깨치지 못하였다면
그 누가 선덕(禪德)이라 존숭(尊崇)하리요.
계행(戒行)은 청정(淸淨)하게 항상 지켰고
말씀은 언제나 한결 같았네.
마음으론 영기(靈器)를 전해 받았고
도덕(道德)으론 항상 성조(聖朝)를 도왔도다.
교화(敎化)는 모든 중생(衆生)에게 널리 입혔고
위력(威力)은 사특한 요망(妖妄)을 꺾었으며
처음 산중에서 연좌(宴坐)할 그 때부터
여러 차례 임금의 초빙을 받았도다.
생각은 깊고 깊어 과묵(寡黙)하시고
생활은 검소하여 사치함이 없도다.
의복(衣服)은 언제나 굵은 삼베 뿐 이었고
음식은 법희선열(法喜禪悅)로 수용(受用)하였다.
열반 소식 전해지자 임금이 슬퍼했고
법문을 듣고자 목말라 하였네.
오직 학인(學人) 지도하기를 좋아하여서
도중(中途)에서 그치는 일은 전혀 없었네.
천복(天福) 8년 세차계묘(歲次癸卯) 6월 정미삭(丁未朔) 5일 신해(辛亥)에 세우다.
휴자승(鑴字僧)은 광예(光乂), 장초(壯超), 행총(幸聰), 행초(行超) 등이다.
[출전 :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1(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