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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 보리사지 대경대사탑비(楊平 菩提寺址 大鏡大師塔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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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연수리 보리사 터에 있던 대경대사 여엄(大鏡大師 麗嚴, 862~930)의 비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에 옮겨져 있다.
비문은 여말선초에 활동한 대표적 문인인 최언위(崔彦撝)가 지었고 이환추(李桓樞)가 썼으며 최문윤(崔文尹)이 새겨서 대사가 돌아간 지 9년 후인 939년(고려 태조 22년)에 세웠다. 음기(陰記)는 다시 3년 후인 942년(태조 25년)에 새겼다. 비문은 31행에 1행 58자의 구성으로 해서로 쓰여 있다. 비의 왼쪽 윗부분이 깨지고 중간에 파인 부분이 더러 있으나 대체로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
비문의 내용은 도입부에 이어 대사의 가계와 탄생에 관련된 이야기 그리고 출가하여 성주사 낭혜(朗慧)화상과 낭혜의 제자 심광(深光)에게 수학하고 중국에 유학하여 운거도응(雲居道膺)의 법을 이어 귀국하고 909년에 귀국 후에 교화한 활동을 서술하였으며 입적과 비를 세우는 과정에 이은 명(銘)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대경대사비(故大鏡大師碑)
고려국(高麗國) 미지산(彌智山) 보리사(菩提寺) 고(故) … 교시(敎謚) 대경대사(大鏡大師) 현기탑비명(玄機之塔碑銘)과 서문(序文).
태상(太相) 검교(檢校) 상서(尙書) 좌복야(左僕射) 겸(兼) 어사대부(御史大夫) 상주국(上柱國) 신(臣) 최언위(崔彦撝)가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문인(門人) 정조(正朝) 상주국(上柱國) 단금어대(丹金魚袋)를 하사받은 신(臣) 이환추(李桓樞)가 왕명에 받들어 비문과 전액을 쓰다.
부처의 종지는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부처의 말씀[伽譚]이 날로 널리 퍼지고 도(道)가 열렸으니 곧 8만 바라밀과 중광삼매(重光三昧)로써 불토를 장엄하고 중생을 제도하였다. 최후 열반하실 때 부촉(付囑)함에 있어서 오직 정법안장(正法眼藏)을 가섭[飮光]에게 전수하였고, 가섭이 이를 받아 소중히 주선(周旋)하여 교외별전(敎外別傳)으로 세세(世世)에 전하여 국다(鞠多)1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능히 수호하고 이 종지를 더욱 천명하여 눈을 마주침에 도가 존재하고 입이나 혀를 수고로이 하지 않았으며 많이 들어도 알 수 없으며 널리 지혜에 통달했다고 하여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후 달마(達摩)대사가 중국으로 건너와서 부법(付法)할 제자를 구하니 혜가(惠可)대사가 입설단비(立雪斷臂)하는 굳은 신심(信心)을 보여 마침내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정법안장을 전해 받았음으로써, 그 후 불교의 법수(法水)가 동쪽으로 흐르고 자운(慈雲)이 온 천하를 덮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조계(曹溪)의 문하에서 뛰어난 제자가 나오니 남악회양(南岳懷讓)이요, 청원행사(靑原行思)이었다. 행사(行思)의 제자는 석두희천(石頭希遷)이고, 희천(希遷)의 제자는 마곡보철(麻谷寶徹)이며, 보철(寶徹)의 제자는 운암담성(雲岩曇晟), 담성(曇晟)의 제자는 동산양개(洞山良价), 양개(良价)의 제자는 운거도응(雲居道膺), 도응(道膺)의 제자가 바로 대경대사(大鏡大師) 여엄(麗嚴)이었다. 이와 같이 대대로 상승(相承)하였으니, 그들의 근본정신을 살펴 보건대 사람이 능히 도를 넓힌다고 한 것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대사의 법휘는 여엄(麗嚴)이요, 속성은 김씨(金氏)이며, 그의 선조는 계림사람이었다. 먼 조상은 화주(華冑) 출신으로 왕성에서 번연(蕃衍)한 귀족이었으며, 후에 관직의 임지를 따라 서쪽으로 가서 살다가 남포(藍浦)[충청남도 보령의 남쪽]로 이사하였다. 아버지의 이름은 사의(思義)인데 조상의 덕(德)을 추모하였고, 오류(五柳)[도연명을 지칭함] 선생과 같이 명예를 피하고 은거하였다. 어머니는 박씨(朴氏)로, 어느 날 낮잠을 자다가 이상한 꿈을 꾸고 깜짝 놀라 깨어 보니 영광(靈光)이 방 안에 가득하였고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대사를 임신하였다.
스님은 태어나자마자 능히 말을 하였을 뿐 아니라, 어려서부터 장난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홉 살이 되었을 때 이미 출가하여 수도하려는 뜻이 간절하였으니 부모도 그의 뜻을 막지 못하여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무량수사(無量壽寺)로 가서 주종법사(住宗法師)에게 의탁하였다. 처음에는 화엄을 읽으며 여러 해를 지냈다. 참으로 귀중한 바는 반년 만에 화엄경의 백천게송(百千偈頌)을 외웠는데, 하루에 외운 양이 다른 사람이 30일 동안 걸려야 외울 수 있는 것이었다.
광명(廣明) 원년(헌강왕 6, 880)에 비로소 구족계를 받은 하안거(夏安居)를 지냄에 계율 지키기를 풀에 묶인 비구[草繫比丘]와 같이 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교종이 최상승의 진실이 아님을 깨닫고, 드디어 마음을 현경(玄鏡)에 기울이고 눈을 선종[寶林]에 두었다. 이때부터 서쪽을 향하여 숭엄산을 바라보고 고승[善知識]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곧바로 행장을 정돈하여 달려가서 친견하니, 광종대사가 스님으로부터 뜻하는 바를 자세히 듣고 허락하여 입실(入室)시켰다.
거기서 수년을 지낸 후, 광계(光啓) 3년(진성여왕 1, 887)에 광종대사가 입적하였다. 그 후 천리를 멀다하지 않고 이리저리 남쪽으로 가다가 영각산(靈覺山)2에 이르러 심광화상(深光和尙)을 친견하였는데, 그는 대사의 사형 뻘이다. 오랫동안 불법의 진수를 익혀 사람 가운데 뛰어난 인중사자(人中師子)3로, 숭엄[광종대사]의 제자가 되어 모든 학자들이 우러러보았다. 부르지 아니하여도 스스로 찾아오는 도리성혜(桃李成蹊)를 이루었으니, 그의 문하는 마치 저자거리와 같이 많았다. 아침저녁으로 사람들이 빈 채로 와서 가득히 채워 돌아갔다.
대사는 여러 해 동안 심광화상을 복응(服膺)하면서 참선 수행을 계속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그루터기를 지켜 토끼를 잡는다는 생각을 버리고[守株待兎],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하는 마음을 버렸다[緣木求魚]. 행장을 꾸려 산을 내려와서 서해를 거슬러 올라가다가 우연히 입당하는 사람[乘査之客]을 만나 편승하게 되었다. 노도와 같은 파도를 헤치면서 이주(夷洲)의 풍랑을 지나 우혈(禹穴)의 연하(煙霞)를 구경하였다. 당나라에 도착한 스님은 강표(江表)를 거쳐 흥부(洪府)를 지나 계속 서쪽으로 상행하여 마침내 운거선사(雲居禪師)를 친견하였다. 대경대사를 본 운거는 “그대와 이별한지 그다지 멀지 아니한데, 여기에서 서로 만나게 되었구려! 내가 수도[運斤]하고 있을 때에 자네가 찾아오니 기쁘다”라고 말하였다. 대사는 의(義)를 물음에 쉬지 않았고, 인(仁)을 행함에 자기로부터 말미암았다. 그로부터 수년을 지나면서 추위와 고통에도 더욱 굳게 하여 여연(驪淵)에 이르러 구슬을 찾는 인연을 알았고, 이로 인하여 높은 경지[鳥徑]에 올라 성취를 이루었다.
대사께서는 “내 비록 국경이 없는 관공(觀空)을 보았으나 어찌 본국을 잊을 수 있으리오”하고, 귀여지영(歸歟之詠)을 생각하며 모의지수(暮矣之愁)를 머금고 참선하던 곳[禪尻]4를 떠나고자 먼저 운거에게 고하였더니, 대사가 이르길 “네가 활동할[飛鳴] 곳은 고국이니 얽매이지 말라[因循]. 내가 바라는 바는 진공(眞空)을 부연 진작하여 우리의 선종을 빛나게 하며 법요(法要)를 잘 보존하는 책임이 너희들에게 있음을 명심하라. 이는 용이 바다에서 뛰어오르고, 학이 해 뜨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으니라. 그 가고 옴의 때를 놓치지 말라”하였다.
이로써 부처의 마음을 전해 받고 운거의 심인(心印)을 가지고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로 돌아오니, 이때가 천우(天祐) 6년(효공왕 13, 909) 7월이었다. 무주(武州) 승평(昇平)에 도달하였다. 이후 배를 버리고 동해안으로 북상하여 충주 월악산(月岳山)에 이르렀는데, 세상이 시끄러워 편안히 연좌(宴坐)할 곳이 없었다. 세상을 살펴보니 모두가 도탄에 빠져 있고, 인간을 돌아보니 너 나 할 것 없이 슬픔에 잠겨 있었다. 비록 자연[水石]에 의지하였으나 차츰 전란[煙塵]이 가까워지므로 다시 내령(奈靈)으로 나와서 좋은 경치에 이르러 미봉을 바라보면서 은거하다가 다시 소백산(小白山)으로 가서 지내게 되었다. 여기에 기주(基州)의 제군(諸軍) 지휘권을 맡은 상국(上國)인 강훤(康萱)이 있었는데, 불심이 돈독하여 교종[寶樹]의 교풍을 흠모하여 선종[禪林]에 깊이 심취하였다.
돌이켜 보건대 스님이 위태로운 곳을 떠나 편안한 악교(樂郊)로 찾아왔다 하여 정성스럽게 맞이하여 편안히 모시고, 공양을 올리면서 법문(法文)을 들었다. 그리하여 스님의 선덕(禪德)에 귀의하였고 깊은 현풍(玄風)에 감득(感得)하였다. 학이 그늘에서 우니 여러 새들이 서로 응하고, 흰 구름이 해를 감싸니 아름다운 기운이 상서로움을 나타냄을 알겠다.
태조가 동쪽을 바라볼 때 자주 영서(靈瑞)가 여러 날 동안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자세하게 태조에게 아뢰었더니, 태조는 스님의 도가 중화에 으뜸으로 그 이름이 양국에 높았음을 감탄하여 봉필(鳳筆)을 보내어 대궐[龍墀]로 초대하였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후 은거지를 나와 왕궁[玉輦]에 도착해 태조 앞에 나타나니 왕이 반갑게 맞이하였다. 깊이 찬앙(鑽仰)하는 마음은 다른 때보다 더욱 간절하였으며, 양무제[蕭武]가 불교를 신봉한 것과 함께 비교하여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중간에 잠시 산으로 돌아가서 남은 터에 사찰을 중수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 특명으로 사신을 보내서 다시 입조해 달라고 청하므로 차마 왕의 부름[芝泥]을 거절하기 어려워서 다시 궁궐[蘭殿]에 올라갔다.
어느 날 설법할 때 용안을 대하여 이르되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해지려면 골정의 경계[骨庭之境]도 사양하지 않는 것입니다. 요임금의 인(仁)과 순임금의 덕이란 것도 오직 화하(華夏)의 우임금만이 짝할 뿐이었습니다”하니, 왕이 대답하되 “삼황오제때[三五之時]의 태평성세를 허박(虛薄)한 과인과 어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옛 산이 개경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고 보리사를 수리하고 거기에 계시도록 요청하였다. 이 때 깊이 성은에 감읍하고 그 곳에 가서 주석키로 하였다. 그 절은 산천이 매우 아름다운 승경(勝境)이어서 종언지지(終焉之地)로 삼을 뜻을 가졌다. 그러므로 부르지 않는데도 선을 따르는 무리가 모여들고, 그들을 지도함에 있어서도 굳이 선행을 권유하지 않아도 스님의 모습만 보고 깊이 감화를 받았다. 어떤 사람이 대사께 묻기를 “대사가 청류를 다 마신 후의 경지는 어떠합니까?” 하니, 대사가 답하기를 “청류를 다 마신 후의 일은 어떠한가”라고 하였다. 상대방이 “어찌 청류와 같겠습니까”라 하니 대사가 이에 허락하였다.
동광(同光) 7년(태조 12, 929) 11월 28일에 병이 들어 다음 해 2월 17일에 법당에 앉아 입적하시니, 춘추는 69세요, 승랍은 50년이었다. 햇빛은 처참했고 바람은 쓸쓸하였으며 구름은 탄식하는 듯 시냇물은 오열하였고, 하늘과 사람은 애도하였고 승려와 속인 모두 창자를 도려내는 듯 통탄하였을 뿐만 아니라, 감마(紺馬)는 하늘로 날아오르고 청오(靑烏)는 터를 점쳐주니 입적에 따른 상서로움이 예전에는 드물었던 일이었다.
태조는 대사의 열반[泥洹] 소식을 들으시고 가만히 슬픔에 잠겼다. 특히 조서(弔書)와 부의(賻儀)를 보내어 국사에 대한 예의를 다하였다. 문인인 스님들이 그 달 19일에 함께 영감(靈龕)을 메고 … 의 서쪽 모퉁이 3백여 보 지점에 입감(入龕)하였다. 학업을 전해 받은 제자 융천(融闡)과 흔정(昕政) 등 500에 가까운 사람들이 공손히 대사의 남긴 덕을 펴고자 비석을 세울 것을 윤허해 달라는 표(表)를 올렸다. 그리하여 태조는 시호를 대경대사라 하고, 탑명을 현기지탑(玄機之塔)이라 추증하였다.
슬프다! 대사는 박옥(璞玉)에서 상서로움을 나타냈고, 혼금(渾金)으로부터 경사로움을 연출하였다. 뜻은 저속함이 없고 말은 거짓으로 꾸미지 않았으며, 죽을 때까지 포납(布衲)이라는 명성이 있었으며, 후세에는 온포(縕袍)의 영예를 지녔다. 사방으로 다니면서 교화를 베풀었고 중국에 가서는 그 나라의 불법과 문물을 배우고 돌아왔다. 그러므로 초(楚)나라에서는 강평(江萍)을 물으면 곧 동요(童謠)를 인용하여 답하고, 제(齊)나라에서 해조(海棗)를 물으면 바야흐로 『국어(國語)』를 가지고 답한 것과 같이 하였다.
당시 사람들의 귀의를 받으니 모두 이와 같은 것들이다. 이때에 다른 산의 돌로는 고상한 비문을 새길 수 없었으므로 문도들이 비 돌을 구하기 위해 눈물을 흘리면서 상심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한탄스러운 바는 대사가 열반하신 지 이미 십년[十春]에 가깝다. 신(臣) 최언위가 수년 전 어전의 주상[堯堦]를 배알하고 인하여 동사(董社)에 머물렀는데 쑥이 회오리를 만나 바람에 날아다님이 급하고 계수나무가 늙어 서리에 떨어지듯 하였으니 어찌 봉요(捧瑤) 할 기회가 있으리요. 비문을 돌에 새겨 사찰[蓮宇]에 세우려 하였다. 외람되게 비문을 짓는 책임을 맡았지만 손을 상할 근심을 끼칠까하여 두려움이 앞서니 실로 이엉을 엮는 것과 같이하여 해이(解頤)의 비방을 감수하려 하노라. 비록 대강[梗槩]의 자료를 갖추어 실로 대사의 높고 깊은 도덕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고 비문을 짓되, 대강의 개요만 추려서 억지로 붓[柔翰]을 잡았으니,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
명(銘)하여 가로되
부처[釋尊]는 교단을 창립하시고
가섭(迦葉)은 마음을 전해 받았네!
5조인 동산(東山)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이
원미5인 해동의 계림으로 왔네!
신라에 전한지 몇 년이었던가.
해동의 바닷가 오심(鼇潯)까지
동산(洞山)의 법자(法子)인 운거(雲居)의 제자(弟子)로
신라의 곳곳에 법음(法音)을 떨쳤네!
천복 4년(태조 22, 939) 세차 기해 4월 15일에 세우고, 제자 경내인(京內人) 최문윤(崔文尹)은 왕명을 받들어 새기다.
우파국다(優波鞠多)의 약칭이다. 서건(西乾) 28조(祖) 중에 제4조(祖)에 해당한다. 대호(大護) 또는 근호(近護)라 번역된다. 불멸 후 200년경에 출생했고, 아육왕(阿育王)의 문사(門師)였다. ↩
충청북도 영동 남쪽에 있다고 한다. 「해주 광조사 진철대사비문」 중에 “途出沙火 得到遵岑 永同郡南 靈 覺山北 尋謀駐足”이라 하였다. ↩
태상(太相) 검교(檢校) 상서(尙書) 좌복야(左僕射) 겸 어사(兼御史) 대부 상주국(大夫 上柱國) 臣 최언위
가 王命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문인(門人) 정조(正朝) 상주국 단금어대(上柱國 丹金魚袋)를 하사받은 臣 이환추가 왕명에 의하여 비문과 전액을 쓰다.
석씨(釋氏)의 종취(宗趣)는 그 연대가 매우 오래되었다. 가담(伽譚)이 날로 널리 퍼짐으로써 聖道가 처음으로 열렸다. 그런즉 8만 바라밀과 중중무진(重重無盡)한 삼매로써 불토를 장엄하며 45년 동안에 많은 중생을 제도하시고 최후 열반하실 때 付囑함에 있어서 오직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음광(飮光)에게 전수하였으니, 가섭이 이를 받아 소중히 주선(周旋)하여 교외별전(敎外別傳)으로 世世에 전하게 되었다. 4祖인 優波 鞠多 에 이르러 경률론 三藏을 兼傳하던 禪脈만을 單傳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더욱이 이 선종만을 천양(闡揚)하게 되었으니 목격도존(目擊道存)의 格外道理는 口舌로 터득하지 못하니 가히 多聞으로도 알지 못하며, 또한 박식으로서도 알 수 없다.
그 후 달마대사가 중국으로 건너와서 付法할 제자를 구하였다. 이 때 神光인 惠可大師가 입설단비(立雪斷臂)하는 굳은 信心을 보여 마침내 以心傳心의 정법안장을 전해 받았음으로써, 그 후 불교의 法水가 동쪽으로 흐르고 慈雲이 온 천하를 덮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曹溪의 直下에 쌍벽의 두 제자가 있었으니 하나는 남악회양(南岳懷讓)이고, 다른 하나는 청원행사(靑原行思) 이다. 行思의 제자는 석두희천(石頭希遷)이고, 希遷의 제자는 마곡보철(麻谷寶徹) 이며, 寶徹의 제자는 운암담성(雲岩曇晟), 曇晟의 제자는 동산양개(洞山良价), 良价의 제자는 운거도응(雲居道膺), 道膺의 제자가 바로 대경대사 여엄(大鏡大師 麗嚴) 이다. 이와 같이 대대로 相承하였으니, 그들의 근본정신을 살펴 보건대 사람이 능히 도를 넓힌다고 한 것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대사의 법휘는 여엄(麗嚴)이요, 속성은 金氏이니, 그의 선조는 계림사람이었다. 먼 조상은 화주 출신으로 왕성에서 번연(蕃衍)한 귀족이었다. 그 후 관직의 임지를 따라 서쪽으로 가서 살다가 남포로 이사하였다. 아버지의 이름은 思義인데 조상의 덕을 추모하였고, 五柳 선생과 같이 명예를 피하고 은거하였다. 어머니는 朴氏로, 어느 날 낮잠을 자다가 이상한 꿈을 꾸고 깜짝 놀라 깨어 보니 靈光이 방 안에 가득하였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대사를 임신하였는데 스님은 태어나자마자 능히 말을 하였을 뿐 아니라, 어려서부터 장난을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아홉 살이 되었을 때 이미 출가하여 수도하려는 뜻이 간절하였으니 부모도 그의 뜻을 막지 못하여 문득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無量壽寺로 가서 住宗法師에게서 처음으로 화엄경을 배웠고, 그로부터 여러 괴류(槐柳)를 지났으니, 참으로 귀중한 바는 반년만에 화엄경의 百千偈頌을 외웠는데, 하루에 외운 량이 다른 사람이 30일 동안 걸려야 외울 수 있는 것이었다. 광명 원년에 비로소 戒를 받고, 그 후 夏安居를 하면서 초계비구(草繫比丘)와 같이 굳게 戒를 지켰다. 그러나 마침내 교종이 최상승의 진실이 아님을 깨닫고, 드디어 마음을 현경으로 기울이고 눈을 보림사로 돌렸다. 이 때부터 서쪽을 향하여 숭엄산를 바라보다가 멀리 보령 성주사에 선지식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곧바로 행장을 정돈하여 달려가서 친견하니, 광종대사가 스님으로부터 뜻하는 바를 자세히 듣고 허락하여 入室시켰다.
거기서 수 년을 지낸 후, 광계 3년에 광종대사가 입적하였다. 그 후 不遠千里하고 리이(邐迤)하게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영각산에 이르러 심광화상을 친견하였으니, 이는 大鏡의 사형 뻘인데 오랫동안 마니(摩尼)를 온적하여 人中의 師子라고 존숭되었다. 그리하여 숭엄의 제자가 되었으니 모든 학자들이 우러러보았다. 부르지 아니하여도 스스로 찾아오는 도리성혜(桃李成蹊)를 이루었으니, 그의 문하가 마치 저자거리와 같이 많았다. 아침에 셋, 저녁에 넷씩 찾아오되, 빈손으로 왔다가 가득히 채워서 돌아갔다. 대사는 여러 해 동안 심광화상을 복응(服膺)하면서 참선 수행을 계속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수주대토(守株待兎) 하는 뜻을 던져버리고, 연목구어(緣木求魚) 하려는 마음도 씻어 버리고는 행장을 꾸려 짊어지고 서해를 거슬러 올라가다가 우연히 입당하는 乘査의 客을 만나 편승하게 되었다. 노도와 같은 파도를 헤치면서 夷洲의 풍랑을 지나 우혈(禹穴)의 연하(煙霞)를 구경하였다. 당나라에 도착한 스님은 강표를 거쳐 洪府를 지나 계속 서쪽으로 상행하여 마침내 운거선사를 친견하였다. 대경대사를 본 雲居는 “그대와 이별한지 그다지 멀지 아니한데, 여기에서 서로 만나게 되었구려! 내가 운근(運斤)하고 있을 때에 자네가 찾아온 것을 기뻐한다”라고 말하였으며, 오사(吾師)가 법을 물어오니 “내 그대를 위하여 대답을 아끼지 않으리라”하였다. 그로부터 수 년을 지나면서 갖은 고통을 참은 것을 내 이미 驪囦에 이르러 탐주(探珠)할 계기를 만났다 생각하고, 이로 인하여 조경(鳥徑)을 밟아 採玉할 부작을 만나게 되었다. 스님께서는 ‘내 비록 국경이 없는 관공(觀空)의 경지에 있는 종교인이긴 하나, 어찌 본국을 잊을 수 있으리오’하고, 귀여지영(歸歟之詠)을 생각하며 모의지수(暮矣之愁)를 머금고 선고(禪尻)를 떠나고자 먼저 운거에게 고하였더니, 대사가 이르길 “네가 나면서 울 곳은 바로 고국이니 인순(因循)하여 지체하지 말고 빨리 떠나라”고 하였다. “따라서 내가 바라는 바는 眞空을 부연 진작하여 우리의 선종을 빛나게 하며 法要를 잘 보존하는 책임이 바로 너희들에게 있음을 명심하라. 그렇게 할 수 있어야 비로소 용이 천지에서 뛰고, 학이 일역(日域)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으리라”하며, “이와 같이 왕래함에 있어 그 적당한 시기를 놓치지 말라”하였다.
이로써 대각의 마음을 전해 받고 운거의 心印을 전승하여 거듭 경수(鯨水)를 넘어 다시 제잠(鯷岑)으로 돌아오니, 이 때가 바로 천우 6년 7월이었다. 무주 승평에 도달하였다. 이후 배를 버리고 동해안으로 북상하여 충주 월악산에 이르렀는데, 세상이 시끄러워 편안히 宴坐할 곳이 없었다. 세상을 살펴보니 모두가 도탄에 빠져 있고, 인간을 돌아보니 너 나 할 것 없이 슬픔에 잠겨 있었다. 비록 水石에 의지하나 어느덧 연진(煙塵)에 가까워지므로 다시 나령(奈靈 : 경북 영주)으로 갔는데, 경치가 매우 아름다웠다. 미봉을 바라보면서 은거하다가 다시 소백산으로 가서 지내게 되었다. 여기에 기주 의 諸軍 지휘권을 맡은 上國인 강훤(康萱)이 불심이 돈독하여 보수(寶樹)에 교풍을 흠모하여 선림(禪林)에 깊이 심취하였다.
돌이켜 보건대 스님이 위태로운 곳을 떠나 편안한 악교(樂郊)로 찾아왔다 하여 정성스럽게 맞이하여 편안히 모시고, 공양을 올리면서 법문을 들었다. 그리하여 스님의 선덕(禪德)에 귀의하여 깊이 현풍 에 감득하였으니, 마치 명학재음(鳴鶴在陰) 즉 학이 새끼를 부화할 때 어미 학이 유음(幽陰)한 곳에서 울면 새끼가 알로부터 화답하면서 나와 서로 만남과 같았다. 비유컨대 白雲이 해를 붙들고, 아름다운 氣가 있어 상서로움을 나타내는 것과 같았으며, 동쪽으로 바라볼 때 자주 영서(靈瑞)가 여러 날 동안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자세하게 임금께 아뢰었더니 왕이 스님의 도덕이 중화에 으뜸으로 그 이름이 양국에 높았음을 감탄하여 봉필을 보내어 용지(龍墀)로 초빙하였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후 산골 바위의 빗장을 나와 옥연(玉輦)에 도착하니 왕이 반갑게 맞이하였다. 깊이 찬앙(鑽仰)하는 마음이 다른 때보다 더욱 간절하였으니, 숙무제가 불교를 신봉한 것과 동등하게 비교하여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중간에 잠깐 本山으로 돌아가서 遺址에 다시 사찰을 중수하고 있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특명으로 사신을 보내서 다시 입조해 달라고 청하므로 차마 지니(芝泥) 를 거역하기 어려워서 다시 난전(蘭殿)으로 오르게 되었다. 어느 날 설법할 때 용안을 대하여 이르되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해지려면 긍정(肯庭)의 경우도 사양하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하면서 “요임금의 仁과 순임금의 德이란 것도 오직 華夏의 禹임금만이 짝할 뿐이었습니다”하니, 왕이 대답하되 “三皇과 五帝 때의 태평성세를 허박(虛薄)한 과인과 어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또 故山을 생각하여 돌아가려 하므로 왕은 개경과 너무 멀다하여 지평 보리사를 수리하고 거기에 계시도록 요청하였다. 이 때 깊이 성은에 감읍하고 그 곳에 가서 주석키로 하였다. 그 절은 산천이 매우 아름다운 승경(勝境)이어서 종언지지(終焉之地)를 삼을 뜻을 가졌다. 그러므로 선행을 쫓는 무리가 부르지 아니하여도 스스로 모여들며, 그들을 지도함에 있어서도 굳이 선행을 권유하지 않아도 스님의 모습만 보고도 깊이 감화를 받았다. 어떤 사람이 스님께 묻되 “청류를 짐작하여 다할 때 어떠합니까”하니, 스님이 대답하되 “청류를 酌盡한 후사는 어떠한가”라고 하였다. 또 대답하되 “어찌 청류와 같겠습니까”라 하거늘 스님께서 이를 인정하였다. 동광 7년(929) 11월 28일에 약간의 병세를 보이다가 그 다음 해 2월 17일에 법당에 앉아 입적하시니, 춘추는 69세요, 승랍은 50이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햇빛은 처참하고 바람은 쓸쓸하였으며 구름은 탄식하는 듯 시냇물은 오열하였고, 天人은 애도하며 道俗은 모두 창자를 도려내는 듯 통탄하였을 뿐만 아니라, 감마(紺馬)가 하늘로 날아오르고 청오(靑烏) 또한 터를 점복하였으니 입적에 따른 상서가 前古로 듣기에 드물었다. 임금께서 스님의 니원(泥洹) 소식을 들으시고 가만히 슬픔에 잠겼다. 특히 조서(弔書)와 부의(賻儀)를 보내어 국사에 대한 예의를 다하였다. 문인인 스님들이 그 달 19일에 함께 영감(靈龕)을 메고 ▨▨▨의 서쪽 모퉁이 3백여 보 지점에 입감(入龕)하였다.
학업을 전해 받은 제자 융천(融闡)과 흔정(昕政) 등 500에 가까운 사람들이 공손히 스님의 遺德을 펴고자 비석을 세울 것을 윤허해 달라는 表를 올렸다. 그리하여 왕은 시호를 대경대사라 하고, 탑명을 현기지탑(玄機之塔)이라 추증하였다. 슬프다! 대사는 박옥(璞玉)에서 상서를 나타냈고, 혼금(渾金) 으로부터 경사로움을 연출하였다. 뜻은 저속함이 없고 말은 꾸미지 않았으며, 죽을 때까지 포납 이라는 이름을 가졌고, 후세에는 온포의 영예를 지녔다. 諸方으로 다니면서 교화를 베풀었고 중국에 가서는 그 나라의 불법과 문물을 배우고 돌아왔다. 그러므로 楚나라에서는 강평 의 뿌리없이 물 위에 떠 있는 것에 비견하여 동요의 발생 원인을 묻는데 대답하였고, 齊나라에서는 해조 를 묻고서야 바야흐로 국어에 대한 대답을 얻게 되었다. 때때로 귀의한 것이 모두 이와 같은 것들이다. 이 때에 他山의 돌로는 고상한 비문을 새길 수 없으므로 문도들이 비 돌을 구하기 위해 눈물을 흘리면서 상심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한탄스러운 바는 스님이 열반하신 지 이미 十春에 가깝다. 下臣 彦撝가 수년 전 요계를 배알하였더니, 上께서 사직을 수리하는 일을 감독하고 계셨다. 봉표에는 바람이 급하고 계로에는 서리가 잠겼으니 어찌 봉요 할 기회가 있으리요. 비문을 돌에 새겨 연우에 세우려 하였다. 외람되게 비문을 짓는 책임을 맡았지만 손을 상할 근심을 끼칠까하여 두려움이 앞서니 실로 이엉을 엮는 것과 같이 하여 해이(解頤)의 비방을 감수하려 하노라. 비록 경개(梗槩)의 자료를 갖추어 실로 스님의 높고 깊은 도덕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고 비문을 짓되, 대강의 개요만 추려서 억지로 유한(柔翰)을 잡았으니,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 銘하여 가로되
釋尊은 교단을 창립하시고
迦葉은 마음을 전해 받았네!
5祖인 東山의 正法眼藏이
원미(遠&A2181;)인 해동의 계림으로 왔네!
신라에 전한지 몇 년이었던가.
해동의 바닷가 오심(鼇潯) 까지
洞山의 法子인 雲居의 弟子로
신라의 곳곳에 法音을 떨쳤네!
천복 4년(939 ) 세차 기해 4월 15일에 세우고,
제자 경내인(京內人) 최문윤(崔文尹)은 왕명을 받들어 새기다.
대사를 의지했던 도속제자(道俗弟子)와 삼강(三剛)과 아울러 각자(刻者) 등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도제자(道弟子):
원지주인(院持主人) 흔정(昕政)
제일좌승(第一坐僧) 연육(連育)
정법대통(正法大統) 윤연대덕(尹然大德)
윤행대덕(潤行大德)
도고당사승(都考當事僧)
관적(寬寂)
행륜(幸倫)
문하제자(門下弟子)
각자(刻者) 총혜(聰惠)
장초(莊超)
정잠(定岑)
철장영(鐵匠令) 총민聰敏
지객승(持客僧) 인혜(仁慧)
계침(契琛)
삼강전(三剛典):
원주승(院主僧) 의전(義全)
유나승(唯那僧) 장초(莊超)
전좌승(典坐僧) 혜초(專昭)
직장승(直藏僧) 전초(專超)
재가불자(在家弟子):
좌승(佐丞) 공훤(公萱)
원보(元甫) 정순(貞順)
원윤(元尹) 이인(里仁)
정조(正祖) 여일(与一)
정조(正祖) 인봉(仁封)
정위(正衛) 예언(藝言)
촌주(村主) 선예(宣乂)
집사(執事) 의겸(義謙)
행자(行者) 두휴(頭休)
철장(鐵匠) 중원부인(仲源府人 : 충북 충주) 향연(香淵)
속제자(俗弟子):환규(奐規)
천복(天福) 7년(942) 세차 임인 5월 28일 새김.
[출전 :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1】(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