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국(高麗國) 수주부(水州府 : 水原) 화산(花山) 갈양사(葛陽寺)
1변지무애 원명묘각 흥복우세(辯智無碍圓明妙覺興福佑世) 혜거국사(惠居國師) 시홍제존자(諡洪濟尊者) 보광지탑비명(寶光之塔碑銘)과 서(序)
내사문하평장사(內史門下平章事) 감수국사(監修國史) 태자소사(太子少師) 신(臣) 최량(崔亮)
2왕명을 받들어 짓고, 승봉랑(承奉郎) 상서도관낭중(尙書都官郎中) 신(臣) 김후민(金厚民) 왕명을 받들어 쓰고, 함께 전액도 썼다.
대개 듣건대 구담(瞿曇 : 석가. 석가족의 성인데 흔히 석가를 부르는 말로 쓰임)이 가르침을 열 때 오승(五乘 : 해탈의 경계에 이르게 하는 불법의 가르침을 나누는 분류 가운데 하나인 다섯 가지 분류. 人, 天, 聲聞, 緣覺, 菩薩)을 나열하여 평등하게 중생을 인도하였고, 달마(達磨 : 중국 선종의 초대 조사)는 마음을 가리킬 때 신발 한 짝을 남겨
3 깊은 이치를 드러냈다고 한다. 말하는 자는 설하지 않음으로써 설하고 수행하는 자는 수행하지 않음으로써 수행하여, 화살과 쑥이 서로 기둥이 되고 등불과 심지가 서로 함께 전해지니 어찌 그리 기이하고 위대한가. 성인이 멀어지고 말씀이 사라짐에 이르면 법이 따라서 해이해지니, 배우는 자는 공(空)과 유(有)에 집착하여 깊은 뜻을 모르고 근본을 버리고 지류(支流)를 붙잡는다. 이에 띠풀은 깨닫고 닦는 길을 막고 망풀은 이치를 가르치는 지경을 거칠게 하여 부처와 조사의 정
4법안장(正法眼藏 : 정법 또는 佛法. 일체의 것을 비추어 보는 지혜의 눈[佛智]은 물론 일체의 교법을 포함하는 경전)이 거의 그치게 되었다. 여기에 한 사람이 있어 홀로 거짓된 망습(妄習)을 물리치고 바르고 참된 오묘한 종지를 넓혔으며, 처음에는 수단에 의지하여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가 마침내 문자를 버리고 진리를 깨달았으니, 자신에게서 얻어 아울러 천하를 제도한 자는 오직 우리 대사뿐이다.
대사의 휘는 지▨이며 혜거(惠居)는 헌호(軒號 : 거처하는 집을 따라 부르는 다른 이름)이다. 속성은 명주박씨(溟州 朴氏)로서 천녕군(川寧郡 : 경기도 여주)의 황려현(黃驪縣 : 경기도 여주) 사람이다. 부친의 이름은 윤영(允榮)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추증되었다. 모친 김씨가 (큰 별이) 떨어져 품 안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하여 당 광화(光化) 2년(효공왕 3, 후백제 견훤 8, 899) 기미년 4월 4일에 대사를 낳았다. 신령스러운 골격이 크고 시원스러워 자못 다른 사람보다 비범하였으며 (배우는데) 빼어난 지혜를 일찍부터 나타내서 사람들이 감히 앞서지 못하였다. 항상 절이나 탑을 가지고 놀고 예불하고 경전을 들었으니 숙세(宿世 : 과거)의 인연을 시험할 수 있었다.
건화(乾化) 갑술년(신덕왕 3, 견훤 23, 914) 봄에 우두산(牛頭山) 개선사(開禪寺)에 가서 오심(悟心) 장로를 예방하고 불법에 귀의할 것을 청하여, 장로가 가상히 여기고 사랑하여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게 하니 이때 나이가 16세였다. 3년이 지나 금산사(金山寺) 의정(義靜) 율사의 계단(戒壇)에 나아가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이에 계율의 구슬이 밝고 법의 그릇이 깊고 맑아 가만히 있는 것을 싫어하고 옷깃을 떨쳐 멀리 가서 널리 선지식(善知識)을 찾아 깊은 이치를 더욱 탐구하였다. 용덕(龍德 : 後梁 末帝의 연호) 2년(경명왕 6, 견훤 31, 922) 여름에 특별히 미륵사(彌勒寺)의 탑을 여는 은혜를 입어 선운사(禪雲寺)
5의 선불장(選佛場)에 나아가 법단에 올라 법을 설하니 천상의 꽃이 이리저리 날렸다. 이로 말미암아 도의 영예가 더욱 드러나 책을 짊어지고 오는 자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때 신라 경애대왕(景哀大王)이 분황사(芬皇寺)
6에 주석하기를 청하며 자주색 비단과 굴순(屈眴 : 으뜸 가는 베, 第一布 大細布. 육조대사도 탑 아래 굴순 승복을 묻었다고 했다)과 전단향(栴檀香 : 인도에서 나는 아주 좋은 향)과 보기(寶器) 등의 물건을 하사하였다.
천성(天成 : 後唐 明宗의 연호) 4년(경순왕 3, 견훤 38, 929)에 경순대왕(敬順大王)이 대사에게 명하여 영묘사(靈廟寺)
7 법석(法席)으로 옮기도록 하고 계단(戒壇)을 만들고 불탑(佛塔)을 장식하여 7일 동안 법회를 개설하였다.
천복(天福) 4년(태조 22, 939) 봄에 우리 태조대왕이 대사의 도덕을 흠모하여 세 번 불렀으나 응하지 않고 새 기르기를 바라며 거북을 끄는 것으로 사양하였다. 개운(開運 : 후진 出帝의 연호) 4년(정종 2, 947) 가을에 우리 정종대왕(定宗大王)이 특별히 문서를 보내 대사를 왕사로 책봉하고 궁궐의 시종에게 명하여 맞이하게 하였다. 대사가 나와 서울로 가니 대사의 나아감과 물러남이 어찌 우연히 그리 된 것이겠는가. 같은 해 12월에 대궐에 나가 은혜에 감사하니 왕이 대사를 징영각(澄瀛閣)에 나와 맞이하며 말하였다. “예전에 우리 돌아가신 태조께서는 오래도록 구름과 무지개를 기다림이 간절하셨으나 끝내 물고기가 물을 만나는 기쁨을 잃으셨습니다. 과인은 부덕한 몸으로 대사의 얼굴을 뵙고 친히 부처의 가르침을 들으니 고금의 서로 만남이 반드시 인연이 있는 것 같습니다.” 왕사가 말하였다. “신은 학문은 거칠고 아는 것이 적어 전에 명을 내리셨을 때는 숨어 있는데 뜻이 있었는데 오늘 영광스럽게 부르시니 분수를 헤아리기가 실로 외람스럽습니다”
왕이 말하였다. “도가 사람에게 있음은 옥이 산에 감추어져 있는 것과 같으니 비록 빛을 감추려 한다 한들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이듬해(정종 3, 948) 2월에 홍화사(弘化寺)
8에서 전경법회(轉經法會 : 경전을 군데군데 읽어 가는 법회)를 개설하여 왕사가 주석하게 하고 변지무애(辯智無碍)의 호를 내렸다. 우리 광종대왕(光宗大王) 13년(962) 임술년에 광명사(廣明寺)
9로 옮겨 주석하게 하고 인왕반야회(仁王般若會 : 인왕반야경을 강설하며 나라와 백성의 평안을 기원하는 법회)를 7일 동안 개설하며 원명묘각(圓明妙覺)의 호와 아울러 자주색 마납가사(磨衲袈裟)와 보기(寶器)와 향과 차 등을 내렸다.
광종 19년(968) 무진년 정월에 경운전(慶雲殿)에 올라 백고좌법회(百高座法會 : 백 명의 고승을 초청하여 경전을 강의하고 공양을 올리는 법회)를 개설하여 국사에게 원각경(圓覺經)을 강설해 줄 것을 청하였다. 같은 해 6월에 심한 가뭄이 들어 국사에게 명하여 숭경전(崇景殿)에서 비를 빌도록 하였다. 국사가 향로를 잡고 대운륜경(大雲輪經 : 大雲輪請雨經 또는 대운경이라고도 하는 가뭄에 비를 청하는 내용의 경전)을 외우자 조금 있다가 갑자기 지렁이 같은 것이 정병(淨甁) 속에서 나와 맑은 하늘에 구름을 내뿜더니 큰비가 쏟아졌다. 좌우가 경탄하지 않는 이가 없어 모두들 신성하다 하였다.
개보(開寶 : 송 태조의 연호) 3년(광종 21, 970) 경오년 봄에 국사가 이르기를, “수주부(水州府 : 경기도 수원)의 갈양사(葛陽寺 : 지금의 龍珠寺 자리에 있던 절)는 산이 밝고 물이 고와 국가 만대의 복된 터전이니 따로 구획해서 복을 비는 곳으로 삼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왕이 허락하고 내탕금을 내려 빨리 그 일이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국사가 명을 받아 문인인 전 광명사 주지 보욱(普昱)에게 이를 감독하도록 하여 불상과 탑과 전각과 누각을 지으니 장대하고 아름다웠다. 이듬해 신미년(광종 22, 971) 가을에 준공하고 수륙도량(水陸道場 : 물과 육지에서 떠도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를 위로하기 위하여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의식)을 개설하여 왕이 태자에게 가서 낙성하게 하였다.
임신년(광종 23, 972) 봄에 국사가 누차 물러나기를 청하여 인장을 바치고 표(表)를 올리기에 이르니 왕이 영을 내려 허락하였다. 3월 15일에 왕이 연복사(演福寺)
10에 행차하여 절에 있는 모든 승려에게 재(齋)를 베풀고 겸하여 전별 의식을 베풀고는 문무반을 이끌고 작별하였다. 다음 날 길을 떠나니 중서사인(中書舍人) 이진교(李鎭喬)에게 명하여 남으로 화산(花山) 갈양사로 돌아가는데 따라가도록 하였다. 왕이 조(租) 5백석과 면포(綿布) 60필, 뇌원차(腦原茶) 1백각(角) 및 그릇 등을 내리고 또 전결(田結) 5백석(碩)을 하사하여 복을 비는 재산을 넉넉하게 하였으며 또 흥복우세(興福佑世)의 휘호를 내렸다.
이해 7월에 국사가 표를 올려 은혜에 사례하였다. 국사는 이로부터 향을 사르고 재계 수련하며 관불(觀佛)하고 지견(知見)을 없애 참선하니 조계종풍(曹溪宗風)이 크게 떨치었다. 광종 25년(974) 갑술년 2월 15일에 대중을 불러 경계하여 말하기를, “산하(山河) 만상(萬象)과 근진(根塵 : 眼, 耳, 鼻, 舌, 身, 意의 6根과 色, 聲, 香, 味, 觸, 法의 6境. 합하여 十二處라 하고 이에 일체법이 모두 포섭된다고 함) 사대(四大 : 만물을 이루는 地, 水, 火, 風의 네 가지 요소)는 허망하게 일어났다 허망하게 사라지지 않는 것이 없다. 나 또한 이제 근원으로 돌아가려 하니 너희들은 슬퍼하여 울거나 사랑하여 그리워하지 말라”하고 조용히 입적하니 나이 76세요 계랍(戒臘 : 출가하여 계를 받은 이후의 나이. 僧臘)은 61세였다.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교 교단을 구성하는 남녀 승속. 남녀 승려인 비구, 비구니, 남녀 재가 신도인 우바새, 우바이)이 가슴을 치며 슬퍼했고 부음이 궁궐에 들리니 왕이 애도하여 좌승선(左承宣) 중서사인(中書舍人) 이경적(李敬廸)을 보내 조문하고 상사(喪事)를 보살피게 하였다. 3월 8일에 울며 전신을 모셔 절의 남쪽 기슭에서 다비하니 사람들은 크게 슬퍼하고 짐승들은 슬프게 부르짖었다. 불길 속에서 사리 13매를 얻어 탑에 봉안하였다. 문인 홍화사(弘化寺) 주지 삼중대광(三重大匡) 대선사(大禪師) 숭담(嵩曇)과 광명사(廣明寺) 주지 삼중대광 대선사 보욱(普昱) 및 대선백(大禪伯) 정관(淨觀)과 대교석덕(大敎碩德) 충혜(忠惠) 등 백 여인이 국사의 행장을 수집하여 대궐에 가서 표를 올리니 왕이 담당 관서에 시호를 의논하게 하여 이해 7월 어느 날 시호를 추증하여 홍제존자(洪濟尊者)라 하고 탑호를 보광(寶光)이라 하였다.
20년이 지나 지금 우리 성상(성종) 13년(994) 갑오년 가을에 왕이 신 최량(崔亮)을 불러 하교하시기를, “돌아가신 혜거국사는 두 임금을 두루 섬겨 교화하여 다스리는 것을 음으로 도운 공이 큰데도 오히려 비를 새겨 후세에 전하는 가르침으로 삼는 것이 없으니 과인은 심히 개탄해 하는 바이다. 그대가 명(銘)을 지어 빨리 없어지지 않도록 하라” 하셨다. 신은 왕명을 잘못 받아 중대한 일을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이에 머리 조아려 손을 들어 절하고 명하기를,
마니(摩尼)의 옛 성인은 용장(龍藏)에 법을 드리우고
금속(金粟)이 모습을 나타내 구슬상투에 빛을 비추도다
자비로운 항해로 중생을 제도하고 독한 북은 혼을 잃게 하니
해가 학수(鶴樹 : 鶴林. 석가모니가 입적한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 숲)에 잠겨 만대에 꽃다움이 흐르도다
벽안(碧眼 : 선종 초조 달마대사. 인도에서 온 푸른 눈의 조사)이 서쪽에서 와서 글을 없애고
은밀히 심인(心印)을 받아 법의 옷을 여기 전하였네
모습이 있는 것은 모두 적멸하며 법은 높지 않은 것이 없으니
아름다운 도는 해가 되고 인하여 참된 근원을 보이네
말세에는 풍속이 얇아져 도의 본체가 이미 갈라지네
선 수행자는 법을 잃고 종지를 다투며 비를 깎네
물과 학은 섞이기 쉽고 들쭉날쭉한 것은 구별하기 어렵네
누가 미친 물결을 막을 것인가 훌륭한 인걸을 기다리는구나
우리 국사는 하늘이 놓은 뛰어난 영재라
큰 별이 꿈에 나타나고 높은 산이 맹세를 주저하구나
배움은 저절로 평범을 뛰어넘으니 덕은 누가 짝하리
계율을 지키고 법을 지키니 이미 곧고 깨끗하구나
지혜와 변론이 모두 뛰어나 왕의 스승이 되었네
나라를 복되게 하고 세상을 도와 큰 가르침으로 자비를 넓히네
나아가고 숨음이 의리에 맞고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로운 생각이네
산은 높고 물은 길어 백세의 시구(蓍龜 : 점치는 시초와 거북. 곧 모범, 기준)이라
해가 마침내 저무니 때로는 행하고 때로는 그치어
갈양사를 중수하고 연화장 터를 열었네
장차 숲으로 돌아가려 인장을 바쳐 왕사를 사양하네
굳게 바위굴에 가부좌하고 처음의 뜻을 이루게 하네
아침에 예불하고 저녁에 분향하여 생각마다 기원이 높아가네
향로 연기가 푸름을 흔들고 바리 받침이 붉음을 펼치네
나이들수록 곧음이 더욱 굳고 엄숙할수록 온화한 기운이 도네
한 가지 화두 참구에 정진하여 그 몸이 맑고 밝네
만상은 모두 허망한 것이라 철인(哲人)이 죽음을 말하니
괴로움의 바다에 노가 기울고 법의 집에 들보가 무너졌네
제호(醍醐 : 맛 좋은 우유 제품, 곧 불법)가 맛이 변하고 치자꽃 향기가 없어지니
나라의 비기가 절름발이가 되어 부모를 잃은 듯 하구나
법랍 61에 크게 은혜가 두터우니
……………
… 꽃산에 비를 새기니
바라건대 빛이 비치어 아득하도록 힘쓸 지어다
송(宋) 순화(淳化) 5년(성종 13, 994) 갑오년 8월 일에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