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부순절도
해제(국문)
<동래부순절도(東萊府殉節圖)>는 임진왜란 당시인 1592년 4월 15일 동래성(현 부산 동래구) 전투에서 순절한 이들을 기리며 제작된 전쟁기록화이다. 왜군은 4월 13일 부산 앞바다에 진격하여, 14일 부산진을 함락시키고 15일 동래성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당시 동래성을 지키던 부사 송상현(宋象賢, 1551~1592)을 비롯하여 관리와 군사, 백성들은 항전하였으나 군사와 무기 부족으로 결국 3,000여 명이 전사하였으며, 끝내 함락당했다. 이 그림은 임진왜란 순절자를 기리는 추모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것이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에 동래에 부임한 부사들은 동래 일대에 전하는 임진왜란 관련 고사를 수집하고, 충절을 기리는 사당을 만들고, 제향을 지냈으며 순절한 이들을 기리는 비석을 세우고자 애썼다. 가장 먼저 1605년부터 1607년까지 동래부사로 재임한 윤훤(尹暄, 1573~1627)은 1592년 동래부사로 순절한 송상현을 기리는 ‘송공사(宋公祠)’를 세웠고, 이때 부산진에서 전사한 첨절제사 정발도 함께 배향하였다. 1624년에 송공사는 국왕 인조(仁祖, 재위 1623~1649)로부터 충렬사(忠烈祠)라는 편액을 받았다. 전란 발발 60여 년 뒤인 1658년 동래부사로 부임한 민정중(閔鼎重, 1628~1692)도 적극적으로 추모사업을 기획했다. 송상현과 정발, 이 밖에 임진왜란 때 순절한 의사와 열녀 등 동래부민을 선양하고 민중의 충절의식을 고양하기 위하여, 전투 당시의 상황을 채록하여 기록으로 남기고 이를 토대로 비석을 세우고자 하였다. 또 동래부에 이들을 기리는 사당을 세우고 그림을 그려 봉안하고, 만일을 대비하여 방비를 튼튼히 하기 위해 동래부성을 쌓고자 하였다. 그러나 부사직에서 교체되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동래부사로 부임한 이들이 민정중이 기획한 추모사업을 이어받았다. 1664년부터 1666년까지 동래부사로 재임한 안진(安縝, 1617~1685)은 민정중에게 동래부사 시절에 채록했던 내용을 요청했고, 이에 민정중이 1668년 「임진유문(壬辰遺聞)」을 완성하였다. 이 글을 바탕으로 1668년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비문을 작성하였으며, 1670년 동래부사 정석(鄭晳, 1619~1677)이 충렬비를 세웠다. 문헌기록에 따르면, 부산진을 지키려했던 정발과 군사들의 이야기를 처음 그림으로 제작한 이는 동래부사 권이진(權以鎭, 1668~1734)이다. 그는 ‘부산진순절도’와 ‘동래부순절도’를 함께 제작해서, 정석이 세운 충렬비를 보호하는 비각 안쪽 벽면에 걸어두었다. 이 그림이 낡고 해지자, 1760년 동래부사 홍명한(洪名漢, 1724~1774)이 동래부 출신의 군관 변박(卞撲)에게 다시 그리게 하였다. 현재 보물로 지정된 <부산진순절도>와 <동래부순절도>는 이때 같이 세트로 제작된 것이다. 홍명한은 「본부순절도서(本府殉節圖序)」라는 글에서 순절도 2점이 오래되어 색이 변하고 해어져서, 내용을 분별하기 어려울까 염려되어 변박에게 다시 그림을 그리도록 했다고 썼다. 이때 제작된 그림은 동래 충렬사에 모셨다. 이 그림은 육군박물관 소장의 <부산진순절도>와 함께 변박이 제작하였다. 비단 세 폭을 이어 대형화폭을 만들었는데, 크기는 세로 145cm, 가로 96cm이다. 비단을 이어붙인 방식과 화면 크기는 <부산진순절도>와 동일하다. <동래부순절도>는 내륙에 위치한 동래성을 화면 한가운데 배치하고, 성 안팎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전투를 부감시로 묘사하였다. 동래성과 주변의 지형은 회화식 지도에서 보이는 동래읍성의 입지, 주변의 지형과 일치한다. 화가 변박은 동래부 출신 군관으로, 이 일대의 지리에 밝았던 인물이기도 하다. 주변의 산과 수목 묘사에는 18세기 진경산수화에 쓰이던 화보(畫譜) 풍의 나뭇가지 표현과 쌀알 모양의 미점(米點)이 대거 사용되었다. 그림 속 건물과 인물간의 비례 관계는 다소 어색한 부분이 있고 병사들의 모습도 도식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무기류의 표현은 비교적 정확한 편이다. 이 그림은 시간차를 두고 진행되는 여러 개의 사건을 하나의 화면에 표현하는 이시동도법(異時同圖法)을 바탕으로 동래성에서 일어난 여러 전투 장면과 일화를 묘사하였다. 가장 먼저 일어난 사건은 동래성 남문과 정면에 진을 친 일본군 본진 사이에 보이는 검은색 나무 팻말과 관련한 것이다. 일본군이 들고 있는 검은색 목판에는 ‘길을 빌려달라(假我途)’라는 문구가 쓰여 있고, 조선군이 성곽밖에 던진 검은색 목판에는 ‘길을 빌려주기 어렵다(假途難)’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이는 동래성 전투 전날인 14일, 적이 진을 치고서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으려면 길을 내놓으라”라고 목판에 써서 성 밖에 세워두자, 송상현이 “싸우다 죽기는 쉽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라고 써서 적에게 던졌더니 적이 세 겹으로 포위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는 일화를 그린 것이다. 왜군은 기창과 총, 칼을 들고 한 겹씩 동래성을 포위하고 있고, 남문 성루 위에는 송상현이 갑옷을 입고 서 있으며 좌우에 군관과 궁사들이 활을 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동래성 동쪽의 담장을 넘어 고개 아래로 내려가는 왜군의 모습은 15일 새벽에 일어난 사건을 그린 것이다. 이로 인해 조선군은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성안에는 당시의 긴박했던 여러 사건이 묘사되어 있다. 동래성 안쪽 북쪽에 자리한 객사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신 곳으로, 여기서는 부사 송상현이 분홍색 조복을 입고 양산군수 조영규(趙英圭, ?~1592)와 함께 임금에게 하직인사를 올리는 뒷모습이 그려져 있다. 객사 오른쪽에 있는 누각은 정원루(靖遠樓)인데 그 앞에는 동래항교 교수 노개방(盧蓋邦, 1563~1592), 유생 문덕겸(文德謙, ?~1592), 양조한(梁潮漢, ?~1592)이 서 있다. 이들은 문묘에 있던 성현의 위패를 지키려다 순절하였다. 성안 아래쪽에 기와지붕 건물에 올라가 기와를 던지며 왜군과 싸우는 이들은 평민 김상(金祥)과 아낙네들이다. 이들 아래에 기와에 맞은 왜군들이 넘어지거나 쓰러진 모습으로 그려졌다. 맞은편에 담장을 넘어가려는 여인은 송상현의 애첩 금섬(金蟾)으로, 결국 적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했다. 한편 북문 바깥에서 붉은색 갑옷을 입고 서쪽으로 백마를 타고 도망가는 이들은 좌병사 이각(李珏, ?~1592)과 수졸들이다. 무기와 깃발을 버리고 헐레벌떡 도망가느라 모자까지 벗겨진 모습이 호기심을 유발한다. 이 그림은 전쟁기록화로서, 임진왜란과 관련한 여러 일화를 하나의 화면 안에 효과적으로 배치하여 묘사하였다. 왜군에 당당하게 항전하는 송상현의 모습과 객사 앞에서 순절하는 송상현의 모습을 두 번 그려 강조하고, 이를 변절자 이각의 모습과 대비시켜서 ‘충절의식의 고양’이라는 전쟁기록화의 목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회화적으로는 원형구도와 부감시를 이용하여 사건을 묘사하는 방식과 회화식 지도의 양식을 결합하였는데, 이는 변박이 창안한 방식이라기보다는 이전부터 내려오던 순절도의 화면구성을 따른 것이다. 한편 <동래부순절도>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그려져서 1834년에 다시 모사하여 그린 그림이 울산박물관과 송상현의 가문인 여산 송씨 종가에 함께 전하고 있다. 글: 윤민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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