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영회도
- 영문명
- Giyeonghoedo (Gathering of Elders)
- 제작시기
- 1584년(선조 17)
- 재질
- 견본채색
- 규격
- 128.5x163cm
- 지정종목
- 보물
- 지정일
- 2001-10-25
- 소장처
- 국립중앙박물관
- 관련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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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국문)
1584년(선조 17) 기로소에 소속된 국가의 원로관료들이 정기적인 모임인 기영회(耆英會)를 갖고 이를 기념하여 제작한 계회도이다. 예조(禮曹) 예하의 기로소(耆老所)에서 주관한 기로연(耆老宴)은 15세기에 정례화된 후 16세기에 들어와 더욱 적극적으로 시행되었다. 양로(養老)와 관련된 기로연은 백성의 교화를 위한 치국의 한 방편으로 간주되어 왕의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으며, 기로소의 주관 하에 연중 봄, 가을에 기영회가 시행되었다. 한양의 육조거리가 있던 지금의 세종로에서 교보문고 본점이 있는 모퉁이에는 조선 시대의 기로소(耆老所)가 자리 잡고 있었다. 기로소는 관직이 높은 국가 원로들을 예우하기 위해 만든 기관이다. 기로소에서는 매년 봄과 가을에 한 차례씩 원로 관료들을 모시고 정기적인 모임인 기영회를 열었다. 기로소에는 나이 70세 이상, 정2품 이상의 정승을 지냈거나 품계가 1품 이상인 자들만 들어갈 수 있었다. 나이 많은 신하가 기로소에 들어가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었으며, 특별한 경우에는 그 장면을 담은 기영회도를 제작하여 나누어 가졌다. 기로소에서 행한 기영회는 제도적 정비가 이루어진 1475년(성종 6)부터 공식적으로 시행되었다. 기로소에서 주관한 기영회의 모습은 16세기에 그린 몇 점의 기영회도(耆英會圖)에 잘 나타나 있다. 가장 화격(畫格)이 높은 그림은 여기에서 살펴보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기영회도>이다. 족자로 꾸몄으며, 위로부터 표제, 모임의 장면을 그린 그림, 참석자들의 인적사항을 기록한 좌목(座目)으로 된 3단 구성을 취했다. 표제는 전서체(篆書體)로 쓴 ‘耆英(기영)’ 두 글자만 남아 있고, ‘會圖(회도)’ 두 글자는 닳아서 보이지 않는다. 좌목에는 영의정 홍섬(洪暹 1504~1585)을 비롯한 좌의정 노수신(盧守愼, 1515~1590), 우의정 정유길(鄭惟吉, 1515~1588), 판중추부사 원혼(元混, 1496~1588), 팔계군(八溪君) 정종영(鄭宗榮, 1513~1589), 판돈녕부사 박대립(朴大立, 1512~1584), 한성판윤 임설(任說, 1510~1591) 등 일곱 사람이 참석했다. 모두 70세와 정2품이 이상의 품계를 지닌 관료들이다. 좌목의 내용은 품계와 관직, 성명, 자(字), 본관, 호 순으로 다음과 같다. 1. 대광보국숭녹대부영중추부사겸영경연사(大匡輔國崇祿大夫領中樞府事兼領經筵事), 홍섬(洪暹), 퇴지(退之), 남양(南陽), 인재(忍齋) 2. 대광보국숭녹대부의정부좌의정겸영경연사감춘추관사(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 노수신(盧守愼), 과회(寡悔), 광주(光州), 소재(蘇齋) 3. 대광보국숭녹대부의정부우의정겸영경연사감춘추관사(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 정유길(鄭惟吉), 길원(吉元), 동래(東萊), 임당(林塘) 4. 숭정대부판중추부사(崇政大夫判中樞府事), 원혼(元混), 태초(太初), 원주(原州), 서애(西崖) 5. 숭정대부팔계군(崇政大夫八溪君), 정종영(鄭宗榮), 인길(仁吉), 초계(草溪), 팔계(八溪) 6. 숭정대부판돈영부사(崇政大夫判敦寧府使), 박대립(朴大立), 수백(守伯), 함양(咸陽), 무위당(無違堂) 7. 자헌대부한성판윤겸오위도총관(資憲大夫漢城判尹兼五衛都摠管), 임설(任說), 군우(君遇), 풍천(豐川), 죽애(竹崖) 기로들의 자리 배치는 품계와 관직을 기준으로 했다. 정1품인 세 사람은 북쪽, 종1품인 세 사람은 그림의 오른편인 동쪽, 정2품의 한성판윤은 홀로 서쪽에 앉았다. 좌목의 순서를 참고하면, 그림 속 인물이 각각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기영회도>에서 연회가 열리는 장소는 기로소 청사의 안으로 추정된다. 기영회가 열리는 중심 건물은 크게 그렸고, 그 안쪽은 다시 기로들이 자리 잡은 주공간과 시녀(侍女) 및 악공들이 있는 부속공간으로 나뉜다. 건물은 정면을 보고 그렸지만, 내부는 위에서 내려다본 시점을 적용하여 실내 공간이 잘 드러나도록 했다. 기영회가 열리는 건물 안쪽 벽면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병풍처럼 낱폭을 구분하는 표시가 없어 벽화로 추정된다. 화면 왼편은 매화와 모란이고, 오른편은 소나무를 그렸다. 제법 큰 둥치에서 가지를 뻗친 매화나무가 있고, 그 아래에 수금(水禽) 한 쌍이 노닌다. 매화나무 왼편에는 모란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모란은 부귀(富貴)를 상징하는 꽃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에 매화는 은은한 향기와 고고한 자태, 그리고 빼어난 운치를 그 매력으로 꼽는다. 벽화의 오른편에 그린 소나무는 장수(長壽)를 뜻하는 십장생(十長生) 가운데 하나이다. 이렇게 보면, 이 벽화는 부귀와 장수를 축원하는 뜻을 담은 그림으로 읽힌다. 그림 속의 기영회가 열린 시점은 언제쯤일까? 기영회에 참석한 노수신(盧守愼)이 좌의정에 임명된 시점은 1583년(선조 16) 11월인데, 박대립이 1584년 9월에 세상을 떠났다. 따라서 이 기영회는 1583년 11월 이후, 1584년 9월 이전에 열렸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기영회가 연중 봄·가을에 시행된 점을 고려하면, 1584년 봄에 열렸을 가능성이 높고, 그림도 이때 그려진 것으로 추측된다. 인물의 묘사에 있어서도 자연스러운 동세와 표정이 돋보이고, 기물의 묘사에도 세잔한 선묘와 섬세한 채색이 가해져 있다. 좌목과 인물의 위치를 비교해보면 좌차(座次)가 적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1품인 홍섬(81세), 노수신(70세), 정유길(70세) 등 3인은 북벽, 종1품인 원혼(80세), 정종영(72세), 박대립(73세) 등 3인은 동벽(東壁), 그리고 정2품인 임설(75세)은 서벽(西壁)에 각각 앉아 있다. 이들이 앉은 자리 서열은 나이가 아닌 품계순임을 알 수 있다. 기로들이 앉아 있는 주공간에는 춤추는 여기(女妓) 2명을 포함하여 모두 5명의 여기가 등장한다. 중앙의 여기 2명은 서로 마주보고 춤추고 있고, 나머지 3명은 연회의 진행을 돕고 있다. 준화(樽花)가 놓인 탁자를 기준으로 왼쪽 편에는 술을 데우는 여성들이 앉았다. 가리마를 쓴 의녀(醫女)들이다. 모여 앉은 무리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표정과 동작이 매우 자세하며 사실적이다. 그 오른편에는 화려하게 분장한 무용수들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여기에서도 서로 돌아보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놀라울 만큼 자연스럽다. 그 아래에는 9명의 악공(樂工)들이 연주에 임하고 있다. 중앙에 박을 든 지휘자를 비롯하여 오른쪽에 북, 해금, 장구, 왼쪽에는 당비파, 대금 등이 보인다. 다음으로 화면 왼편에 음식상을 나르는 두 남자와 엎드려 있는 수행원이 눈에 띤다. 주변 인물이지만, 복식과 동세를 정확히 그렸다. 섬돌 아래에는 가마꾼들이 두 명씩 짝을 지어 앉았다.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만, 지루해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기로신들과 함께 여러 임무를 맡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어 신분에 따른 복색도 다양하다. 기로신들은 흉배가 없는 담홍색 단령인 시복(時服)에 사모를 쓰고 각대(角帶)를 둘렀다. 시복은 평상시의 근무복이다. 악공과 시종들은 흑립(黑笠)을 쓰고, 흰색 포와 바지를 입었다. 기녀들은 황색의 장삼(長衫)을 입었지만, 하의는 담홍색, 적색, 청록색, 황색 등으로 다양하다. 기녀들의 머리는 상하 두 부분으로 나누었는데, 위쪽을 높게 올리고, 중간에는 황색 띠로 장식을 한 모습이다. 이는 조선 전반기에 볼 수 있는 기녀들의 복식으로 추정되며, 조선 후기의 풍속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기로신들을 비롯한 수행원들의 모습도 매우 구체적이고 자연스럽다. 복식의 특색도 사실적으로 정확하게 그려져 있어 복식사 연구 분야에도 훌륭한 사료를 제공해 준다.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는 주변 인물들의 모습은 풍속화의 한 장면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현장감을 잘 전달해 준다. 또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연회공간의 좌측에 마주 앉은 두 인물이 서로 잔을 권하는 모습이다. 자칫 경직되게 보일 수 있는 연회의 장면은 이 두 사람으로 인해 친밀하고 정감 있는 분위기로 연출되었다. 이와 같은 장면은 1629년(인조 7) 이기룡(李起龍)이 그린 <남지기로회도(南池耆老會圖)>에도 동일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어, 16세기 기영회도의 도상이 17세기에도 부분적으로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자리에 참석한 노수신, 정유길, 원혼, 정종영, 임설 등 다섯 사람의 기로들은 한 해 뒤인 1585년(선조 18)의 기영회에도 참여하여 <기영회도>를 남겼다. 여기에는 이들 다섯 사람과 의정부 우찬성 심수경(沈守慶, 1516~1599)과 지중추부사 강섬(姜暹, 1516-1594)이 새로 참석하였다. 이 기영회도 속 인물의 배치와 모습은 1584년의 <기영회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화면에 건물을 꽉 채워서 그렸고, 건물의 구조가 약간 다른 점에 차이가 있다. 또한 1585년의 <기영회도>에는 정면에서 바라본 좌우대칭의 구성이 적용되었으나 악공을 제외한 인물 묘사에는 형식화된 요소가 두드러져 있다. 1584년 작 <기영회도>에 그려진 인물 묘사가 얼마나 자연스럽고 사실적인지 다른 기영회도와의 비교를 통해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1584년과 1585년에 그린 두 점의 기영회도는 기로소의 공식적인 기영회 장면을 그린 것이다. 인물을 작게 배치하고 배경에 비중을 둔 16세기 전반기의 계회도와는 화면의 구성 방식이 다르다. 고려 말기부터 시작된 기로소는 1909년(융희 3)에 직제가 폐지될 때까지 6백 년이 넘는 역사를 이어왔다. 그만큼 많은 관련 기록을 남겼지만, 그들의 모습은 몇 점의 그림으로만 전하고 있다. 400년 전의 <기영회도>에는 화가의 시선이 읽어낸 다양한 풍속적인 설정들이 포함되었으며, 당시의 다채로운 시대상과 함께 화폭에 반영되었다. 글: 윤진영
- 담당부서 : 미술문화유산연구실
- 문의 : 042-860-919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