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당진찬도
해제(국문)
동국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는 <봉수당진찬도>는 8폭으로 구성된 ≪화성행행도(華城行幸圖) 병풍≫ 중 한 폭이다. ≪화성행행도 병풍≫은 1795년(정조 19)에 정조(正祖, 재위 1776~1800)가 화성(華城)에서 8일 동안 어머니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 1735~1815)의 회갑연을 열면서 관련 행사를 치른 장면을 그린 8폭의 병풍이며, <봉수당진찬도> 이 일련의 행사들 중 가장 중요한 혜경궁 홍씨의 탄신 일주갑을 기념하여 베풀어진 진찬연을 그린 폭이다. 당대 최고의 화원화가들이 그린 그림으로, 18세기에 달성한 왕실 회화의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혜경궁 홍씨는 자신의 남편인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 훗날 장조莊祖로 추존)와 동갑이었기 때문에 만약 사도세자가 살아 있었다면 1795년에 두 사람은 모두 회갑을 맞이했을 것이다. 정조에게 있어 아버지를 기리는 일은 자신의 왕위 계승의 정당화를 위해서도 꼭 필요했다. 따라서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顯隆園)에서 어머니의 회갑연을 치름으로써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에게 효행을 실천하는 방법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은 정조가 서울에서 출발하여 화성에 다다르고, 다시 행사를 마친 후 서울로 올라오는 행행(幸行)의 전 과정을 그린 ≪화성행행도 병풍≫ 중에서 한 폭이다. 그러나 이 전체 병풍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장면을 그린 낱폭만으로도 정조의 효행을 느낄 수 있다. ≪화성행행도 병풍≫은 현재 여러 복본(複本)이 전하고 있는데 이 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본은 1970년대 한 재일교포가 기증한 작품이다. 특히 이 작품은 현재 비록 단폭으로 전하고 있지만, 작품성만을 두고 판단할 때에는 어떤 8폭 병풍이나 다른 낱폭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난 수준을 보인다고 평가된다. 특히 현재 리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단폭 <환어행렬도>와 회장(回裝) 비단의 문양이나 장황 방식이 동일하다는 점이 주목된다. 두 점 모두 크기도 대동소이하기 때문에 이들이 하나의 병풍에서 낱폭으로 나왔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필치에 있어 두 점 사이에 차이를 보이는데, 이는 기록화 병풍처럼 대규모 작품을 조성할 때에는 대체 화원들이 주관화사(主觀畵師), 동참화사(同參畵師), 수종화사(隨從畵師)로 나뉘어 합작을 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행사가 치러진 봉수당(奉壽堂)은 화성 행궁의 정당(正堂)으로서 정조가 이전부터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곳이다. 정조는 화성에 새로 축성(築城)을 하고 정비를 하면서, 도시를 가꾸고 있었기 때문에 행사를 치른 장소는 정조 자신에게도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가진 곳이었다. 그런 곳에 정조가 어머니를 직접 모시고 방문하여 행사를 치렀으며, 그것을 의궤와 기록화를 통해 남기려 했다는 점 또한 주목된다. 작품은 당시 전체 행사 중에 가장 중요한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하여 진찬례(進饌禮)를 올리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진찬례는 화성 행궁에 도착한 후 사흘 뒤 2월 13일에 열린 것으로, 여기에는 혜경궁 홍씨의 친지 80여명이 초대되었다. 화면 상단에는 봉수당이 화려하게 꾸며졌고, 담장 안에는 북을 가운데 놓고 무용수 여럿이 추는 궁중 무용인 무고(舞鼓)와 뱃놀이 형식을 띠는 군무인 선유락(船遊樂)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이 유물은 18세기 후반 정조대를 대표하는 왕실의 기록화이다. 조선 왕실에서는 왕을 위한 어람용과 신하들에게 나눠주기 위한 분하용을 나누어 동일한 그림을 여러 본 만드는 관행이 있었다. 따라서 현재 동일한 작품이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리움미술관 등에 전하고 있다. 왕실에서 제작한 기록화의 경우 복본(複本) 제작이 기본이지만, 특히 이 작품은 복분을 유독 다량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기관에서는 각기 조금씩 다른 제목을 사용하고 있다. 현륭원에 방문한 것을 강조하여 화성원행도(華城園幸圖)라 표기한 곳도 있고 사도세자가 훗날 장조(莊祖)로 격상되어 원륭원이 왕릉(王陵)으로 격상한 것에 의미를 두어 수원능행도(水原陵行圖)라 표기한 것도 있다. 다만 본 유물은 낱폭으로서 8장면 가운데 하나의 장면에 집중하여 <봉수당진찬도>라 불리고 있다. 이 작품은 18세기를 대표하는 왕실의 회화로서 그 수준과 완성도가 높다. 기록화로서의 성격이 강하지만 일부 풍속화와 산수화로서의 면모도 강조되어 있다. 이 그림과 유사한 도설(圖說)이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도 그대로 남아 있어 조선 시대 왕실 기록문화의 특징을 살필 수 있다. 화면구성이나 꼼꼼한 채색법, 부감시(俯瞰視)와 같은 구도를 활용하여 행사 장면을 수준 높게 묘사한 수작(秀作)이다. 글: 김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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