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계첩
- 영문명
- Gisa gyecheop (Album of Paintings of the Gatherings of Elders)
- 제작시기
- 1719년(숙종 45)
- 제작자
- 김진여(金振汝), 장태흥(張泰興), 박동보(朴東普), 장득만(張得萬), 허숙(許俶), 이이방(李義芳)
- 재질
- 지견본채색
- 규격
- 전체: 79×59.5cm, 화면: 53.2×37.3cm
- 지정종목
- 국보
- 지정일
- 2019-03-06
- 소장처
- 국립중앙박물관
- 관련사이트
- 기사계첩-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 바로가기
해제(국문)
숙종(肅宗, 재위 1674~1720)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여 기로회(耆老會)의 행사 장면을 그리고, 왕의 시문(詩文)과 참석자의 초상화 및 시문을 합쳐 만든 첩이다. 전체 내용을 요약한 김유(金楺, 1653~1719)의 발문(跋文)에 더해 행사에 참석한 신하들과 화첩을 꾸민 화가들의 명단이 포함되어 있다. 크기는 전체 79.0×59.5㎝, 화면 53.2×37.3㎝이며 비단으로 장정했다. 1719년은 숙종이 즉위한지 45년 되는 해이고, 다음 해인 1720년은 숙종의 연세가 60세가 되는 해였다. 이 때 숙종이 기로소에 들어가게 되자 이를 기념하는 행사가 개최되었다. 이 서화첩은 숙종의 기로소 입소를 기념하여 베푼 연회에 참석한 10인의 기로신(耆老臣)들의 초상과 그들이 지은 시문 등을 수록하고 있다. 당대 최고의 도화서(圖畫署) 화원화가들이 그린 기록화와 초상화는 상당히 수준 높고 그 필치가 정교하다. 또한 여러 신하들이 지은 자필로 쓴 시가 남아 있어 회화사적, 서예사적,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은 작품이다. 특히 보통의 왕실 기록화에서는 서화가들의 이름은 남아 있지 않는 반면에 이 ≪기사계첩≫은 그림을 그린 5명의 화원화가의 이름과 감독 역할의 감조관(監造官)과 글씨를 쓴 서사관(書寫官)의 이름까지 남아 있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높다. 화원화가로는 김진녀(金振汝, 17세기 후반~18세기 전반), 장태흥(張泰興, ?~1729 이후), 박동보(朴東普, 1663-1744 이후), 장득만(張得萬, 1684~1764), 허숙(許俶, 1688~1729이후)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기사계첩≫은 전체 54면으로 서문, 축시, 발문, 좌목, 기록화, 초상화, 시, 서화가 명단이 포함되어 있다. 서화첩 속에는 총 다섯 장면의 기록화가 있는데 각각 좌우 양면을 사용해서 하나의 화면으로 꾸며졌다. 모든 장면은 사실적인 묘사와 생동감 있는 필치로 그려졌다. 신하들의 초상화는 반신상(半身像)으로 제작되었으며, 경현당(景賢堂)에서 열린 잔치에 참석한 기로신들이 직접 자필(自筆)로 쓴 축시가 있다. 이를 통해 기로신들의 개성적인 서풍(書風)도 확인할 수 있다. 앞표지에는 “기해기사첩(己亥耆社帖)”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으며, 1~2면은 공란으로 처리되어 있다. 3~4면은 “계첩서(契帖序)”라 하여 서문을 적었다. 경자(庚子)라는 언급이 있어 1720년에 꾸며진 것임을 알 수 있다. 5~6면은 숙종이 경현당에서 열린 연회에 참석하여 직접 지은 숙종대왕어제(肅宗大王御製)가 있다. 7~8면은 당시 이조참판 겸 대제학이었던 김유가 쓴 발문(跋文)이다. 9~10면에는 어첩봉안시 참석자 명단을 적었다. 11~12면에는 경희궁 흥정당(興政堂)에서 기로소로 어첩을 봉안하러 가는 행렬을 그린 <어첩봉안도(御帖奉安圖)>가 보인다. 13~14면에는 기로신들이 경희궁 숭정전에서 진하례를 올리는 장면을 그린 <숭정전진하전도(崇政殿進賀箋圖)>, 15~16면에는 경현당에서 왕이 직접 기로신들에게 내린 잔치 광경을 그린 <경현당석연도(景賢堂錫宴圖)>, 17~18면에는 경현당 석연에서 하사받은 은배(銀盃)를 받들고 기로소로 돌아가는 기로신들의 행렬을 묘사한 <봉배귀사도(奉盃歸社圖)>, 19~20면에는 기로신들이 기로소에서 연회를 이어가는 모습을 그린 <기사사연도(耆社私宴圖)>, 21~22면에는 좌목(座目)을 통해 기로회 참석자 11명에 대한 인적사항을 수록하였다. 23면부터 32면까지는 이들의 초상화 반신상이 실려 있다. 초상화의 경우 최규서(崔奎瑞, 1650~1735)의 것은 빠진 채로 총 10명의 초상화로 꾸며졌다. 23면에는 이유(李濡, 1645~1721)의 반신초상, 24면에는 김창집(金昌集, 1648~1722), 25면에는 김우항(金宇杭, 1649~1723), 26면에는 황흠(黃欽, 1639~1730), 27면에는 강현(姜鋧, 1650~1733), 28면에는 홍만조(洪萬朝, 1645~1725), 29면에는 이선부(李善溥, 1646~1721), 30면에는 정호(鄭澔, 1648~1736), 31면에는 신임(申銋, 1639~1725), 32면에는 임방(任埅, 1640~1724)의 초상화가 포함되어 있으며, 각각 전서(篆書)로 직위와 나이를 포함한 인적사항을 적었다. 33면부터 51면까지는 축시가 19면에 걸쳐 적혀 있다. 33면에는 김창집이 칠언시 <기사지희(耆社志喜)>, <하반(賀班)>, <근차홍상서하반운(謹次洪尙書賀班韻)> 3수를 지어 자필로 적었다. 34면에는 이유의 칠언시 <경차기사지희운(敬次耆社志喜韻)>이 실렸으며, 35면에는 김우항의 칠언시 <근차영상김공기사지희운(謹次領相金公耆社志喜韻)>과 <근차홍상서하반운(謹次洪上書賀班韻)>이 실렸다. 36면에는 황흠의 칠언시 <근차수상기사지경운(謹次首相耆社志慶韻)>, 37면에는 강현의 칠언시 <경차기사지희운(敬次耆社志喜韻)>과 <경차하반운(敬次賀班韻)>이 포함되어 있다. 38면에는 홍만조의 칠언시 <경차수상기사운(敬次首相耆社韻)>, <진하일구점지희녹정구화(陳賀日口占志喜錄呈求和)>가 전하며, 39면에는 이선부의 칠언시 <경차(敬次)> 두 수를 이선부의 손자인 이해운(李海運)이 대신 썼다. 40면에는 정호의 칠언시 <경차원보몽와김공기사지경운(敬次元輔夢窩金公耆社志慶韻)>과 <경차하반운(敬次賀班韻)>, 41면에는 신임의 칠언시 4수가 남아 있다. 42면에는 임방의 <기로석연후(耆老錫宴後)> 2수, 43면에는 이유의 칠언시 <근차임상서기노석연후(謹次任尙書耆老錫宴後)>, 44면에는 김창집의 칠언시 <차임상서기로석연후운(次任尙書耆老錫宴後韻)>이 있다. 45면에는 김우항의 칠언시 <근차임상서기로석연후운(謹次任尙書耆老錫宴後韻)>, 46면에는 황흠의 칠언시 <근차기사제공운(謹此耆社諸公韻)>이 있다. 47면에는 강현의 칠언시 <경차(敬次)>, 48면에는 홍만조의 칠언시 <근차임상서기로석연후운(謹次任尙書耆老錫宴後韻), 49면에는 이선부의 칠언시 <경차(敬次)>를 손자 이해운이 다시 한번 더 적었다. 50면에는 정호의 칠언시 <근차임상서기로석연후운(謹次任尙書耆老錫宴後韻)>, 51면에는 신임의 칠언시 <친임석연후차임지추시운(親臨錫宴後次任知樞詩韻)>이 있다. 52면에는 감조관, 서사관, 화원까지 이 서화첩의 제작에 참여한 이들의 명단이 있다. 53~54면은 공란이며 뒷표지가 있다. 왕실의 행사를 기념하여 제작된 기록화들은 같은 내용을 여러 점을 제작하곤 했다. 왕이 볼 수 있도록 어람용(御覽用)으로 바치는 한편 행사에 참여했던 신하들에게도 나누어주기 위한 용도였다. 이 서화첩은 모두 12부를 제작하여 1부는 기로소에 보관하고 나머지는 기로신 11명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로 인해 ≪기사계첩≫은 현재 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이외에도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개인소장, 리움미술관, 연세대학교박물관에 동일한 유물이 전하게 된 것이다. 본 유물은 송성문(1931~2011)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여 2003년 3월 19일 박물관에 입수된 유물이다. 표지는 모란당초문이 있는 청색 비단으로 꾸며졌으며 미색 비단의 제첨에는 “기해기사첩(己亥耆社帖)”이라 쓰여 있다.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본에 ‘기사계첩(耆社契帖)’이라고 쓰여 있는 점과 구분된다. 이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이 기로소 보관본일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풍산 홍씨 집안에서 전하는 개인소장본에 여러 종류의 함과 궤가 전하는 반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의 경우 별도의 보관상자 없이 한 권의 첩(帖)으로만 전하고 있다. 글: 김수진
- 담당부서 : 미술문화유산연구실
- 문의 : 042-860-919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