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감영도 병풍
해제(국문)
<경기감영도 병풍>은 경기도 감영을 중심으로 도성(都城)의 서대문 밖 반송방(盤松坊) 일대 풍경과 관변행사 및 백성들의 일상을 12폭 병풍에 담은 실경도(實景圖)이다. 종이 바탕에 수묵채색으로 그렸으며 크기는 세로 135.8㎝, 가로 442.2㎝이다. 보존 상태는 좋은 편이고 2003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조선 건국 후 경기감영(京畿監營)은 수원에서 광주로, 한성부 관할 성중오부(城中五部)에 속하는 돈의문(敦義門) 밖으로 몇 차례 이전하였고, 1886년에 다시 수원으로 옮겨졌다. 수도의 외곽을 가리키는 ‘경기(京畿)’의 위상에 걸맞게 경기도관찰사는 타 지방의 도백(道伯)보다 품계가 높은 정2품관을 임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돈의문 밖 경기감영은 조선시대 전국을 연결하는 도로망 중 제1로로 꼽히는 의주대로 상에 위치하는데, 그 길은 한양에서 북경을 오가는 사행로(使行路)이기도 했다. 그만큼 사람은 물론 물자의 이동이 많았던 지역으로 18세기 이후 상업이 발달하면서 번화한 시가지로 변모하였다. 뿐만 아니라 도성 북쪽과 서쪽에 자리한 산악의 위용과 연꽃이 아름다운 반송지(盤松池)처럼 승경(勝景)을 감상할 수 있는 명소도 많았다. <경기감영도 병풍>은 12폭을 연결한 대폭 화면에 그와 같은 경기감영 일대의 장대한 경관과 세태의 이모저모를 파노라마식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전체 화면의 오른쪽 제1폭 중단의 돈의문을 근경으로 설정하고 제12폭 상단의 안산(鞍山)까지 드넓은 공간에 자리한 다양한 경물들을 거리감을 살려 부감시점으로 포착하였다. 또한 주요 지형지물에 명칭을 써넣어 회화식 지도와 실경산수화의 특징이 결합된 시각자료의 일례로 볼 수 있다. 상부에 늘어선 안산ㆍ인왕산ㆍ북악산(백악산)ㆍ삼각산(북한산), 그리고 무악재로 뻗은 도로 상의 영은문(迎恩門)ㆍ모화관(慕華館)ㆍ연향대(宴餉臺) 등을 통해 경기감영의 지리적 입지를 가시화했다. 풍수적으로 도성의 내사산(內四山)에 포함되는 인왕산과 북악산 봉우리를 강조하였다. 아울러 핵심경관인 선화당(宣化堂)ㆍ객사(客舍)ㆍ고마청(雇馬廳)ㆍ중영(中營) 등 중요한 관아 시설은 평행사선투시도법을 적용해 포치하고 규모를 과장함으로써 각기 다른 경물의 위상을 나타냈다. 특히 ‘기영포정사(畿營布政司)’라는 현판이 붙은 감영의 정문 문루와 선화당 구역, 객사인 경기빈관(京畿賓館), 중영 안팎의 시설물들은 자를 이용하는 계화법(界畫法)의 묘미를 살려 건축의 세부 구조까지 구체적으로 묘사하였다. 멀고 가까운 산과 언덕, 시가지 곳곳에서 발견되는 울창한 수목(樹木)이 화면에 생기를 불어 넣는다. 이와 같은 자연적ㆍ인문적 경관의 묘사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계층의 인물이 등장하는 관변행사와 생업의 현장, 일상의 풍정(風情)을 화면에 포괄하였다. 먼저 제3폭 하단부터 제7폭 중단 감영의 정문까지 대로를 메운 관찰사 행렬이 보인다. 오사모에 단령 차림으로 말을 타고 이동하는 관찰사 앞뒤로 수행원과 병졸, 일산(日傘)ㆍ절(節)ㆍ월(鉞)ㆍ유서(諭書)ㆍ교서(敎書)ㆍ신전(信箭) 등을 든 의장대, 악기를 연주하는 고취대(鼓吹隊), 사명기(司命旗)와 영기(令旗)를 든 기수 등이 대열을 형성하고 있다. 으레 관찰사 행렬에 포함되는 대기치(大旗幟)가 보이지 않는 이 행렬의 성격은 불분명하지만, 구경하는 남녀노소 행인들과 백성들의 모습이 더해져 현장감을 높인다. 제9~11폭에 걸쳐 있는 중영과 제7폭의 연향대 주변에는 활쏘기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더욱이 상업에 종사하는 인간군상을 적극적으로 묘사해 얘깃거리가 풍성한 그림이기도 하다. 돈의문 바깥 도로변과 감사 행렬이 지나는 길가에 자리한 상점들이 눈에 들어온다. 미전(米廛)을 비롯해 주막ㆍ신발 가게ㆍ약방ㆍ붓과 종이 가게 등으로 다양하다. 볏짚으로 덮은 지붕에 차양이 달려 있는 점포가 있는가 하면 가가(假家)를 설치하기도 했다. 여기저기에서 지게꾼과 땔감 장수, 엿판을 맨 엿장수 아이들도 발견된다. 이처럼 민간의 다채로운 생업 현장을 시각화한 회화 작품이 드물어서 더욱 주목을 끈다. 요컨대 상업인구가 크게 증가한 조선 후기 사회경제적 변화상과 풍속화(風俗畵)가 유행한 문화예술계의 동향을 수렴한 화폭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다양한 경관요소를 능숙하게 소화한 솜씨와 표현법의 특징으로 보아 기본기가 탄탄한 도화서(圖畫署) 소속 화원(畵員)이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 10폭 병풍의 대화면에 갖가지 경물들을 포치한 구도는 화가가 뛰어난 기량의 소유자임을 증명한다. 세부 표현을 살펴보면, 토산에는 피마준(披麻皴)과 미점(米點)을, 암산에는 부벽준(斧劈皴)을 구사해 특징을 살렸다. 나무들은 먹 선을 쓰되 수종에 따라 담채(淡彩)와 진채(眞彩)를 써서 구별했다. 원경의 산 능선에 줄지어 선 소나무 표현은 1811년 통신사 수행화원으로 일본에 다녀온 화원 신원(信園) 이의양(李義養, 1768∼1824 이후)의 송수법(松樹法)과 상통한다는 지적이 있다. 각종 건축물은 정연한 필선의 계화법으로 묘사했다. 다양한 복식과 자세의 인물, 그리고 말과 소 같은 동물을 묘사한 필치가 여유롭다. 이상과 같이 <경기감영도 병풍>의 내용과 화풍에 나타나는 특징은 왕실뿐 아니라 민간으로 연폭 실경도 병풍이 확산하는 시기에 그려졌음을 방증한다. 18세기 말 정조대 화단의 성취가 집약된 <성시전도(城市全圖)>와 《화성원행도(華城園幸圖)》, 그리고 <평양성도 병풍(平壤城圖 屛風)>과 <화성전도> 같은 지방 성읍도(城邑圖)와 상통하는 점이 많다. 따라서 19세기 전반 경기도 감영과 관련이 깊은 지배층 문인관료의 주문에 따라 전문화가가 그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화폭의 규모와 내용으로 볼 때, 여러 명의 화가가 각기 특장을 살려 완성한 작품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요컨대 <경기감영도 병풍>은 미술사학 외에 다양한 전공 분야에서 활용이 가능한 정보의 집합체라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은 문화유산이다. 글: 박정애
- 담당부서 : 미술문화유산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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