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궐도
해제(국문)
동궐(東闕)은 창덕궁(昌德宮)과 창경궁(昌慶宮)을 이른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조선시대 축조된 궁궐 중에서 국왕들이 가장 오래 거처했던 궁궐이다. 조선 전기에 각각 경복궁의 이궁(離宮), 대왕대비 등 왕실 어른을 위한 궁궐로 축조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 중건되었다. 이후 1867년 경복궁(景福宮)이 중건되기 전까지, 창덕궁은 국왕이 정사를 돌보는 법궁(法宮)으로, 창경궁은 왕실 가족들의 주생활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동궐도(東闕圖)>는 조선 후기 창덕궁과 창경궁의 건물배치와 후원(後苑), 주변 지형을 한데 그린 그림이다. 이 때문에 <동궐도>는 미술사뿐 아니라 역사, 건축사, 조경사 등의 측면에서 조선 후기 궁궐의 모습을 알려주는 시각자료로 활용되어 왔다. 궁궐도라는 회화주제는 중국 수당대(隋唐代)부터 본격적으로 제작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궁궐도 대부분은 해당 왕조가 멸망하고 궁궐이 폐허가 된 이후에 과거의 영화를 상상하여 그린 것이다. 이와 달리, <동궐도>는 실재하는 동시대의 궁궐건축물을 거대한 화면에 펼쳐 그린 파노라마식 궁궐도라는 점에서 다르다. 동아시아 회화 중에서 국가 최고 권력자가 거처하는 궁궐을 이처럼 상세하게 재현한 그림은 찾아보기 어렵다. <동궐도>는 제작배경이나 제작시기, 제작의도, 제작화원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다. 그림에 제발이나 낙관도 없고, 관련 기록도 전무하다. 문헌기록과 그림 속에 그려진 건물의 소실 여부, 현판의 명칭 등을 조사하여 제작시기를 추정해보면 순조(純祖, 재위 1800~1834) 때 제작되었다. 구체적으로는 1828년에서 1830년까지의 동궐 현황이 그려져 있어서, 1827년 3월부터 대리청정을 했던 효명세자(孝明世子, 1809~1830)가 제작을 주도했던 것 같다. 이 시기에 효명세자는 순조와 순원왕후(純元王后, 1789~1857)를 위해 후원에 연경당(延慶堂)을 지었고, 자신의 서재 의두합(倚斗閤)을 지었다. 또 자경전(慈慶殿)과 연경당을 증개축하였다. 조선 후기 궁중에서 건축화나 간가도(間架圖) 등의 건축 관련 시각자료는 보통 건물 축조나 개보수 현황을 기록하기 위해 공사 완료 이후에 제작되었는데 <동궐도> 역시 달라진 동궐의 건물 현황을 기록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던 것 같다. 현재 <동궐도>는 고려대학교 박물관(이하 고려대본)과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이하 동아대본)에 각 1점씩, 총 2점이 남아있다. 둘 다 비단에 먹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채색했다. 고려대본은 만들어질 당시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데, 아코디언처럼 접을 수 있는 절첩본 16첩이 한 세트이다. 각 첩 표지에 ‘동궐도 인(東闕圖人)’이라고 쓰여있어서 본래 ‘천(天)․지(地․)인(人)’ 3건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개별 절첩본의 크기는 세로 45.7cm, 가로 46.3cm이며, 16첩을 모두 펼치면 전체 화면의 크기는 273cm, 가로 584cm이다. 현재 병풍으로 개장한 동아대본의 크기는 세로 274.2cm, 가로 578.2cm로 비슷하다. 절첩본 형식과 거대한 화면 크기로 볼 때, <동궐도>는 통상적으로 그림을 감상하는 것처럼 전체를 펼쳐서 보는 방식이 아니라, 보고 싶은 부분이 그려진 화첩만 꺼내서 열람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동궐도>는 16개의 절첩본을 활용한 대형화면에 정교하게 건축물을 그려 넣어, 마치 실제의 궁궐을 보는 듯한 시각적 즐거움을 준다. 압도적인 화면의 크기, 평행사선도법과 부감시점을 이용하여 정밀하게 그려진 대규모의 건축물군은 파노라마적인 감각을 배가시킨다. 건물의 사선축은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하강하는 방향이며, 사선각도는 약 45도에 달한다. <동궐도>에 사용된 평행사선부감도법은 고대부터 넓은 권역의 건축물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 도법이다. 조선시대 회화에서 대형화면에 평행사선부감도법을 이용하여 건축물을 상세하게 재현하는 경향은 19세기의 궁중기록화와 건축화에서 뚜렷해진다. 보물 <헌종가례진하도 병풍>(1844, 경기도박물관,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이나 보물 <왕세자탄강진하도 병풍>(1874, 국립고궁박물관) 등이 그 예이다. <동궐도>는 이보다 앞서서, 1820년대 후반에 이미 대형화면에 평행사선도법과 부감시를 결합하여 대규모의 건축물을 주제로 한 회화양식이 완성되었으며, 대형건축화를 제작할 수 있는 여건과 능력을 갖췄음을 드러낸다. <동궐도>는 모든 전각과 행각이 구획과 배치가 딱딱 맞아떨어져서, 실제의 건물배치를 그대로 그린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창덕궁과 창경궁의 전체 부지는 남북으로 긴 직사각형 형태이며, 절반 이상이 후원 권역이다. 반면 <동궐도>의 전체 화면은 세로보다 가로가 더 긴 직사각형이다. 그러므로 남북으로 긴 동궐의 현황을 좌우로 긴 화면에 맞추려면 필연적으로 왜곡이 발생하게 된다. 전체 화면을 가로로 삼단으로 구분해보면, 후원 권역이 화면 상단의 1/3에 그려져 있고 전각이 하단과 중단의 2/3을 차지한다. 전각이 적고 수목으로 우거진 후원 영역을 대폭 축소하여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후원에 위치하지만 정치적으로 상징성이 큰 건물들, 예컨대 자경전, 규장각(奎章閣), 대보단(大報壇) 권역 등은 주위 건물에 비해서 확대하여 그려 넣었다. 강조하고 싶은 대상을 실제의 크기나 거리에 상관없이 크게 그리는 동아시아 회화의 특징이 나타난다. 한편 동궐이 입지한 부지는 평지와 경사지가 섞여 있으며 개별 전각의 중심축도 제각각이다. 그러나 <동궐도>에서는 모두 평행을 이루는 것으로 그려졌다. 예를 들면, 창덕궁 인정전과 우측에 위치한 선정전은 서로 평행하지만, 희정당-대조전-경훈간 권역은 실제로는 인정전의 중심축을 기준으로 15도 가량 틀어져 있다. <동궐도>는 궁중화원들이 잘 구사했던 공필채색화풍으로 그려져 있다. 건물은 정교한 계화기법으로 작도되었으며, 세부 표현도 뛰어나다. 전각의 이름도 써넣었다. 동궐을 둘러싼 산과 둔덕, 나무는 당시 화단을 풍미하던 진경산수화풍, 즉 실경산수를 바탕으로 하되 남종산수화풍이 결합한 양식으로 그려졌다. 건물과 맞닿은 지면 부분은 옅은 녹색으로, 물을 푸르게 설채한 데서 서양화법의 영향이 감지된다. 고려대본과 동아대본은 동일한 화본을 바탕으로 그려졌다. 밑그림이 일치하고 산의 입체감을 표현하는 준법, 나무를 그리는 수지법, 물결을 그리는 수파묘도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벽체나 담장의 돌 모양이나 기단부의 네모반듯한 벽돌, 박석의 모양, 계단 층수, 건물 출입문 모양 등 건축물 세부 표현은 차이가 난다. 또 같은 위치라 하더라도 일부 나무의 표현이 다르다. 나뭇가지 모양은 일치하지만, 활엽수인 경우도 있고 침엽수로 묘사된 예도 있다. 밑그림은 같지만, 실제 채색을 할 때 수종(樹種)의 표현은 해당 부분을 담당한 화가가 자의적으로 선택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두 소장본에서 가장 차이가 나는 부분은 색조와 설채 방식이다. 고려대본은 채색이 진하고 강하다. 반면 동아대본은 색조가 옅고 채색의 종류도 비교적 단순하여 은은한 느낌을 풍긴다. 예를 들어, 후원의 주합루(宙合樓) 부분을 비교해보면 부용지(芙蓉池) 일대의 물빛이나 주변의 꽃나무 표현에서 확연한 차이가 난다. 나뭇잎도 고려대본이 훨씬 더 채색을 많이 사용하였다. 특히 고려대본은 건물과 지면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건물과 맞닿은 부분을 어두운 녹색으로 설채한 것이 눈에 띈다. <동궐도>의 성격은 복합적이다. 전경식 구도로 실제의 전각배치를 담아내고 전각명을 기입했다는 점에서 회화식 지도, 궁궐건축물과 후원을 주제로 했다는 점에서는 건축화, 실재하는 동궐의 건물과 지형, 수목을 준법과 채색을 이용하여 재현했다는 점에서 실경산수화의 성격이 고루 섞여 있다. 이 그림은 조선 후기 정조(正祖, 재위 1776~1800)대부터 설치되어, 규장각 소속으로 각종 궁중회화와 각종 시각자료를 제작했던 차비대령화원(差備待令畫院) 여러 명이 함께 제작한 것이다. 비단 위에 밑그림을 그리고 정교하게 채색하여 이를 천지인 3본으로 제작했으니 엄청난 시간과 인력, 비용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조선 후기 건축화 전문화원들의 수준 높은 필력과 구성력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글: 윤민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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