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계첩
해제(국문)
숙종(肅宗, 재위 1674~1720)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여 기로회(耆老會)의 행사 장면을 그리고, 왕의 시문(詩文)과 참석자의 초상화 및 시문을 합쳐 만든 첩이다. 전체 내용을 요약한 김유(金楺, 1653~1719)의 발문(跋文)에 더해 행사에 참석한 신하들과 화첩을 꾸민 화가들의 명단이 포함되어 있다. 화첩 전체 크기는 53.3×37.5㎝, 외궤 46.5×63.3×11.5㎝, 내함 41.0×56.0×5.3㎝, 호갑을 펼친 상태의 크기는 117.0×105.8㎝이다. 1719년은 숙종이 즉위한지 45년 되는 해이고, 다음해인 1720년은 숙종의 연세가 60세가 되는 해였다. 이러한 일을 계기로 숙종은 기로소에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기념하는 행사가 개최된 것이다. 이 서화첩은 숙종의 기로소 입소를 기념하여 베푼 연회에 참석한 10인의 기로신(耆老臣)들의 초상과 그들이 지은 시문 등을 수록하고 있다. 당대 최고의 도화서(圖畫署) 화원화가들이 그린 기록화와 초상화는 상당히 수준 높고 그 필치가 정교하다. 또한 여러 신하들이 지은 자필로 쓴 시가 남아 있어 회화사적, 서예사적,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은 작품이다. 특히 보통의 왕실 기록화에서는 서화가들의 이름은 남아 있지 않는 반면에 이 ≪기사계첩≫은 그림을 그린 5명의 화원화가의 이름과 감독 역할의 감조관(監造官)과 글씨를 쓴 서사관(書寫官)의 이름까지 남아 있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높다. 화원화가로는 김진녀(金振汝, 17세기 후반~18세기 전반), 장태흥(張泰興, ?~1729 이후), 박동보(朴東普, 1663-1744 이후), 장득만(張得萬, 1684~1764), 허숙(許俶, 1688~1729이후)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기사계첩≫은 전체 54면으로 서문, 축시, 발문, 좌목, 기록화, 초상화, 시, 서화가 명단이 포함되어 있다. 서화첩 속에는 총 다섯 장면의 기록화가 있다. 5점의 기록화는 좌우 양면을 사용해서 하나의 화면을 보여준다. 모든 장면이 사실적인 묘사와 생동감 있는 필치로 그려졌다. 신하들의 초상화는 반신상(半身像)으로 제작되었으며, 경현당(景賢堂)에서 열린 잔치에 참석한 기로신들이 직접 자필(自筆)로 쓴 축시가 있다. 이를 통해 기로신들의 개성적인 서풍(書風)도 확인할 수 있다. 표지에 기영화상첩(耆英畫像帖)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다. 3~4면은 “계첩서(契帖序)”라 하여 서문을 적었다. 경자(庚子)라는 언급이 있어 1720년에 꾸며진 것임을 알 수 있다. 5~6면은 숙종이 경현당에서 열린 연회에 참석하여 직접 지은 숙종대왕어제(肅宗大王御製)가 있다. 7~8면은 당시 이조참판 겸 대제학이었던 김유가 쓴 발문(跋文)이다. 9~10면에는 어첩봉안시 참석자 명단을 적었다. 11~12면에는 경희궁 흥정당(興政堂)에서 기로소로 어첩을 봉안하러 가는 행렬을 그린 <어첩봉안도(御帖奉安圖)>가 보인다. 13~14면에는 기로신들이 경희궁 숭정전에서 진하례를 올리는 장면을 그린 <숭정전진하전도(崇政殿進賀箋圖)>, 15~16면에는 경현당에서 왕이 직접 기로신들에게 내린 잔치 광경을 그린 <경현당석연도(景賢堂錫宴圖)>, 17~18면에는 경현당 석연에서 하사받은 은배(銀盃)를 받들고 기로소로 돌아가는 기로신들의 행렬을 묘사한 <봉배귀사도(奉盃歸社圖)>, 19~20면에는 기로신들이 기로소에서 연회를 이어가는 모습을 그린 <기사사연도(耆社私宴圖)>, 21~22면에는 좌목(座目)을 통해 기로회 참석자 11명에 대한 인적사항을 수록하였다. 23면부터 32면까지는 이들의 초상화 반신상이 실려 있다. 초상화의 경우 최규서(崔奎瑞, 1650~1735)의 것은 빠진 채로 총 10명의 초상화로 꾸며졌다. 23면에는 이유(李濡, 1645~1721)의 반신초상, 24면에는 김창집(金昌集, 1648~1722), 25면에는 김우항(金宇杭, 1649~1723), 26면에는 황흠(黃欽, 1639~1730), 27면에는 강현(姜鋧, 1650~1733), 28면에는 홍만조(洪萬朝, 1645~1725), 29면에는 이선부(李善溥, 1646~1721), 30면에는 정호(鄭澔, 1648~1736), 31면에는 신임(申銋, 1639~1725), 32면에는 임방(任埅, 1640~1724)의 초상화가 포함되어 있으며, 각각 전서(篆書)로 직위와 나이를 포함한 인적사항을 적었다. 33면부터 51면까지는 축시가 19면에 걸쳐 적혀 있다. 33면에는 김창집이 칠언시 <기사지희(耆社志喜)>, <하반(賀班)>, <근차홍상서하반운(謹次洪尙書賀班韻)> 3수를 지어 자필로 적었다. 34면에는 이유의 칠언시 <경차기사지희운(敬次耆社志喜韻)>이 실렸으며, 35면에는 김우항의 칠언시 <근차영상김공기사지희운(謹次領相金公耆社志喜韻)>과 <근차홍상서하반운(謹次洪上書賀班韻)>이 실렸다. 36면에는 황흠의 칠언시 <근차수상기사지경운(謹次首相耆社志慶韻)>, 37면에는 강현의 칠언시 <경차기사지희운(敬次耆社志喜韻)>과 <경차하반운(敬次賀班韻)>이 포함되어 있다. 38면에는 홍만조의 칠언시 <경차수상기사운(敬次首相耆社韻)>, <진하일구점지희녹정구화(陳賀日口占志喜錄呈求和)>가 전하며, 39면에는 이선부의 칠언시 <경차(敬次)> 두 수를 이선부의 손자인 이해운(李海運)이 대신 썼다. 40면에는 정호의 칠언시 <경차원보몽와김공기사지경운(敬次元輔夢窩金公耆社志慶韻)>과 <경차하반운(敬次賀班韻)>, 41면에는 신임의 칠언시 4수가 남아 있다. 42면에는 임방의 <기로석연후(耆老錫宴後)> 2수, 43면에는 이유의 칠언시 <근차임상서기노석연후(謹次任尙書耆老錫宴後)>, 44면에는 김창집의 칠언시 <차임상서기로석연후운(次任尙書耆老錫宴後韻)>이 있다. 45면에는 김우항의 칠언시 <근차임상서기로석연후운(謹次任尙書耆老錫宴後韻)>, 46면에는 황흠의 칠언시 <근차기사제공운(謹此耆社諸公韻)>이 있다. 47면에는 강현의 칠언시 <경차(敬次)>, 48면에는 홍만조의 칠언시 <근차임상서기로석연후운(謹次任尙書耆老錫宴後韻)>, 49면에는 이선부의 칠언시 <경차(敬次)>를 손자 이해운이 다시 한번 더 적었다. 50면에는 정호의 칠언시 <근차임상서기로석연후운(謹次任尙書耆老錫宴後韻)>, 51면에는 신임의 칠언시 <친임석연후차임지추시운(親臨錫宴後次任知樞詩韻)>이 있다. 52면에는 감조관, 서사관, 화원까지 이 서화첩의 제작에 참여한 이들의 명단이 있다. 53~54면은 공란이며 뒷표지가 있다. 왕실의 행사를 기념하여 제작된 기록화들은 같은 내용을 여러 점을 제작하곤 했다. 왕이 볼 수 있도록 어람용(御覽用)으로 바치는 한편 행사에 참여했던 신하들에게도 나누어주기 위한 용도였다. 이 서화첩은 모두 12부를 제작하여 1부는 기로소에 보관하고 나머지는 기로신 11명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로 인해 ≪기사계첩≫은 현재 본 소장본 이외에도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리움미술관, 연세대학교박물관에 동일한 유물이 전하게 된 것이다. ≪기사계첩≫ 자체의 구성은 본 개인 소장본이나 다른 기관 소장본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이 개인소장본은 당시 기로소에 입소했던 홍만조의 가문인 풍산 홍씨 집안에서 삼백여 년 간 보관해 온 것이다. 특히 이 서화첩을 보관해 온 용기도 일괄로 전해지고 있어 주목된다. 용기는 서화첩이 들어있는 내함(內函), 내함을 싼 호갑(護匣), 내함이 든 호갑을 넣는 외궤(外櫃)로 구성되어 있어 3중의 보존 전통을 보여준다. 아울러 본 ≪기사계첩≫ 내에는 ‘만퇴당장(晩退堂藏: 만퇴당 소장)’, ‘전가보장(傳家寶藏: 가문에 전해 소중히 간직함)’이라는 글씨가 따로 실려 1720년 이 서화첩이 하사된 이래 풍산 홍씨 가문에서 간직해왔음을 확인시켜 준다. 풍산 홍씨 가문 측에서는 홍만조가 국정 원로로서 숙종으로부터 이 계첩을 하사 받았다는 사실이 큰 영광이었을 것이다. 이 소장본을 다른 본과 비교해보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기사계첩≫에는 “기해기사첩(己亥耆社帖)”이라 쓰여 있어 기로소 보관본일 가능성이 높은 반면 따로 보관함이 전하지 않는다. 본 개인소장본의 경우 조선의 기록 문화가 민간에 하사된 후 그것이 보관 용기까지 한갖춤으로 온전하게 남아 있다는 점에서 그 특수한 가치를 찾을 수 있다. 글: 김수진
- 담당부서 : 미술문화유산연구실
- 문의 : 042-860-919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