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릉
- 왕릉명
- 헌릉
- 능주명
- 제3대 태종·원경왕후
- 왕릉위치
- 서울특별시 서초구 헌인릉길 34
- 조성연대
- 1420년 왕후릉, 1422년 왕릉
- 왕릉형태
- 쌍릉
능의 조성
헌릉은 1420년 원경왕후가 사망했을 때 처음 조성되었고, 1422년 태종이 사망하면서 쌍릉이되었다. 1420년(세종 2) 7월 10일 원경왕후가 사망하자 세종은 당일로 국장도감(國葬都監)을 설치했는데, 제릉과 건원릉을 조성한 박자청(朴子靑)이 산릉도감제조로 참여했다. 이때 상왕이었던 태종은 4도감 12색을 설치하여 국장을 진행하던 방식을 바꾸어 3도감(국장도감, 빈전도감, 산릉도감)만 설치하고 나머지 업무는 각 사(司)에서 담당하도록 했다. 산릉공사에는 전국의 군인을 소집했는데, 경기도와 충청도에서 각 3천명, 강원도와 황해도에서 각 2천명, 수군 4천명을 합하여 총 1만 4천명이 동원되었다. 1422년 태종이 사망한 당일에 국장도감, 빈전도감, 산릉도감이 설치되었다. 산릉을 조성할 인부를 징발했는데 수군 1천명, 도성 내에서 1천명, 가까운 도에서 2천명을 동원하고 수레를 끄는 소 수 백 마리를 사용하여 인력을 대신하게 하였다. 헌릉은 조선 최초의 쌍릉으로, 무덤 아랫부분이 병풍석으로 둘러있으며, 무덤의 형식은 태조의 건원릉을 따랐다. 각 무덤에 12칸의 난간석을 둘러서 서로 연결하였고 무덤 앞에는 양석과 호석·문인석·마석을 배치하였다. 무덤 앞의 석물은 고려시대의 현릉·정릉, 조선시대의 후릉과 같이 망주석을 제외하고는 각각 하나씩을 더 갖추었다. 언덕 아래에는 정자각이 있고 비각을 세웠다. 비각에는 2개의 신도비가 있는데, 능 조성 때 세운 왼쪽의 신도비가 임진왜란 때 손상되자 숙종 때 오른쪽의 신도비를 새로 세웠다. 왕릉의 신도비는 태조의 건원릉, 정종의 후릉, 태종의 헌릉, 세종의 영릉 때까지 세웠다가 그 이후에는 완전히 폐지했다. 현재 왕릉에 세워진 신도비는 건원릉과 헌릉에서만 볼 수 있다.
능주 소개
태종(太宗, 1367∼1422)은 조선 제3대 국왕으로 이름은 방원(芳遠)이며 자는 유덕(遺德)이다. 태조와 신의왕후의 다섯째 아들로 함흥의 귀주동에서 태어났다. 1383년(우왕 9) 문과에 급제하고 1383년(창왕 즉위년)에 이색(李穡)의 서장관으로 명나라 수도인 남경을 방문했다. 1392년에 정몽주를 제거하고 이성계를 국왕으로 추대하도록 유도했으며, 조선이 건국된 직후 정안군(靖安君)에 봉해졌다. 1394년(태조 3)에 명나라에서 왕자를 보낼 것을 요청하자 다시 남경을 방문하여 외교현안을 해결했다. 1398년 개국공신 정도전과 왕세자이자 아우인 이방석을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했고, 1400년(정종 2) 2월에 왕세자에 책봉되었다가 11월에 정종의 선위로 국왕이 되었다. 1418년(태종 18) 6월에 장자인 양녕대군을 폐위시키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세종)을 왕세자로 책봉했고, 8월에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다. 태종은 상왕이 된 이후에도 군권을 장악하여 대마도를 공략하는 등 실권을 행사했다. 1418년(세종 원년) 11월에 세종이 ‘성덕 신공 상왕(聖德神功上王)’이란 존호를 올렸고, 1421년 9월에는 ‘성덕 신공 태상왕(聖德神功太上王)’이라는 존호를 올렸다. 태종은 1422년(세종 4) 5월 10일에 연화동(蓮花洞)에 있던 이궁(離宮)에서 사망했고, 9월에 세종은 ‘성덕 신공 문무 광효 대왕(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이란 시호를 올리고 묘호를 ‘태종’이라 했다. 태종의 국장은 1422년 9월 6일에 거행되었다. 1683년(숙종 9)에 숙종은 태종에게 ‘예철 성렬(睿哲成烈)’이란 시호를 더했다. 원경왕후(元敬王后, 1365~1420)는 여흥부원군 민제(閔霽)의 딸로, 1382년에 이방원과 결혼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된 후 정녕옹주(靖寧翁主)에 봉해졌고, 1400년 태종이 왕세자로 책봉되면서 정빈(貞嬪)에 봉해졌다. 1400년 11월에 태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어 정비(靜妃)라는 호칭을 얻었다. 태종이 궁녀를 가까이 하자 부부간에 불화가 생겼고, 1407년 친정 동생인 민무구(閔無咎) 형제의 옥사사건을 계기로 갈등이 깊어져 끝내 4형제가 처형되는 비극을 맞았다. 1418년 11월 세종이 ‘후덕 왕대비(後德王大妃)’란 존호를 올렸고, 1420년(세종 2) 7월 10일에 수강궁 별전에서 사망했다. 그해 8월에 ‘원경 왕태후(元敬王太后)’란 시호를 올리고 능호를 ‘헌릉(獻陵)’이라 했으며, 9월 17일에 국장이 거행되었다. 1424년(세종 6) 6월 태종과 원경왕후의 신주를 종묘에 부묘할 때 ‘창덕 소열(彰德昭烈)’이라는 존호가 더해졌다.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에는 4남 4녀가 있는데, 4남은 양녕대군(讓寧大君), 효녕대군(孝寧大君), 충녕대군(忠寧大君;세종), 성녕대군(誠寧大君)이고, 4녀는 정순공주(貞順公主), 경정공주(慶貞公主), 경안공주(慶安公主), 정선공주(貞善公主)이다.
왕릉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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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문화유산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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