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릉
- 왕릉명
- 홍릉
- 능주명
- 제26대 고종·명성태황후
- 왕릉위치
-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 조성연대
- 1895년 숙릉(肅陵), 1897년 홍릉, 1919년 홍릉 천릉 및 합장
- 왕릉형태
- 합장릉
능의 조성
홍릉이라는 능호의 유래는 1897년 명성왕후의 능을 조성하면서 비롯된 것이다. 국권 피탈이라는 역사의 중심에 있던 고종과 명성왕후의 혼란스러웠던 삶만큼이나 홍릉의 조성 역사 선후관계가 매우 복잡하다. 1895년 명성왕후가 경복궁에서 붕어하자 능호를 숙릉으로 정하고 동구릉 숭릉 오른쪽 언덕에 산릉을 사역하였다. 그러나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무렵 고종은 산릉 공역을 중지하는 조칙을 내렸다. 고종은 동구릉이 아닌 새로운 장지를 다시 선정해서 명성왕후릉을 조성하기를 원했다. 그 결과 청량리를 능지로 정하고 능호를 숙릉에서 홍릉으로 고쳤다. 1900년에는 홍릉의 자리가 좋지 못하다고 하여 능의 자리를 군장리로 정하고 공사에 들어갔으나 여러 이유로 산릉 공사는 중단되었다. 1919년에 드디어 고종의 능을 조성하는 것에 맞춰 청량리 명성왕후릉 천릉을 진행하기 시작하였고 고종릉 조성도 함께 진행되었다. 홍릉은 황제릉 제도를 적용한 것으로 조선왕릉에 없던 일자형 침전이 정자각 대신 자리 잡았고 봉분 앞뒤를 호위하는 석수와 석인은 모두 침전 앞에 배열된 변화가 있게 되었다. 의식을 거행하는 침전의 건물 내부는 궁궐과 마찬가지로 화려한 단청으로 꾸민 당가를 세웠다. 비각도 규모가 훨씬 커져 위엄 있는 모습이다. 한편 침전 앞에 배열되어 있는 석수는 석마나 석양처럼 전통적으로 왕릉에 세워진 석수도 있으나 기린, 코끼리, 해태, 사자, 낙타 등 중국 황제릉에 세워진 석수도 함께 등장하였다.
능주 소개
고종(高宗, 1852~1919)은 조선 제26대 왕이다. 본관은 전주, 아명은 명복(命福), 초명은 재황(載晃)이며, 후에 희(熙)로 개명하였다. 호는 성헌(誠軒)이다. 영조의 현손 흥선군 이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여흥부대부인 민씨이다. 1863년 철종이 죽자 조대비는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으로 하여금 국왕에 즉위하게 하였다. 즉위 후 1866년 9월 여성부원군 민치록(閔致祿)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으니, 훗날 명성황후이다. 즉위 당시 고종은 당시 12세로 흥선대원군이 국정을 총람하였다. 고종이 장성하여 직접 통치를 하면서 대외 개방 정책을 받아들여 1876년 일본과 수호조약을 체결하고 구미 열강과도 조약을 맺는 등 적극적으로 개항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대한제국을 침략하려는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켜 왕궁을 습격,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폭거를 자행하였다. 을미사변으로 고종은 왕비를 잃었으며, 일본의 압력으로 폐서인 조처까지 취하였으나 얼마 뒤 명성황후의 복위조서를 내려 빈전을 태원전에 설치한 뒤, 1897년 명성황후로 추존하고, 비로소 청량리 홍릉에 국장하였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에 대하여 군사적 압력과 정치적 간섭을 강화하자, 아관파천을 단행하고 환궁 후 대한제국 수립을 선포하여 황제위에 올랐다.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마침내 을사조약의 체결을 강요하였다. 고종은 이에 반대하였으나 을사오적 등 친일 대신들에 의해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고종은 미국에 조약의 무효를 호소하려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하였으나 이를 빌미로 이완용(李完用)·송병준(宋秉畯) 등 친일 매국 대신들과 군사력을 동반한 일제의 강요로 한일협약 위배라는 책임을 지고 7월 20일 퇴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종의 뒤를 이어 순종이 즉위하였으며, 고종은 태황제(太皇帝)가 되었다.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합방하자 이태왕으로 불리다가 1919년 정월에 승하하였다. 이때 고종이 일본인에게 독살당하였다는 풍문이 유포되어 민족의 의분을 자아냈으며, 인산례로 국장이 거행될 때 1919년 3월 1일 전국 각지에서 기미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는 조선 제26대 왕 고종의 비이다. 본관은 여흥이며, 부친은 여성부원군 민치록(閔致祿)이다. 흥선대원군의 부인 부대부인 민씨의 천거로 왕비로 간택되어 1866년 한 살 아래인 고종의 비로 입궁하였다. 대원군의 실각 후 척족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하고 고종을 움직여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고 일련의 개화 시책을 추진하도록 하였다. 동학농민운동 이후 적극적인 침략공세를 펴게 된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명성왕후 세력을 거세하려고 하였다. 일본공사 미우라는 명성황후와 척족, 친러세력을 일소하고자 1895년 8월, 일본 군대와 정치낭인들이 왕궁을 습격해 명성왕후를 시해한 뒤 정권을 탈취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민비는 나이 45세로 살해되어 시체가 불살라지는 불행한 최후를 마쳤다. 당시 정부는 친일정책을 펴 폐비조칙을 내렸다. 그러나 고종에 의해 복위되어 1897년 명성황후로 추존되고 난 뒤 11월 양주 천장산 아래(지금의 청량리 부근) 국장되어 ‘홍릉(洪陵)’이라 하였다. 1919년 고종이 승하하자 2월 지금의 자리로 천릉되었다.
왕릉탐방
홍릉(洪陵) 구조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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