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릉
- 왕릉명
- 수릉
- 능주명
- 추존황제 문조·신정익황후
- 왕릉위치
-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
- 조성연대
- 1830년 연경묘(延慶墓), 1846년 왕릉 1차 천릉, 1855년 왕릉 2차 천릉, 1890년 왕후릉
- 왕릉형태
- 합장릉
능의 조성
수릉은 효명세자로 잘 알려진 문조와 그의 비 신정왕후의 능으로 왕릉과 왕비릉을 합장한 단릉이며 1830년 처음 조성된 후 풍수상의 이유로 두 번의 천장을 겪고 지금의 자리에 안치되었다. 처음에는 경종 의릉의 왼쪽 언덕에 조성되었으나 1846년에는 양주 용마봉 아래로, 1855년에는 동구릉 태조 건원릉 좌측인 지금의 자리로 최종 옮겨지게 되었다. 상설제도는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을 따랐고 능침의 삼계는 외계와 내계로만 구분되었다. 문관은 금관을 쓰고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조복을 입고 있으며 무석인의 경우 세부장식이 매우 섬세하고 독특한 문양으로 된 갑주가 특징이다. 1843년 헌종의 즉위와 더불어 효명세자가 익종으로 추숭되었고 능호도 수릉으로 봉릉되었다. 그 후 3년 째 되던 1846년 1월 수릉의 풍수가 좋지 못해 옮겨야 한다는 신료들의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헌종은 정국이 어수선하다는 이유로 결정을 미루고 있다가 1846년 3월 7일 수릉 천릉이 결정되었다. 산릉도감에서 용마봉이 건원릉에서 멀지 않으므로 옛 석물을 다시 사용하되 난간석, 무석인, 석호, 석양은 전에 없었으므로 새로 설치하기로 하였다. 혼유석은 지나치게 크므로 『국조상례보편』의 제도에 맞게 만들고 표석은 불가피하게 고쳐 제작해야 하므로 세척한 후에 천릉의 일을 고쳐 새겨 넣게 하였다. 1846년 수릉을 천릉한 지 11년째 되던 해 풍수상의 문제로 다시 한 번 천릉하게 되었는데 석물은 전의 것을 옮겨 사용하였다. 1890년 4월 7일 신정왕후가 승하하자 문조가 묻힌 오른족 자리에 합부하기로 결정하였다. 문조릉과 합장릉으로 조성된 신정왕후릉은 왕후릉이 왼쪽에 위치한 일반적인 조선왕릉 제도와 달리 문조의 관 오른쪽에 묻힌 것이 특징이다. 이는 지관들이 혈의 상태가 좋은 곳으로 이곳을 추천했기 때문이다. 지금 수릉에는 1890년 세워진 합봉비와 1902년 고종에 의해 황제 황후로 추숭되고 건립된 추숭비가 세워져 있지만 천릉 당시에는 1835년 효명세자가 익종으로 추숭된 이후 1846년 양주군 비봉면에 세워졌던 천릉비, 1855년 동구릉에 세워진 천릉비를 합해 총 3기의 표석이 세워져 있었다.
능주 소개
문조(文祖, 1809~1830)는 조선 후기 추존왕이다. 이름은 영(旲), 자는 덕인(德寅), 호는 경헌(敬軒)이다. 제23대 왕인 순조의 세자이다. 어머니는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로 김조순(金祖淳)의 딸이다. 1812년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819년 영돈녕부사 조만영(趙萬永)의 딸인 풍양 조씨를 맞아들여 가례를 올렸다. 1827년 부왕인 순조의 명령으로 대리청정을 하면서 어진 인재를 널리 등용하고, 형옥을 신중하게 하는 동시에 모든 백성을 위하는 정책의 구현에 노력하였으나 불행히도 대리청정을 수행한지 4년만에 승하하고 말았다. 그의 아들 헌종이 즉위한 뒤 왕으로 추존되어 ‘익종(翼宗)’이라 하였고, 이후 고종 연간 다시 ‘문조(文祖)’라 추숭하였다. 묘호는 ‘문호(文祜)’, 능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수릉(綏陵)이며, 시호는 효명(孝明)이다.
왕릉탐방
수릉(綏陵) 구조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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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문화유산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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