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릉
- 왕릉명
- 융릉
- 능주명
- 추존황제 장조·헌경의황후
- 왕릉위치
- 경기도 화성시 효행로481번길 21
- 조성연대
- 1762년 수은묘(垂恩墓), 1776년 영우원(永祐園), 1489년 현륭원(顯隆園), 1816년 왕후 합장, 1899년 봉릉
- 왕릉형태
- 합장릉
능의 조성
융릉은 왕릉과 왕비릉이 하나로 합쳐진 합장릉으로 1899년 고종에 의해 능으로 추숭되기 전 위상 변화에 따른 개칭과 천장을 반복하였다. 1762년 왕세자가 창경궁에서 죽자 영조는 경기도 양주시의 배봉산(拜峰山)에 묘를 조성하고 수은묘라 하고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수은묘를 원으로 격상시켜 영우원으로 봉원하였고 사당은 경모궁으로 격상하였다. 그러나 영우원의 지세에 대하여 문제가 제기되자 지금의 화성으로 자리를 옮기고 원호를 현륭으로 고쳤다. 이로써 영우원은 천원과 동시에 현륭원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조성되었다. 현륭원은 격은 원이었으나 석수의 수량이 반으로 줄었을 뿐 병풍석을 두르고 문무석인을 모두 배치하여 왕릉에 버금가는 모습으로 조성하였다. 1815년 헌경왕후가 승하하자 현륭원에 합장하였다. 1816년 합장릉으로 조성된 후 현륭원은 한동안 '원'의 지위를 유지하다가 1899년 고종이 정조와 헌경왕후를 황제와 황후로 추숭하면서 비로소 융릉으로 봉릉되었다. 융릉이 조성된 후 순조, 철종, 고종, 순종까지 융릉에 행행하였다.
능주 소개
장조(莊祖, 1735~1762)는 조선 제21대 영조의 둘째 아들이자 제22대 정조의 아버지로 사도세자(思悼世子) 또는 장헌세자(莊獻世子)로 불린다. 1899년 고종에 의해 장조로 추숭되었다. 본관은 전주, 이름은 선(愃), 자는 윤관(允寬), 호는 의재(毅齋)다. 어머니는 영빈 이씨이며, 부인은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인 혜경궁 홍씨이다. 이복형인 효장세자가 일찍 죽고 영조의 나이 40세가 넘어서 출생한 탓으로 2세 때 왕세자로 책봉되고, 10세 때 혼인해 곧 별궁에 거처하였다. 어려서부터 매우 영특해 3세 때 이미 부왕과 대신들 앞에서 『효경』을 외우고 7세 때 『동몽선습』을 떼었다고 한다. 10세 때에는 이미 정치에 대한 안목이 생겨 집권 세력이니 노론들이 처결한 바 있는 신임사화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1749년(영조 25)에 부왕을 대신해 서정을 대리하게 되자, 그를 싫어하는 노론들과 이에 동조하는 계비 정순왕후 김씨, 숙의 문씨 등이 영조에게 그를 무고하였다. 1761년 계비 김씨의 아비인 김한구(金漢耉)와 그 일파인 홍계희(洪啓禧)·윤급(尹汲) 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羅景彦)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하였다. 영조는 마침내 나라의 앞날을 위해 세자를 죽이기로 결시하고 그를 휘령전으로 불러 자결을 명하였다. 하지만 세자가 끝내 자결을 하지 않자, 세자를 서인으로 폐하고 뒤주 속에 가두어 8일 만에 죽음을 맞이하였다. 생전에 『무예신보(武藝新譜)』라는 책을 편찬했을 정도로 무예에 관심이 많았고 이는 아들 정조가 1790년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간행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글씨와 그림에도 소질이 있어 동궁 시절에 쓰거나 그렸다는 필첩과 그림이 전해지고 있다. 장조가 죽은 뒤 영조는 그에게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고, ‘수은(垂恩)’이라는 묘호도 내렸다. 장례 때는 친히 나아가 스스로 신주에 쓰면서 나라의 앞날을 위해 부득이한 조치였음을 알리기도 했다. 1776년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장헌(莊獻)’으로 추존하였고, 묘우인 수은묘를 격상시켜 경모궁이라 하였다. 1899년에 고종에 의해 다시 장조로 추존되었다. 헌경왕후(獻敬王后, 1735~1816)는 조선 제21대 국왕 영조의 장남 장조의 비이다. 본관은 풍산으로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이며, 정조의 어머니이다. 1744년 세자빈에 책봉되고, 1762년 남편 사도세자가 죽은 뒤 ‘혜빈(惠嬪)’에 추서되었다. 당시 왕후의 아버지 홍봉한과 작은아버지 홍인한(洪麟漢)은 외척이면서도 세자의 즉위에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던 까닭에 헌경왕후는 남편의 참담한 운명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 뒤 1795년 사도세자의 참사를 중심으로 자신의 한 많은 일생을 기록한 『한중록(閑中錄)』을 저술해 궁중문학의 효시로 평가받고 있다. 1776년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혜경(惠慶)’이라는 궁호가 내려졌으며 이로 인해 지금은 혜경궁 홍씨로 잘 알려져 있다. 고종 때 ‘헌경왕후’로 추존되었고 대한제국 때 다시 ‘의황후(懿皇后)’로 추존되었다. 1816년 당시 현륭원이었던 장조의 능에 합봉되었다.
왕릉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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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문화유산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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