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릉
- 왕릉명
- 숭릉
- 능주명
- 제18대 현종·명성왕후
- 왕릉위치
-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
- 조성연대
- 1674년 왕릉, 1684년 왕후릉
- 왕릉형태
- 쌍릉
능의 조성
숭릉은 동구릉에 쌍릉으로 조성되었다. 현종이 1674년 먼저 승하하여 능이 조성되었고 1683년 명성왕후가 승하함으로써 현종 능 왼쪽에 안장되었다. 능의 공사 일정이 보고된 다음날 9월 15일에 숙종은 자전(명성왕후)의 뜻을 빌려 근래 백성들이 너무 곤궁하니 새 능의 석물은 만들지 말고 구 영릉(寧陵)의 석물을 재사용하기를 명하였다. 더욱이 숭릉 공사는 1674년 2월에 승하한 효종비 인선왕후의 능이 조성된 후 2달이 채 되지 않아 시작된 작업이었기 때문에 국가적으로도 매우 힘든 상황이었다. 아마도 명성왕후는 일련의 왕릉 조영으로 인해 어려워진 사정을 감안해서 재정 지출을 덜고자 구 영릉 석물을 재사용할 것을 제안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옛 능의 석물을 캐서 다시 사용한 숭릉은 조선왕릉 역사상 기존 석물을 재사용한 첫 사례에 해당된다. 숭릉의 석물 체제는 천릉한 효종 영릉의 제도에 맞춰 진행하기로 했다. 따라서 완성된 구 영릉 석물일지라도 조금씩 다듬고 새기는 과정을 거쳤다. 숭릉 공사가 완료된 후 1677년 2월 28일 풍우와 장마로 인해 능상의 사초, 곡장의 계단과 토사가 유실되자 수개도감을 설치하여 대대적인 보수를 거쳤다. 숭릉에 건립된 건축물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보물로 지정된 정자각이다. 숭릉 정자각은 영릉(寧陵)의 제도를 따라서 지어진 건물이며 유일하게 팔작지붕인 정자각이다. 이러한 규모나 지붕 형식은 1674년에 창건된 형태를 지금까지 그대로 유지하고 있음을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건물은 17세기 정자각의 다양한 유형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사례라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 숭릉의 조포사는 동구릉의 조포 역할을 맡은 불암사(佛巖寺)에서 담당하였다. 불암사는 왕릉의 제사와 부역을 제공한 역할도 했지만 주변에 석재가 풍부해 종종 근처에 부석소(浮石所)를 마련해놓고 석물 작업을 하던 유서 깊은 장소이기도 하다.
능주 소개
현종(顯宗, 1641~1674)은 조선 제18대 왕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이름은 ‘연(棩)’이다. 자는 ‘경직(景直)’이다. 효종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우의정 장유(張維)의 딸 인선왕후(仁宣王后)이다. 비는 영돈녕부사 김우명(金佑明)의 딸 명성왕후이다. 효종이 봉림대군 시절 청의 볼모로 심양에 있을 때 심관에서 출생하였다. 1649년(인조 27) 왕세손에 책봉되었다가 효종이 즉위하자 1651년(효종 2)에 왕세자로 진봉되었다. 현종은 효종의 뒤를 이어 1659년에 즉위하여 재위 15년 동안 대부분 예론을 둘러싼 정쟁 속에서 지냈다. 1662년(현종 3) 호남지방에 대동법을 시행하였다. 1668년 동철활자 10여 만자를 주조했으며, 혼천의를 만들어 천문관측과 역법 연구에 이바지하였다. 또한 지방관의 상피법을 제정했고, 동성통혼을 금지시켰다. 1666년에는 1653년 제주도에 표류해 온 하멜(Hendrik Hamel) 등 8명이 전라도 좌수영을 탈출하여 억류생활을 한 14년간의 이야기인 『표류기(漂流記)』와 『조선국기(朝鮮國記)』가 발간되었다. 현종은 효종 대부터 추진해 왔던 청나라에 대한 보복정벌인 북벌을 국제관계와 국내사정으로 중단한 대신, 군비에 힘써 훈련별대를 창설했다. 현종은 즉위하자마자 예송논쟁에 부딪혔다. 효종이 승하하자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복제문제가 당쟁으로 비화한 것이다. 서인측은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을 필두로 효종이 둘째 아들이므로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남인측의 윤휴(尹鑴)와 허목(許穆) 등은 효종이 둘째 아들이라고 해도 왕위를 이어받았으므로 3년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주자가례를 따른 민간과 달리 오례의를 따른 왕실이 기년복에 대한 전거를 찾을 수 없었던 현실에서 비롯된 논쟁이었다. 1674년 인선왕후가 승하하자 다시 장렬왕후의 복제문제가 재론되면서 예론이 또다시 거론되었다. 그 뒤 이 문제가 기년복으로 정착되면서 서인측의 주장이 좌절되었다. 복제문제는 현종의 뒤를 이어 숙종이 즉위한 후에도 계속되어 1679년(숙종 5) 20년간에 걸친 기해복제 문제를 다시 거론하지 말라는 엄명이 있었다. 이렇듯 현종 연간은 예송논쟁으로 점철된 시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현종이 승하한 뒤 찬수된 『현종실록』도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종실록』은 1675년(숙종 1) 편찬에 들어갔으나 간행이 여의치 못하자 숙종의 독촉을 받고 1677년에 겨우 완성되었다. 1680년 경신대출척을 계기로 서인이 다시 남인을 숙청하고 정권을 잡은 뒤 서인 중심의 실록개수청을 설치하였다. 오랜 진통 끝에 결국 1683년 24권의 『현종개수실록』이 완성될 수 있었다. 조선시대 수정실록으로 『선조실록』과 『경종실록』이 있고, 개수실록은 『현종개수실록』 뿐이다. 이 모두 당쟁의 결과로 부득이하게 개수 또는 수정된 실록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현종개수실록』이 편찬될 즈음 당시의 치열했던 정치적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1674년 8월 18일 34세의 나이에 창덕궁 재려에서 승하하였고 8월 24일 시호와 묘호, 능호를 올려 시호는 ‘소휴 순문 숙무 경인 창효 대왕(昭休純文肅武敬仁彰孝大王)’, 능호는 ‘숭릉(崇陵)’, 묘호는 ‘현종’, 전호는 ‘효경(孝敬)’으로 정하였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명성왕후(明聖王后, 1642~1683)는 조선 제18대 왕 현종의 비이다. 본관은 청풍(淸風)이며 1642년 5월 17일 서울 중부 장통방(지금의 종로1가 부근)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영돈녕부사 청풍부원군 김우명(金佑明)이다. 모친은 은진 송씨로 송국태(宋國澤)의 딸인 덕은부부인(德恩府夫人)이다. 1651년(효종 2) 세자빈에 책봉되어 어의동 본궁(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사저)에서 가례를 올렸다. 1659년(현종 즉위년) 왕비에 책봉되었다. 1683년 12월 5일 창경궁 저승전에서 42세로 승하하였다. 행장에 의하면 곤궁한 백성들을 진휼하였고 아랫사람들을 잘 다독였다고 하나 성격이 과격하여 궁중의 일을 다스림에 거친 처사가 많았고, 숙종 즉위 초에는 조정의 정무까지 관여하여 관료들의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특히 1675년 ‘홍수의 변[紅袖之變]’ 때에는 대신들을 불러놓고 울부짖는 등 불미스런 행적을 남겼다. 그러나 나라의 어려운 살림살이를 위해 검약한 생활에 앞장섰고 자신의 능도 현종과 합장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을 정도로 국모로서 모범을 보이고자 노력한 행적을 남기기도 했다. 현종과의 사이에서 숙종, 명선·명혜·명안 공주를 낳았다. 명선·명혜공주는 일찍 죽었고, 명안공주는 해창위 오태주(吳泰周)에게 출가하였다. 시호는 ‘현열 희인 정헌 문덕 명성 왕후(顯烈禧仁貞獻文德明聖王后)’이다. 1684년 현종 옆에 안장되었다.
왕릉탐방
숭릉(崇陵) 구조보기
왕릉살펴보기는 PC화면에서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 미술문화유산연구실
- 담당자 : 박지영
- 문의 : 042-860-9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