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릉
- 왕릉명
- 영릉
- 능주명
- 제17대 효종·인선왕후
- 왕릉위치
-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영릉로 169-50
- 조성연대
- 1659년 왕릉, 1673년 왕릉 천릉, 1674년 왕후릉
- 왕릉형태
- 동원상하릉
능의 조성
영릉(寧陵)은 조선 제17대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의 쌍릉이다. 원래 효종의 능은 건원릉 서쪽 산줄기(원릉 자리)에 병풍석을 갖춘 왕릉으로 조성되었다. 1673년 현종 때 석물에 틈이 생겨 빗물이 스며들 염려가 있다 하여 여주의 영릉(英陵) 곁으로 옮겼다. 그 다음해 인선왕후의 능이 동원(同原)에 택정되어 왕릉 앞에 왕비릉을 써서 앞뒤로 나란히 쌍릉을 이루었다. 왕릉과 왕후릉의 상설제도는 같다. 십이지신상을 새긴 병풍석이 세조 이후 사라졌다가 한동안 다시 쓰였는데, 이 능에서 또다시 폐지되었다. 난간석을 받치고 있는 동자석주에 글씨를 새겨 방위를 표시하고 있다.
능주 소개
효종(孝宗, 1619~1659)은 조선 제17대 왕이다. 본관은 전주, 이름은 ‘호(淏)’, 자는 ‘정연(靜淵)’이다. 호는 ‘죽오(竹梧)’이다. 인조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인렬왕후(仁烈王后)이다. 비는 우의정 장유(張維)의 딸 인선왕후(仁宣王后)이다. 1619년 5월 22일 서울 경행방 향교동(鄕校洞: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3가 부근)에서 태어났다. 1626년(인조 4) 봉림대군(鳳林大君)에 봉해졌고, 1631년 12세에 장씨와 혼인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의 명으로 아우 인평대군(麟坪大君)과 함께 비빈·종실 및 남녀 양반들을 이끌고 강화도로 피난했다. 이듬해 강화가 성립되자, 형 소현세자(昭顯世子)와 척화신 등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갔다. 청나라에서 많은 고생을 겪다가 8년 만인 1645년 2월 소현세자가 먼저 돌아왔고, 효종은 청나라에 머물고 있었다. 그해 4월 세자가 갑자기 세상을 뜨자 5월에 조선으로 돌아와 9월 27일 세자로 책봉되었고, 1649년 인조가 승하하자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하였다. 효종은 조정의 배청 분위기와 함께 북벌계획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그 일환으로 청나라와 연결된 김자점(金自點) 등 친청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이완(李浣)·유혁연(柳赫然)·원두표(元斗杓) 등의 무장을 종용해 북벌을 위한 군비 확충을 본격화했다. 서울 외곽의 방위를 크게 강화하고 나선정벌 이후에는 남방은 물론 북방지대에도 정벌을 핑계로 산성을 수리하는 등 군비를 적극적으로 확충했다. 마침 조선에 표류해 온 네덜란드인 하멜(Hendrik Hamel)을 훈련도감에 들여 조총·화포 등 신무기를 개량·보수하도록 했으며, 직접 관무재 등에 자주 참가해 군사훈련 강화에 힘썼다. 효종은 두 차례에 걸친 외침으로 흐트러진 경제 질서를 다시 확립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김육(金堉)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1652년에는 충청도, 1657년에는 전라도 연해안 각 고을에 대동법을 실시해 성과를 거두었고 1653년 역법을 개정했다. 1654년 『인조실록』을, 이듬해에는 『국조보감(國朝寶鑑)』을 편찬하여 간행했다. 그리고 공주목사 신속(申洬)이 엮은 『농가집성(農家集成)』을 간행해 농업 생산량을 높이는데 기여했다. 효종은 평생을 북벌에 전념해 군비 확충에 몰두한 군주였다. 그러나 국제정세가 호전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를 뒷받침할 재정이 부족해 군비보다도 현실적인 경제재건을 주장한 대신들과 뜻이 맞지 않아 결국 북벌의 의지를 이루지 못했다. 1659년 5월 4일 41세를 일기로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했다. 시호는 ‘선문 장무 신성 현인 대왕(宣文章武神聖顯仁大王)’이다. 5월 11일 처음에는 시호를 ‘열문 의무 신성 지인(烈文毅武神聖至仁)’으로, 능호(陵號)를 ‘익릉(翼陵)’이라 하였으나, 열문·의무·지인이 모두 열성조의 휘호를 범했다 하여 다시 ‘선문 장무 신성 현인(宣文章武神聖顯仁)’으로 고치고 능호도 ‘영(寧)’으로 고쳤다. 처음에는 건원릉 서쪽 산줄기에 장지를 마련했으나 1673년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로 옮겼다. 「효종대왕 애책문」에는 “천년을 지키고 있을 상석(象石)을 설치해 놓았으니, 영원토록 온갖 혼령들을 꾸짖으며 [능을] 보호하리라[儼象設於千齡, 長護呵兮百靈]”라고 하여 영릉의 석물들이 효종의 영혼을 보호해주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다. 인선왕후(仁宣王后, 1619~1674)는 조선 제17대 왕 효종의 비이다. 본관은 덕수(德水)이며 우의정 장유(張維)의 딸이다. 어머니는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의 딸이다. 1630년(인조 8) 봉림대군(鳳林大君)의 부인으로 간택되어 다음해에 가례를 올리고 풍안부부인으로 봉해졌다. 병자호란 뒤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이 심양에 인질로 갈 때 따라가 8년이나 머물면서 많은 고초를 겪었다. 1645년 소현세자가 죽으면서 봉림대군이 세자가 되자 세자빈이 되었으나, 책봉을 제때 받지 못하여 사저에서 왕자를 낳았다. 그 뒤 책봉되어 1649년 효종이 즉위하면서 왕비가 되었고, 2년 뒤 정식으로 책명을 받았다. 1661년(현종 2) ‘효숙(孝肅)’의 존호를 받아 왕대비로 있다가 1674년 질병을 얻어 오래도록 고생하다 경덕궁 회상전에서 승하하였다. 이때 왕후의 시어머니인 인조비 장렬왕후(莊烈王后)가 어떤 복을 입느냐 하는 예송이 일어나, 기년복과 대공복을 둘러싸고 송시열(宋時烈)과 윤휴(尹鑴)가 대립하여 제2차 예송논쟁이 일어났다. 슬하에 1남 5녀를 두었으니, 현종과 숙안(淑安)·숙명(淑明)·숙휘(淑徽)·숙정(淑靜)·숙경(淑敬) 등 공주들이다. 많은 한글편지를 남겼으며, 다섯 공주에게 궁체로 쓴 언문편지가 유명하다. 승하 후 ‘경렬 명헌(敬烈明獻)’의 휘호가 올려졌다. 시호는 ‘효숙 경렬 명헌 인선 왕후(孝肅敬烈明獻仁宣王后)’이다. 승하 후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효종 능 아랫자락에 장사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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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문화유산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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