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릉
- 왕릉명
- 장릉
- 능주명
- 제16대 인조·원비 인열왕후
- 왕릉위치
-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장릉로 90
- 조성연대
- 1636년 왕후릉, 1649년 왕릉, 1731년 봉릉
- 왕릉형태
- 합장릉
능의 조성
장릉은 인조와 인열왕후릉이 합장릉으로 조성되었다. 지금의 자리로 천릉되기 전에는 장릉은 왕과 왕후릉이 나란히 배치된 쌍릉 형식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1635년 인열왕후가 먼저 승하하자 경기도 파주 북운천리에 왕후릉의 능소를 먼저 장사지내고 1649년 인조가 승하한 후 왕후의 오른쪽 자리에 안장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당초 인열왕후를 장사지낼 때부터 모든 석물 가공을 간소화하였고 뒤에 인조가 묻힐 것을 고려하여 능침 뒤의 곡장과 장명등, 석상 등의 석물, 정자각을 능침의 가운데 두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하여 인조가 승하하여 장사 지낼 때에는 약 4개월 남짓으로 공사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었다. 최초에 쌍릉으로 조성되었던 장릉은 세월이 흘러 능침에 여러 번 문제가 생기고 영조가 등극한 후 장릉에 화재가 나자 영조는 1731년 천릉할 것을 결정하였다. 새 능은 합장릉 제도를 따르되 세종 영릉을 기준으로 하기로 했으며, 석물은 병풍석과 지대석을 제외하고 대부분 옛 장릉의 것을 다시 사용하였다. 병풍석의 문양은 십이지신상과 구름문양이 연꽃과 모란으로 바뀌었다.
능주 소개
인조(仁祖, 1595~1649)는 조선 제16대 왕으로 본관은 전주, 이름은 ‘종(倧)’, 자는 ‘화백(和伯)’이다. 호는 ‘송창(松窓)’이다. 선조의 손자로, 정원군(定遠君: 추존왕 元宗)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좌찬성 구사맹(具思孟)의 딸인 인헌왕후이다. 비는 영돈녕부사 한준겸(韓浚謙)의 딸인 인렬왕후이다. 계비는 영돈녕부사 조창원(趙昌遠)의 딸인 장렬왕후이다. 1607년(선조 40) 능양도정(綾陽都正)에 봉해졌고 이어 능양군(綾陽君)에 진봉되었다. 광해군 재위 연간에는 대북파가 정권을 잡아 왕으로 하여금 영창대군를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하게 했으며, 여러 차례 옥사를 일으켜 정치가 혼란하였다. 이에 1623년 서인 김류(金瑬), 이귀(李貴), 이괄(李适) 등이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출하고 인조가 왕위에 추대되어 경운궁에서 즉위하였다. 임금의 자리에 오른 뒤 반정공신들을 중용하는 과정에서 불만을 품은 이괄이 1624년(인조 2) 난을 일으켰다. 인조는 외교정책에 있어 친명배금정책을 통해 금나라를 배척하였다. 그 결과 청의 침략을 받아 삼전도에서 항복하고 군신관계를 맺게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다소 수습된 국가 기강과 경제 상태가 두 차례의 호란으로 악화되어, 조선의 사회·경제 상황은 매우 열악해졌다. 그러나 1633년 상평청을 설치해 상평통보를 주조했고 청인과의 민간무역을 공인해 북관의 회령 및 경원개시, 압록강의 중강개시가 이뤄졌다. 1641년에는 군량 조달을 위해 납속사목을 공표했으며 납속자에 대한 서얼허통 및 속죄를 실시하여 어려워진 민생을 해결하고자 부단히 노력하였다. 인조는 외교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학문증진에 힘써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동사보편(東史補編)』, 『서연비람(書筵備覽)』 등 여러 서적을 간행토록 하였다. 또한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김육(金堉), 김집(金集) 등 뛰어난 학자가 활동하여 조선 후기 성리학의 전성기를 이룬 시기도 인조 재위연간이었다. 1649년 5월 8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였다. 5월 15일 시호를 ‘헌문 열무 명숙 순효 대왕(憲文烈武明肅純孝大王)’으로, 전호는 ‘영사(永思)’, 묘호는 처음에 ‘열조(烈祖)’로 올렸다가 ‘인조(仁祖)’로 개호하였다. 능호은 ‘장릉(長陵)’으로, 처음에는 경기도 파주 북운천리 묘좌유향(卯坐酉向) 자리에 장사지냈으나, 1731년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 즉 지금의 자리로 천릉하였다. 서화에 조예가 있어 감상하기를 즐겨했으며 창작한 작품 일부가 전해오고 있다. 인렬왕후(仁烈王后, 1594~1635)는 인조의 정비이다. 본관은 청주이고 영돈녕부사 한준겸(韓浚謙)의 딸이다. 원주읍 내우소에서 출생하였다. 1610년(광해군 2) 능양군(綾陽君: 후의 인조)과 결혼하여 청성현부인으로 봉해졌고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왕비가 되었다. 인조가 바른 정치를 할 수 있도록 옆에서 보필했다고 하며, 인조가 그림 감상을 오래하고 있으면 “바라건대 이를 보시면서 위태로움과 두려운 바를 생각하시고, 애완하는 물건으로만 여기지 말으소서”라며 조언했다고 한다. 1651년(효종 2) ‘명덕정순(明德貞順)’으로 휘호가 추상되었다. 슬하에 여섯 아들을 두었는데 효종, 소현세자(昭顯世子), 인평대군(麟坪大君), 용성대군(龍城大君), 그리고 일찍 사망한 두 아들이다. 왕후는 마지막 아들을 낳다가 산후병을 얻어 1635년 12월 9일 산실청에서 승하하였다. 인렬왕후가 승하한 후 계비를 취하라는 대신들의 종용에도 불구하고 인조는 끝까지 재취하지 않으려 했으나, 결국 장렬왕후 조씨를 계비로 맞아들였다. 시호는 ‘명덕 정순 인렬 왕후(明德貞順仁烈王后)’이고 전호는 ‘숙령(肅寧)’이라 하였다. 원래 인조 능과 쌍릉으로 조성되었으나, 1731년(영조 7) 파주시 탄현면으로 천릉되면서 합장릉을 이루었다.
왕릉탐방
장릉(長陵) 구조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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