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릉
- 왕릉명
- 효릉
- 능주명
- 제12대 인종·인성왕후
- 왕릉위치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
- 조성연대
- 1545년 왕릉, 1578년 왕후릉
- 왕릉형태
- 쌍릉
능의 조성
효릉은 경기도 고양시에 조성되었다. 인종이 승하했을 당시인 1545년에는 서삼릉 경내에 부친 중종이 잠들어 있었기 때문에 인종은 생전에 부왕의 곁에 묻히길 원했고 유명에 따라 지금의 자리로 장지가 정해졌다. 그러나 이후 정릉이 풍수가 나쁘다는 이유로 1562년 지금의 서울 삼성동으로 천릉되었고 효릉은 희릉, 예릉과 한참 떨어진 곳에 호젓하게 남게 되었다. 천릉하면서 땅에 묻혔던 정릉의 석물은 후에 철종 예릉을 건설하는데 다시 사용되었다. 1577년 인성왕후가 승하하자 이듬해 2월 1일 효종의 능 왼쪽에 부장되었다. 효릉은 왕과 왕후릉을 좌우로 나란히 배열한 쌍릉으로, 쌍릉이 많이 조성되기 시작한 16세기 후반의 경향을 가장 처음 보여주는 사례다. 두 봉분은 하나의 곡장 안에 안치되었고 왕릉은 병풍석, 왕후릉은 난간석을 둘렀다. 능과 능 사이에 난간지대석을 두어 구분하지 않고 하나의 난간석으로 연결했다. 봉분 앞에는 석상이 각각 놓여 있으며, 그 외 석물은 두 능이 공유하고 있다. 다른 지역에 조성된 쌍릉과 비교해 보았을 때 효릉은 왕후릉의 봉분이 왕릉의 봉문 규모와 유사한 것이 특징이다. 이 때문에 비록 왕후릉이지만 규모가 장대한 느낌을 준다. 석인상은 선릉이나 희릉의 석물 규모(약 2.7m)에 비해 축소되었고 세부 표현에 있어서도 과장됨이 줄어든 소박한 형식을 보여 준다. 무석인의 갑주와 무구의 형상은 희릉(1537)과 유사하며 투구의 뒷드림이 생략되었다든지 문석인의 복두 옆으로 꽃모양의 관자가 표현된 것 역시 희릉 석인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문석인의 경우 의복이 신체의 굴곡을 따라 흘러내려 볼륨감이 풍부하게 표현된 점은 임진왜란 후 정교하지만 도식적으로 조각된 석인상의 신체 표현에 비해 자연스런 느낌을 전달해 준다. 효릉의 장명등은 국초 양식을 기반으로 선릉 장명등의 비례와 문양을 따른 희릉의 영향을 받아 형태와 문양은 물론 목조건물의 공포를 사실적으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능주 소개
인종(仁宗, 1515~1545)은 조선 제12대 국왕이다. 이름은 ‘호(岵)’이고 자는 ‘천윤(天胤)’이다. 1515년 2월 25일에 태어났다. 본래 아명이 ‘억(億)’이었으나, 중종이 이름을 개명한 것이다. 중종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영돈녕부사 윤여필(尹汝弼)의 딸 장경왕후이다. 비는 첨지중추부사 박용(朴墉)의 딸 인성왕후이다. 인성왕후와의 사이에서 후사가 없자 숙빈 윤씨, 귀인 정씨를 후실로 맞았으나 역시 후사를 보지 못하였다. 1544년 11월 15일 중종이 승하하자 그해 바로 즉위하였다. 이듬해 기묘사화로 폐지된 현량과를 복구하고 기묘사화로 참화를 당한 조광조를 비롯하여 기묘명현을 신원해주는 등 어진 정책을 펼치려 노력했다. 동궁으로 있을 때는 화려한 옷을 입은 시녀를 궁 밖으로 내쫓을 만큼 검약한 생활을 하였다. 1545년(인종 1) 병환이 위독해지자 대신 윤인경(尹仁鏡)을 불러 경원대군(후의 명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같은 해 10월 15일 고양군의 치소 남쪽에 있는 부친의 능인 정릉(1562년 지금의 서울 강남구 삼성동으로 천릉) 곁 언덕에 안장하였는데 이는 유명에 의한 것이었다. 능호는 ‘효릉’이라 하고 전호는 ‘영모(永慕)’라 하고 시호는 ‘헌문 의무 장숙 흠효(獻文懿武章肅欽孝)’라 하였다. 인성왕후(仁聖王后, 1514~1577)는 조선 제12대 왕 인종의 비이다. 아버지는 금성부원군 반남 박씨 박용(朴墉)이며 어머니는 의성 김씨이다. 1514년(중종 9) 10월 1일에 태어났다. 1524년(중종 19) 박씨 나이 11세 되던 해에 인종과 혼인하여 세자빈에 책봉되었다. 1544년 11월 인종이 왕으로 즉위하고 왕비가 되었으며 이때 나이 31세였다. 인종의 재위기간은 불과 9개월이었으며 인성왕후는 인종 승하 후 32년간을 자녀 없이 홀로 살다가 1577년(선조 10) 11월 29일 경복궁에서 64세로 승하하였다. 능은 이듬해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의 서삼릉 묘역에 효종 능과 쌍분으로 조성되었다. 조선 전기 많은 왕실 여인들이 그러했듯이, 인성왕후 또한 독실한 불교신자였기에 승하한 인종의 명복을 빌기 위해 1550년(명종 5) 「도갑사 관음32응신도(道岬寺觀音三十二應身圖)」를 발원하였다. 이 불화는 화승이 아닌 화원 이자실(李自實)이 주도하여 그린 것으로, 정교한 산수화가 강조된 구도와 화려한 색채로 인해 16세기 왕실발원 불화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왕릉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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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문화유산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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