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릉
- 왕릉명
- 태릉
- 능주명
- 제11대 중종 2계비 문정왕후
- 왕릉위치
- 서울특별시 노원구 화랑로 727
- 조성연대
- 1565년
- 왕릉형태
- 단릉
능의 조성
태릉은 단릉으로 조성되었다. 1565년 4월 6일 문정왕후가 승하한 뒤 6일 후 시호와 전호, 능호가 정해졌다. 왕후는 생전에 지금의 서삼릉에 있던 중종의 능인 정릉(靖陵)을 보우가 주지로 있던 봉은사 곁으로 천장하고 자신도 그 곁에 묻히고자 했으나 정릉이 지대가 낮아 장마철에 물이 들어차는 바람에 중종의 곁에 묻히고자 했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명종은 모후의 시호를 문정으로 하고, 능호를 신정릉(新靖陵)이라 했다가 태릉으로 고쳤다. 태릉은 선정릉, 희릉과 더불어 15세기 말~16세기 중반 왕릉 형식을 잘 계승한 능이다. 특히 석물의 규모는 앞선 능에 비해 월등히 커서 문무석인은 거의 4미터에 가까운 육중한 크기로 제작되었다. 규모가 크다 보니 자연스런 인체 굴곡은 사라지고 도식화가 심화되어 얼굴과 몸의 비율이 1:3 정도로 머리가 커진 양상을 보여준다. 이러한 태릉의 장대한 석물 모습은 난간석과 석수 등에서도 동일하게 찾아 볼 수 있다. 봉분에는 구름무늬와 십이지신상을 새긴 12면의 병풍석과 12칸의 난간석을 둘렀다. 정자각은 6.25때 멸실된 것을 1994년 복원한 것인데,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전이 있고, 배전을 받치는 기둥 하부에는 주초석에서 70cm 높이까지 백분칠이 되어 있다. 태릉은 임진왜란 동안 도굴 위험이 있었으나, 회격이 매우 단단하여 왜적들이 깨뜨리지 못했다고 한다.
능주 소개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는 중종의 제2계비로 명종의 어머니이다. 본관은 파평이다. 아버지는 영돈녕부사 윤지임(尹之任)이다. 1517년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1545년 명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8년간 수렴청정을 하면서 인종의 외척인 대윤 윤임(尹任) 일파를 제거하기 위하여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명종의 즉위와 더불어 문정왕후는 정치에 공식적으로 참여하여 조계, 경연, 면대 등을 통해 고위관료들과 협조하여 정계와 인심의 동향을 파악하였고, 내관·내수사나 혈족을 이용하여 숭불정책, 왕실재정의 확보처럼 사적인 정책을 추진하는데 유리하게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문정왕후의 측근 세력을 이용한 정치적 영향력 행사는 결국 정국운영의 투명성을 요구하는 사림파들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문정왕후의 생애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권력에 있으면서 불교의 중흥을 도모했다는 점이다. 그녀는 조선 전반기 숭유 억불 정책에도 불구하고 왕실에서 불교가 지속되는 데 가장 큰 힘을 보탠 후원자였다. 1550년 선교 양종을 부활시키고 승과·도첩제를 다시 실시하였으며 승려 보우(普雨)를 신임하여 그를 선정릉의 조포사였던 봉은사의 주지로 임명하였다. 또한 조선 최대의 사찰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경기도 양주의 회암사에 불화 400점을 그려 봉안하게 하는 등, 독실한 불심으로 인해 조선 중기 왕실 발원 불화를 비롯하여 많은 불교문화유산이 조성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회암사에 봉안되었던 문정왕후 발원 불화는 대부분 소실되었지만 국내외에 일부가 남아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1565년 승하하니 슬하에 명종을 비롯하여 의혜공주(懿惠公主), 효순공주(孝順公主), 경현공주(敬顯公主), 인순공주(仁順公主) 등 1남 4녀를 두었다. 시호는 ‘성렬 인명 문정 왕후(成烈仁明文定王后)’이고, 능호는 ‘태릉(泰陵)’으로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있다.
왕릉탐방
태릉(泰陵) 구조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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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문화유산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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