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릉
- 왕릉명
- 정릉
- 능주명
- 제11대 중종
- 왕릉위치
-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131
- 조성연대
- 1545년 조성, 1562년 천릉
- 왕릉형태
- 단릉
능의 조성
정릉은 선릉과 가까운 능역에 단릉으로 조성되었다. 중종은 단경왕후, 장경왕후, 문정왕후 3명의 비를 두었지만,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어느 누구하고도 합장릉을 이루지 못하였다. 중종이 승하했을 당시인 1545년 2월 3일에는 경기도 고양에 있는 장경왕후의 희릉 오른쪽에 묻혔고 능호도 장경왕후 윤씨의 능호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이는 중종이 생전에 희릉 옆에 묻히기를 원했을 뿐 아니라 장경왕후의 소생인 인종이 보위를 이어받았으므로 중종을 희릉 곁에 모시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후 1545년 윤1월 22일 능호를 정릉으로 바꾸고 15년이 지난 1562년 9월 4일 지금의 자리로 천장하게 되었다. 천릉하기 전 산릉도감에서 명종에게 능호는 정릉이라는 호칭은 그대로 하되, 왕후의 능은 다시 희릉(禧陵)이라고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아뢰자, 그대로 시행되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정릉 또한 선릉과 마찬가지로 왜적의 침입을 피할 수 없었다. 정릉이 선릉과 인접해 있었으므로 접근하기가 쉬워 함께 도굴되었던 것이다. 끝내 시신을 찾지 못하자 1593년 8월 15일 중종의 의복만 묻고 다시 능을 조성하였다. 정릉은 조선 초기에서 중기로 넘어 가는 형식을 잘 보여주는 능이다. 특히 문무석인으로 대표되는 석인은 아담하면서도 평면적인 선을 구사했던 15세기의 석물조각과 달리 규모가 거의 3미터에 가깝게 육중해졌을 뿐 아니라 조각선이 굵고 신체의 부분 부분에 과장된 표현이 보인다.
능주 소개
중종(中宗, 1488~1544)은 조선 제11대 왕이다. 본관은 전주이며 이름은 ‘역(懌)’, 자는 ‘낙천(樂天)’이다. 성종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정현왕후 윤씨이다. 원비는 좌의정 신수근(愼守勤)의 딸 단경왕후이다. 제1계비는 영돈녕부사 윤여필(尹汝弼)의 딸 장경왕후(章敬王后)이며, 제2계비는 영돈녕부사 윤지임(尹之任)의 딸 문정왕후(文定王后)이다. 1494년 진성대군(晉城大君)에 봉해졌고 1506년 9월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등이 반정(反正)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위시킨 뒤 왕으로 추대되었다. 문벌세가를 누르고 새로운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연산군 때의 여러 가지 폐정을 개혁하기 위해 홍문관을 강화하고 유교적 도덕규범인 향약을 전국적으로 실시하였다. 또한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유능한 신진사류를 등용하여 훈구파를 견제하고자 하였으나, 이들의 지나친 개혁정치는 기존 세력의 반발을 가져와 조광조 일파를 숙청한 기묘사화 등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사회면에서는 유교주의 도덕윤리가 정착되어감에 따라 『소학』, 『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1514년),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1533년) 등을 간행해 국민 교화에 힘썼다. 1541년에는 백운동서원을 세운 주세붕(周世鵬)을 풍기군수에 제수하였고 중국 사신을 맞이하기 위한 영은문을 세우는 등 유교주의적 도덕윤리를 정착시켜 나갔다. 1516년에는 주자도감을 설치해 많은 구리활자를 주조하여 인쇄술 발달에 기여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당시 사회에 긴요하게 요청되던 각종 서책의 편찬이 활발해져 『사성통해(四聲通解)』, 『속동문선(續東文選)』,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이 간행되었다. 국정운영을 위한 기틀 마련에도 힘써 『경국대전(經國大典)』, 『대전속록(大典續錄)』 등을 편찬하였고 1540년에는 역대 실록을 등사해 사고에 비치하였다. 또한 1542년 근정청을 설치해 『대전속록』 이후 새로 반포된 법령을 모아 1544년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을 완성, 반포해 법률제도의 확립에 공헌하였다. 이처럼 중중연간은 조선 중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시점으로, 신진사림과 훈구파의 대립이라는 정치적인 모순이 드러나기도 했지만, 사회·문화적으로 제도가 완비되고 조선 성리학의 기틀이 정착되어 가던 중요한 시기이기도 했다. 1544년 11월 15일 세자인 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15일 창경궁의 환경전에서 재위 39년 만에 승하하였다. 1545년 1월 5일 시호는 ‘공희 휘문 소무 흠인 성효 대왕(恭僖徽文昭武欽仁誠孝大王)’으로, 능호를 ‘희(禧)’로, 전호는 ‘영경(永慶)’으로 정하였다. 묘호는 본래 ‘중종(中宗)’으로 정하였으나, 1월 6일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반정을 일으킨 공을 인정하여 다시 ‘중조(中祖)’로 고칠 것을 논의하였고 결국 성종을 계승했다는 의미에 비중을 두어 고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본래 제1계비인 장경왕후 희릉 오른쪽 언덕에 장사지냈으나, 1562년 제2계비 문정왕후에 의해 지금의 자리로 천릉되었다.
왕릉탐방
정릉(靖陵) 구조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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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문화유산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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