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릉
- 왕릉명
- 순릉
- 능주명
- 제9대 성종 원비 공혜왕후
- 왕릉위치
-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삼릉로 89
- 조성연대
- 1474년
- 왕릉형태
- 단릉
능의 조성
순릉은 단릉으로 조성되었다. 1474년 4월 15일 공혜왕후가 구현전에서 승하하자, 4월 22일 성종은 예조에 명하여 공릉 부근에 자리를 잡도록 하였다. 이후 중종과 선조 재위연간을 거치며 순릉은 역대 왕들의 관심 속에 큰 변고 없이 보호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인조 26년인 1648년 3월 혼유석, 정자각, 월랑의 일부가 파손되고 문무석인의 코끝이 깨져나간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는 1645년 소현세자 및 세자빈 강씨의 죽음[강빈의 옥사]과 연관된 항의 표시로 보였으나, 결국 관련자는 색출하지 못하고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인조는 즉시 능을 수리할 것을 명하였고 석수 20명, 야장 2명을 동원해 이를 개수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원래 순릉의 석물이 다른 석물보다 더 커서 조금 깎아내려도 큰 무리가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순릉의 문무석인과 석마 등은 본래의 형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대신 규모가 작아진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재 순릉의 능상은 상·중·하계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계에 곡장과 봉분, 석양, 석호, 망주석, 석상을 두었고, 중계에는 장명등, 문석인 1쌍과 석마 1쌍, 하계에는 무석인 1쌍과 석마 1쌍을 각각 배치하였다. 순릉은 성종의 선릉에 비해 20여 년이 앞서 조성된 능으로, 여러모로 건원릉 양식을 많이 계승했음을 보여준다. 먼저 하계의 좌우에는 계단석을 설치했는데, 이는 건원릉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무석인이 홀을 든 손을 노출시키지 않고 한 쪽 소매단을 치켜들어 다른 한 손을 가려 ‘人’자형을 이룬 모습 또한 건원릉의 문석인 공복형태와 유사하다. 석호와 석양 역시 다리 가운데를 뚫고 앞뒤 다리 사이를 막은 형식 또한 건원릉의 석수 조각 표현과 상통하다. 이러한 사실은 순릉이 건원릉으로 대표되는 조선 초기 석물양식을 계승했음을 잘 보여준다.
능주 소개
공혜왕후(恭惠王后, 1456~1474)는 조선 제9대 왕 성종의 원비이다. 본관은 청주이고 영의정 한명회(韓明澮)의 딸이다. 어머니는 한성부윤 민대생(閔大生)의 딸이며, 언니는 예종 비 장순왕후이다. 1456년 10월 11일에 탄생하여 1467년에 가례를 올렸으며, 1469년 성종이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평소 불심이 깊어 국왕과 나라의 평안을 위해 왕실 발원 경전과 불화 조성의 시주자로 참여하였다. 1473년 병환을 얻어 부친 한명회의 집에서 치료를 받고 궁으로 돌아왔으나, 같은 해 12월 재발하여 1474년 4월 15일 소생 없이 19세 나이로 창덕궁 구현전에서 운명하였다. 6월 7일에 파주의 공릉 남쪽 산등성이의 서향 언덕에 장사지냈다. 혼전은 소경전에 마련하였다. 4월 19일 ‘공혜(恭惠)’라는 시호가 추증되었고, 그 뒤 1498년 ‘휘의 신숙(徽懿愼肅)’이라는 휘호가 올려졌다. 시호는 ‘휘의 신숙 공혜 왕후(徽懿愼肅恭惠王后)’이고, 능호는 ‘순릉(順陵)’이며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봉일천리에 있다.
왕릉탐방
순릉(順陵) 구조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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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문화유산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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