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릉
- 왕릉명
- 창릉
- 능주명
- 제8대 예종·계비 안순왕후
- 왕릉위치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92
- 조성연대
- 1470년 왕릉, 1499년 왕후릉
- 왕릉형태
- 동원이강릉
능의 조성
창릉은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의 서오릉 영역 내 왕릉으로 조성된 첫 번째 능이다. 1469년 11월 28일 예종이 승하하자 능호를 창릉이라고 하여 현재의 자리에 조영하였다. 창릉은 서쪽과 동쪽에 각각 예종과 안순왕후의 능이 자리하고 있는 동원이강형(同原異岡形) 구조를 이룬다. 상설된 석물과 건물은 『국조오례의』에 따라 조성되었다. 창릉이 위치한 입지는 당시 풍수상 좋지 않은 자리로 언급되었으나 세조가 승하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연이어 예종까지 젊은 나이에 요절함에 따른 당시의 다급했던 분위기가 반영되었다. 이처럼 창릉의 조성은 세조의 광릉 조성 이후 얼마 안 되는 시기에 이루어져, 재정 부족 등 여러 이유로 각종 도감의 운영을 축소시켜 진행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후 1498년(연산군 4) 12월 23일 안순왕후가 승하하여 이듬해 2월 14일 창릉에 안장되었으며, 동원이강릉으로 조성되었다. 능호는 별칭하지 않고, 양릉에 각각 가정자각을 설치하여 구릉(예종 능)의 제사에는 길례로, 신릉(안순왕후 능)의 제사에는 흉례로 하다가 3년 후에 합제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봉분 주위에 병풍석을 두르지 않았고 난간석만 설치하였다. 석물 배치는 일반 왕릉과 같고, 예종릉의 고석에 나어두문이 아닌 문 고리모양만 새긴 것과 난간석주의 주두가 둥근 형태에 고리형 받침으로 된 것이 특이하다.
능주 소개
예종(睿宗, 1450~1469)은 세조와 정희왕후의 둘째 아들로 휘(諱)는 ‘황(晄)’, 초자는 ‘평보(平甫)’, 자는 ‘명조(明照)’이다. 비는 영의정 한명회(韓明澮)의 딸 장순왕후이며, 계비는 우의정 한백륜(韓伯倫)의 딸 안순왕후이다. ‘해양 대군(海陽大君)’에 봉해졌다가, 1457년(세조 3) 9월 의경세자가 죽자 뒤를 이어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1468년 9월 7일 세조의 뒤를 이어 왕위를 이어받았다. 그리고 당시 소훈이었던 청천부원군 한백륜(韓伯倫)의 딸 한씨를 계비로 삼았다. 모친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한명회, 신숙주 등의 중신이 섭정하는 원상제도를 실시하였다. 13개월의 짧은 재위기간 동안, 직전수조법을 실시하여 둔전을 백성이 경작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19세로 승하하여 1470년 2월 고양현 치소의 동쪽 봉현(蜂峴) 언덕에 장사하였다. 시호는 ‘흠문 성무 의인 소효(欽文聖武懿仁昭孝)’, 묘호는 ‘예종(睿宗)’, 혼전(魂殿)은 ‘경안(景安)’, 능은 ‘창릉(昌陵)’이라고 하였다. 안순왕후(安順王后, 1445~1498) 한씨는 예종의 계비이다. 청천부원군 한백륜(韓伯倫)과 서하부부인 임씨의 딸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청주이다. 1462년 동궁의 종5품 후궁인 소훈에 간택되어 당시 세자였던 예종과 가례를 올렸다. 1468년에 예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1471년에 ‘인혜 왕대비(仁惠王大妃)’로 봉해졌다. 1497년(연산 3)에는 인수대왕대비와 함께 휘호를 받아 ‘명의 대왕대비(明懿大王大妃)’가 되었다. 소생은 제안대군(齊安大君)과 현숙공주(顯肅公主)이다. 1498년(연산 4) 음력 12월 23일 창경궁에서 승하하였다. 시호를 ‘안순(安順)’, 휘호를 ‘소휘 제숙(昭徽齊淑)’으로 하였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서오릉 내에 위치한 창릉(昌陵)으로, 예종과 함께 모셔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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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문화유산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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