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 화엄사 화엄석경(求禮 華嚴寺 華嚴石經)
- 시대
- 통일신라
- 연대
- 790~935년, 하대(下代 :37대 선덕왕∼56대 경순왕)
- 유형
- 석각
- 크기
- 너비 3.1~34.0 두께 2.7~6.4 글자크기 1.5
- 소재지
-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화엄사로 539 화엄사
- 서체
- 해서(楷書)
- 찬자 /각자 /서자
- 미상 / 미상 / 미상
- 지정사항
- 보물
- 연구정보
개관
석경(石經)이란 경전(經典)의 원문(原文)을 석판(石板)에 새긴 것으로 우리나라에는 구례(求禮) 화엄사(華嚴寺)의 화엄석경잔편(華嚴石經殘片)과 경주(慶州) 창림사지(昌林寺址)부근에서 출토(出土)된 법화석경(法華石經) 등이 있다. 화엄석경(華嚴石經)은 통일신라(統一新羅) 문무왕대(文武王代) 의상대사(義湘大師)(625∼702)가 화엄십찰(華嚴十刹)을 불교전교(佛敎傳敎)의 도량(道場)으로 삼으면서 왕명(王命)을 받아 화엄사(華嚴寺)에 장육전(丈六殿)(현(現) 각황전(覺皇殿))을 건립(建立)하고 후불벽(後佛壁)을 판석(版石)에 화엄경(華嚴經)을 새긴 석판(石板)으로 둘렀다고 전해지는 유물(遺物)들이다.(『구례읍지(求禮邑誌)』『봉성지(鳳城誌)』: “文武王時 國師義湘承王命以石板刻華嚴經八十卷留于本寺”) 각황전의 안쪽 벽에는 현재 그림이 걸려 있으나, 원래는 여기에 화엄석경이 벽을 이루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석경에는 네모진 돌들을 서로 맞추어 끼웠던 듯 모서리에 연결을 위한 홈이 파여져 있다. 이들 석경(石經)의 자체(字體)는 해서체(楷書體)로 최치원(崔致遠)의 사산비(四山碑) 중 하동(河東) 쌍계사(雙磎寺) 진감국사비문(眞鑑國師碑文)과 닮았으며 3∼4종류의 자체(字體)가 나타나고 있다. 또한 석경(石經)에 사용(使用)된 석재(石材)도 청석(靑石) 계통을 포함하여 3∼4종류에 이르고 있다. 기록(記錄)에 의하면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왜군(倭軍)이 각황전(覺皇殿)을 방화(放火)할 때 석경(石經)들이 파괴(破壞)되었다고 하며 색깔도 화재(火災)로 변색된 듯 회갈색(灰褐色) ·대홍색(帶紅色) ·암회색(暗灰色)으로 작은 파편의 석경은 문자(文字)가 5∼10여 자, 큰 것은 100여 자 이상 남아 있는 것도 있다. 전설(傳說)로는 신라명필(新羅名筆) 김생(金生)(711∼791)이 쓴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실년대(實年代)는 신라하대(新羅下代)로 추정된다. 이 화엄석경은 우리나라 화엄종 사찰의 상징적 유물로서 비록 파편이기는 하나 신라 후기의 불교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판독문/해석문
판독문 | 조선금석총람 | ||
판독문 | 김영태 |
참고문헌
단행본 | 1992 | 金煐泰, 1992, 『三國新羅時代佛敎金石文考證』, 民族社 |
논문 | 1965 | 鄭明鎬·申榮勳, 1965, 「華嚴石經 調査整理 略報」『考古美術』62 |
논문 | 1935 | 葛城末治, 1935, 「求禮華嚴寺石壁華嚴經」『朝鮮金石攷』 |
단행본 | 1916 | 朝鮮總督府, 1916, 『朝鮮古蹟圖譜』4 |
단행본 | 1915 | 朝鮮總督府, 1915, 『朝鮮金石總覽』上 |
논문 | 1915 | 稻田春水, 1915, 「全羅南道智異山華嚴寺華嚴石壁經に就て」『朝鮮及滿洲』1915년 9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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