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扶餘 陵山里寺址 石造舍利龕)
- 시대
- 백제
- 연대
- 567년(위덕왕 13)
- 유형
- 함명·향완명
- 크기
- 가로 50cm, 세로 50cm, 높이 74.0cm
- 소재지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 5 국립부여박물관
- 서체
- 예서(隸書)
- 찬자 /각자 /서자
- 미상 / 미상 / 미상
- 지정사항
- 국보
- 연구정보
개관
부여 능산리사지(扶餘陵山里寺址 : 사적 434호)는 백제 사비시대의 사찰유적으로, 부여 나성(羅城)과 능산리고분군 사이에 있는 능뫼골 계곡에 위치하고 있다. 능산리사지에 대한 발굴조사는 백제문화권개발계획의 일환으로 국립부여박물관에 의해 1992년부터 2002년까지 8차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 중문(中門), 목탑(木塔), 금당(金堂), 강당(講堂)이 남북 일직선상에 놓이고 주위에 회랑(回廊)이 배치된 일탑일금당(一塔一金堂)의 전형적인 백제 가람형식임이 밝혀졌다. 또한 동서회랑의 바깥쪽에는 각각 남북방향의 배수로(排水路)가 설치되어 있는데, 서회랑 외곽의 배수로에는 목교(木橋) 및 석교(石橋)가, 동회랑 외곽의 배수로에는 석교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외에도 중문지 남쪽에서는 동서·남북방향의 도로유구와 배수시설이 확인되었다.한편 1993년에는 공방(工房)으로 추정되는 건물지에서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 : 국보 287호)가 출토되었다. 또한 목탑지의 심초석(心礎石) 위에서 출토된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百濟昌王銘石造舍利龕 : 국보 288호)에는 창왕 13년(567)에 공주(公主)가 사리를 공양(供養)했다는 명문기록이 확인됨에 따라 이 절이 백제왕실의 기원사찰(祈願寺刹)임이 밝혀졌다.사리감이 출토된 목탑지의 기단규모는 동서 11.79m이며, 그 중심부의 108X133cm의 범위에 깊이 114cm 정도로 묻혀 있었다. 출토된 사리감은 가로, 세로 각각 50cm, 높이 74cm의 크기이며, 밑면이 비교적 납작하고 윗면이 둥근 아치형이다. 정면 중앙에 역시 아치형의 사리장엄을 넣을 수 있는 감실이 파여져 있다.앞면의 감실 양쪽에는 각각 10자씩의 글씨가 음각(陰刻)되어 있는데 예서풍(隸書風)이 강한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의 서체로 공주(公州) 무녕왕릉(武寧王陵) 지석(誌石)의 서체와 비슷하다. 아랫줄 4번째의 “*”자(字)는 북위(北魏)에서만 사용하였던 별자(別子)로서 백제(百濟)와 북위(北魏)와의 밀접한 교류를 시사하는 바가 크다. 명문(銘文)의 내용은, 이 사리감은 성왕(聖王)의 아들로 554년 왕위에 오른 창왕(昌王)[위덕왕(威德王)]에 의해 567년 만들어졌으며, 성왕(聖王)의 따님이자 창왕(昌王)의 여자 형제인 공주가 사리를 공양하였다는 내용이다.
관련 금석문
판독문/해석문
해석문 | 국립문화유산연구원 | ||
판독문 | 김창호 | ||
판독문 | 신광섭 |
참고문헌
단행본 | 1999 | 국립중앙박물관, 1999, 『百濟』(특별전) |
논문 | 1998 | 金昌鎬, 1998, 「百濟昌王銘石造舍利龕의 출토 의의」『佛敎史硏究』2, 中央僧伽大學校 佛敎史學硏究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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