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복야(朴僕射) 묘지(墓誌) 및 서문
조산대부 시예부상서 지제고(朝散大夫 試礼部尙書 知制誥)이고 자금어대[紫金袋]를 하사받은 김자의(金子儀)가 지음.
족인(族人)인 장생승(掌牲丞) 박순고(朴純古)씨가 와서 나에게 알리며 말하였다. “우리 아버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청하건대 생애를 글로 적어 전하여 사라지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내가 듣고, 안타까움을 이기지 못하였다.
공은 곧 신라(新羅) 때의 조산대부(朝散大夫) 왕식(王式)공의 7대 후손이다. 공은 사람됨이 강정(剛正)하고 충량(忠亮)하였으며, 부모에게는 효도하고, 종족(宗族)과 인친들[姻黨]에게는 미더움을 주었다. 또한 재산을 키우지 않았고, 일찍이 속된 사람들과는 사귀지도 않았다.
15세가 되자 서울[京師]로 가다가 길에서 도적을 만나 돌아왔으나, 곧 또 고향을 떠나고자 하였다. 부모님과 족당(族黨)들이 굳게 만류하였지만 의지를 꺾지 않고 공부를 하여, 마침내 서울로 들어와 문헌공도(文憲公徒)
1의 성명재(誠明齋)
2에 속하게 되었는데, 여러모로 능력을 얻고자하여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부지런하게 공부하였다.
20세(숙종 9, 1104)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자
3 이에 선생과 어른들이 거동을 함께 하였다. 30세(예종 9, 1114)에 과거[天場]에 응시하여 진사(進士)에 합격하였다.
4 지방을 다스리러 나가게 되자 절의를 지키고 나라일에 힘쓰니 그 다스림의 명성이 안팎에 크게 떨쳤다. 병마사(兵馬使)인 어사중승(御史中丞) 이영(李永)공 등이 모두 칭찬하며 “비록 옛 현인이라 할지라도 어찌 더할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을묘년(인종 13, 1135)에 서경(西京)이 반란을 일으키자
5 공이 군량을 마련하여 종군하였는데 털끝만한 ▨도 없었다. 갑자기 하루는 (적이) 도전해오자 장수와 군졸이 모두 퇴각하였으나, 공이 홀로 10여 명을 거느리고 적을 막아내니 적이 이에 물러갔다. 오군(五軍)이 모두 칭찬하였으며, 곧 원수가 ▨ 표창하였다.
병진년(인종 14, 1136 )에 우정언 지제고(右正言 知制誥)가 되어, 이에 아홉 가지의 일로 글을 올리니 모두 외가(外家)와 환관(宦官) 등이 폐단을 일으킨 일에 관한 것이었다. 그 말과 글이 매우 간절하였으므로 식자(識者)들이 모두 손으로 이마를 가리면서 공을 바라보고 말하였다. “삼한(三韓)을 다시 바로 잡을 이는 반드시 공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전성(殿省)으로 쫓겨났다가 얼마 뒤 서경유수판관 차상서예부원외랑(西京留守判官 借尙書礼部員外郞)으로 옮겼다. 이 해에 나주목부사 차낭중(羅州牧副使 借郎中)이 되고 자금어대[紫金魚]를 하사받았다.
기미년(인종 17, 1139)에 시어사(侍御史)가 되었는데, 또 외척의 일을 논하다가 상서형부원외랑(尙書刑部員外郞)으로 폄직되었다. 신유년(인종 19, 1141)에 충청도안찰사(忠淸道按察使)가 되어 간사한 무리[奸雄]를 억누르고 뇌물을 근절시키니 온갖 일이 맑고 깨끗해졌으며, 도적이 모두 소탕되니 온 고을이 편안하게 되었다. 이로써 검교예부상서(檢校礼部尙書)가 더해졌다. 계해년(인종 21, 1143)에 다시 춘로찰방사(春路察訪使)가 되자, 승냥이와 이리 같이 악한 무리들이 권력을 차지하여 남몰래 나쁜 짓을 하는 것을 ▨개탄하여 밤새도록 잠자지 않았다. (이에) 권세 있는 집안의 심부름꾼들이 ▨하지 않고 옷깃을 여미고 바로잡으며 놀라 사방으로 달아났으니, 하물며 주현(州縣)의 교활한 향리들은 어떠하였겠는가. 명을 받고 돌아와 편전(便殿)을 대하고 서서 허리띠를 늘어뜨리고 홀(笏)을 바로 잡았는데 그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고 임금의 뜻에 부합되니, 가히 사직(社稷)을 지키는 신하라고 할 수 있다.
정묘년(의종 1, 1147)에 서경감군좌사(西京監軍坐使)가 되었는데 군사와 백성들이 감히 올려다보지 못하니, 이에 명령이 모두 엄숙하게 바로 잡아졌다. 무진년(의종 2, 1148)에 급사중 충사
<뒷면>
관수찬(給事中 充史舘修撰)에 올랐으나 또 외척과 환관과 산승(山僧)에게 직첩(職牒)을 내린 일을 극언하니, 헤아리지 못할 ▨을 기다리게 되었으나 임금의 밝은 총명에 힘입어 죄가 더해지지는 않았다. 이 해에 문득 한 승려에게 대선사(大禪師)직을 주니 조정이 모두 가(可)하지 않다고 하였는데, 임금이 공을 불러 임명장[朝謝]를 ▨(〔읽을 것을〕) 독촉하였다. 공이 우뚝하게 ▨ 서서 말하기를, “신이 중서(中書)에 있을 때에 조칙을 받들지 않을 것을 맹세하였습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꾸밈이 없고 다른 마음이 없다고 하였다. 공이 가끔 말하는 것이 이와 같았으므로, 병부시랑 충사관수찬(兵部侍郞 充史舘修撰)으로 폄직되었다. 기사년(의종 3, 1149)에 동북면 병마부사(東北面 兵馬副使)가 되었는데, 섬돌 밑에서 말하기를 “친히 성지(聖旨)를 받드니 그 심오한 뜻이 분명합니다”.
다녀와 이부시랑 어서검토관(吏部侍郞 御書檢討官)으로 관직이 바뀌었으며, 경오년(의종 4, 1150)에 조산대부 시위위경 지도성사(朝散大夫 試衛尉卿 知都省事)가 더해졌다. 8월[仲秋]에 병이 들자 이듬해 ▨(〔解職〕)하기를 원하여 태복경 지공부사(太僕卿 知工部事)로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하였다. 10월 경오일 집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67세이다.
공은 밀성(密城)
6 사람이다. 아버지는 수(壽)이고, 조부는 집충(執忠)이며, 증조부는 응걸(膺傑)이며, 외조부는 정민(正民)인데 모두 호장(戶長)이다. 어머니는 밀성군군 박씨(密城郡君 朴氏)인데, 꿈에 자주빛 기운이 하늘을 찌르는 것을 보고 이에 잉태하여 공을 낳았다. 공이 돌아가실 때에도 그에 앞서 늙은 여종이 또 꿈을 꾸었는데 달이 뜨락 가운데로 떨어졌다. (생애의) 처음과 끝에 모두 상서가 있었으니, 아, 가히 신선이 속세 가운데로 와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겠는가.
전의현대군(全義縣大君)과 결혼하였는데,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 유원서(兪元胥)공의 딸이다. 아내의 일을 잘하고, 남편을 섬기며, 친척들에게도 고르게 하였다. 3남 2녀를 낳았다. 장남 순고(純古)는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 고조기(高兆基)공의 딸과 결혼하여 2남3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2남은 위위주부동정(衛尉注簿同正) 순정(純正)인데 시예부상서 지제고(試礼部尙書 知制誥) 김자의(金子儀)공의 딸과 결혼하였다. 3남은 양온승동정(良醞丞同正) 순수(純守)인데 기거주 지제고(起居注 知制誥) 이원응(李元膺)공의 딸과 결혼하여 딸 하나를 낳았는데 매우 어리다. 장녀는 영릉직(榮陵直) 손장경(孫景章)군에게 시집가서 1남 1녀를 낳았고, 2녀는 전중내급사동정(殿中內給事同正) 박인진(朴仁進)군과 결혼하여 1남 2녀를 낳았다.
천덕(天德)
7 4년(의종 6, 1152) 8월 계해일이 초하루인 28일 경인일에 여러 아들들이 공의 장례를 치르면서, 단주(湍州)
8 습전곡(濕田谷::TEXT) 북쪽 기슭에 매장하였다.
명(銘)하여 이른다.
아, 공의 뜻은 사람들이 뺏을 수 없고
아, 공의 의로움은 세상에서 가히 뛰어났으나
아깝도다.
하늘이 준 재능이 범상하지 않아 그것을 지키며 홀로 행하였으니
명성이 널리 퍼지고, 풍모도 당당하다.
안팎의 일을 맡으면서 바르게 하고 굽히지 않으니
모든 관리와 백성들과 이적(夷狄)에 이르기까지 ▨놀라 두려워하고
무서워 발을 떨며 복종하며 감화하였네.
지어낸 문장은 고금에 빛을 발휘하도다.
총명하신 인종(仁宗)과 지혜롭고 용감하신 지금 임금<毅宗>께서 바야흐로 크게 등용하려 하였으니
임금의 뜻이 넓고 깊으나, 수(壽)를 내려주지 않아 갑자기 황천(黃泉)으로 들어갔도다.
공이 가시니 하늘만 푸르고 푸르며
공이 오시니 바람만 쓸쓸히 부는데
한 점 무덤[靈臺]에는 단청(丹靑)만이 아득하도다.
〔출전:『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