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장경공(柳 章景公) 묘지명
광정대부 도첨의찬성사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 판판도사사(匡靖大夫 都僉議贊成事 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事 上護軍 判版圖司事)로 벼슬을 물러나 은퇴한 유공(柳公) 묘지명
칙수 장사랑 광정대부 검교도첨의참리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 안산군(勅授 將仕郎 匡靖大夫 檢校都僉議叅理 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事 上護軍 安山君) 안진(安震)이 짓다
공의 이름은 돈(墩)이고, 자는 백구(伯丘)이며, 성은 유씨(柳氏)인데, 첫 이름은 인화(仁和)이다. 문화현(文化縣)
1 사람이다. 그 선조인 차달(車達)은 태조(太祖) 대의 공신이다. (차달이) 아직 벼슬하지 않았을 때, 그 현(縣)을 지나가는데 큰 호랑이가 으르렁대며 길 한가운데에 엎드려 있었다. 소리를 들어보니 병이 들었음을 알고, 엄지손가락을 입에 넣어 목구멍 안에 걸려 있는 것을 뽑아내었는데 바로 은비녀였다. 호랑이는 껑충 뛰어 오르며 사라졌다. 그 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신이 와서 말하였다. “나는 구월산(九月山)의 주인이오. 어제 저녁부터 목이 아파 고생하였는데 다행히 공의 도움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9대에 평장사(平章事)가 나게 하여 주겠소.”
공은 13세에 문음(門廕)으로 동대비원녹사(東大悲院錄事)에 임명되고, 19세에 권지도병마녹사(權知都兵馬錄事)가 되었다. 식목도감녹사(式目都監錄事)로 옮겨서 국론(國論)을 맡았는데 공평하고 바르며 속이지 않았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재상감이라고 일컬었다. 경자년(충렬왕 26, 1300 )에 과거에 오르고
2, 비서교서랑(秘書校書郎)으로 옮겼다가 경상도(慶尙道)의 염세(塩稅)를 감독하러 나갔다. 복주(福州)
3에 들어가니 안렴사(按廉使)가 먼저 관(館)에 있으면서 공을 맞았는데 예를 갖추지 않으므로, 공은 노하여 별관(別館)으로 돌아갔다. 안렴사의 영리(營吏)를 불러 꾸짖어 말하기를 “네 사또의 관직이 얼마나 높기에 무례함이 이와 같은가. 무릇 선비가 누이를 팔지 않고 높은 관직을 얻었다면 어찌 (예절에) 모자람이 있을 것인가”라고 하고, 그 영리를 수십 대 매질[笞]하였다. 대개 그 안렴사의 누이가 총애를 얻음으로써 갑자기 4품에 올랐으므로, 이를 듣고 매우 부끄러워하였다.
세 차례 옮겨서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가 되고, 일곱 차례 옮겨서 선부의랑(選部議郎)에 이르렀다. 밀직사 좌부대언(密直司 左副代言)과 성균제주(成均祭酒)에 제수되고,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와 언부전서(讞部典書)로 옮겼는데 모두 대언(代言)을 겸하였다. 마침내 통헌(通憲)을 더하고, 상주(尙州)
4의 목(牧)으로 나갔다. 주에는 옛부터 대나무가 없었는데 공이 말하기를 “고을 사람들에게 속(俗)된 것이 많은데 어찌 대나무가 없습니까”라고 하여 옮겨 심으니, 읍에 가득 차서 백성들이 그 이로움의 덕을 보았다. 또 광주(廣州)
5의 수령이 되었는데 관사가 좁고 누추한 것을 보고 말하기를 “이 주는 8목(牧)의 으뜸이므로 마땅히 위엄을 크게 보여야 할 것이오. 이 관사는 단지 병란으로 불탄 뒤에 임시로 지은 것이니 거의 옛터가 아닐 것이오”라고 하였다. 그 땅을 여러 자 파보니 섬돌과 주춧돌이 완연하였으므로 온 고을 사람들이 공의 밝은 식견에 탄복하여, 전생에 (그가) 이 곳에 부임하였다고 하였다. 주의 서쪽에 큰 길이 있는데 노인들이 서로 전하여 말하기를 “인물이 나오지 않는 것은 대개 이 길이 기(氣)를 패하게 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그것을 듣고 말하기를 “만일 그러하다면 어찌 어려울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하고 북쪽으로 길을 옮겨 내게 하니, 그 뒤로는 과연 번창하였다. 다시 언부(讞部)와 종부(宗簿) 전의(典儀) 두 시(寺)의 판사(判事)를 거쳐 대사헌(大司憲)으로 옮겼는데,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밝게 드러내어 풍속을 교화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지밀직사사 판전교시사(知密直司事 判典校寺事)가 되고 밀직사 상호군(密直使 上護軍)이 더해졌다. 후지원(后至元)
6 정축년(충숙왕 복위6, 1337 )에 합포(合浦)
7를 다스리러 나갔는데 전의 원수가 노래하는 기생을 둔 것을 보고 “아녀자가 군중(軍中)에 있으면 상서롭지 못하오.”라고 하여 모두 물리치게 하였다. 잔치를 못 열게 하고, 말 타고 활 쏘는 것을 연마하니 군(軍)의 기강[大體]를 바로 얻게 되었다. 그 부(府)에서는 해마다 공물로 말린 사슴 1,000 마리를 바쳤는데, 공은 “무릇 에워싸며 사냥하면서 어찌 사슴만 잡고 나머지 짐승들은 놓아주겠소. 이러한 일은 우리 임금께서 어진 마음으로 살생을 싫어하는 덕[好生之德]에 어긋나는 것이오.”라고 하여, 그 피해를 글로 써서 보고하니, 임금이 그 공물을 바치는 것을 중단하도록 허락하였다.
만년에는 시령군(始寧君)에 봉해지고, 이윽고 도첨의찬성사 예문관대제학(都僉議贊成事 藝文館大提學)으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스스로 호를 담암거사(湛菴居士)라 하고 한가롭게 지내면서 심성을 기른 것이 10년 남짓 되었다 지정(至正)
8 기축년(충정왕 1, 1349 ) 5월 무신일에 병이 들어 집에서 돌아가셨다. 하루 전에 아들 총(總)을 불러 말하기를 “내일 나는 떠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밤이 지나자 거듭 “닭이 울었느냐.”고 물었다. 이미 하늘이 밝아오자 “돌아가리로다. 돌아가리로다.”라고 하였는데 말을 끝내고는 운명하니, 나이 76세이다. 광주(廣州)의 백성들이 와서 조문하고 부의를 바쳤다. 6월 경신일에 송림현(松林縣)
9 동쪽의 어머니 묘소에 묻으니, 곧 공이 미리 점쳐 놓은 곳이다.
증조부 택(澤)은 상서우복야 한림학사(尙書右僕射 翰林學士)이고, 조부 경(璥)은 도첨의중찬 수문전대학사(都僉議中贊 修文殿大學士)로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하였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아버지 승(陞)은 지도첨의사 상장군(知都僉議事 上將軍)으로 시호는 정신(貞愼)이고, 어머니 홍씨(洪氏)는 지추밀원사 한림학사(知樞密院事 翰林學士) 진(縉)의 딸이다. 공의 부인은 김씨(金氏)인데 동지밀직사사 판도판서(同知密直司事 版圖判書)로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한 중전(仲全)의 딸로 승화군(承化郡)에 봉해졌다.
자녀로 7명을 낳았다. (큰)아들 총(總)은 밀직사좌부대언 판사복시사(密直司左副代言 判司僕寺事)이고, 다음 진(鎭)은 삼사부사(三司副使)이다. (큰)딸은 군부정랑(軍簿正郎) 최계진(崔季眞)에게 시집갔으나 먼저 사망하였고, 다음은 응양군호군(鷹揚軍護軍) 설봉(薛鳳)에게, 다음은 전법총랑(典法摠郎) 이몽정(李蒙正)에게, 다음은 전객시승(典客寺丞) 김인관(金仁琯)에게, 다음은 내부시승(內府寺丞) 박린(朴僯)에게 시집갔다. 내외 손자는 모두 40여 명이 있다.
공은 성품이 검소하고 신중하였으며, 음식을 먹되 맛을 찾지 않았고 옷을 입되 화려하게 하지 않았다. 처음 벼슬하여 재상에 이르기까지 권세 있는 이의 집에 나아가지 않았다. 처음 삼현(三峴)의 왼쪽 기슭에 살게 되었을 때, 밤중에 아득한 가운데 푸른 옷을 입은 서너 명이 뜰 가운데서 춤을 추면서 말하였다. “이제야 참 주인을 만났도다.” 안채[閨門]가 엄숙하고 교목(喬木)이 울창하여 오래된 집안의 풍모와 기상이 있었으나, 아쉽도다. 벼슬이 지극히 높은 곳에 이르지 못하여 품고 있는 능한 재주를 나라를 위하여 베풀지 못하였도다.
명(銘)하여 이른다.
말은 부드럽고도 간결하며 행실은 검소하면서도 겸손하였으며
스스로를 닦아서 관직에 나가고 미쁨을 따라서 공평하고 청렴하도다.
들어와서는 집안을 다스리고 자녀들을 가르치되 올바름으로 하였으며
나가서는 나라를 밝게 하고 임금을 섬기되 공경으로 하도다.
두 고을에 수령으로 가니 베풀어진 인정(仁政)은 떠난 뒤에도 그리워하게 하고
합포(合浦)에서 푸른 깃발을 나부끼니 어진 덕은 들판의 새끼사슴에게까지 미치도다.
높은 명망으로 세상을 다스렸으니 지위는 낮아도 덕은 기려질 것이며
자손도 이미 많으니 나머지 복록도 끝이 없으리로다.
지금의 임금<忠定王>이 즉위하여 장경공(章景公)이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승봉랑 내부시승(承奉郎 內府寺丞) 박린(朴僯)이 돌에 쓰다[書丹].
〔출전:『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