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원공(元公) 묘지명 및 서문 <결락> 쓰고,
중대광 검교첨의정승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여흥군(重大匡 檢校僉議政丞 右文館大提學 監春秋館事 驪興君) 민지(閔漬)
1 지음.
공의 이름은 관(瓘)이고, 자는 퇴옹(退翁)으로, 원주(原州) 사람이다. 원래 이름이 정(貞)이었으나 성과 이름이 상국(上國 : 元)의 연호(年號)와 서로 같으므로 고쳤다.
2 증조는 좌사간 지제고(左司諫 知制誥) 승윤(承胤)이고, 조부는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추봉된 진(瑨)이며, 아버지는 금자광록대부 수대부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판병부사(金紫光祿大夫 守大傅 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修文殿大學士 監修國史 判兵部事)이고 시호가 문순공(文純公)인 부(傅)
3이다. 어머니는 봉성군대부인(峰城郡大夫人) 염씨(廉氏)인데 예빈▨경(禮賓▨卿) 수장(守藏)의 장녀이니, 곧 중고(中古)의 명재상인 신약(信若)의 손녀이다.
▨ 나면서부터 총명하여 외조부가 반드시 ▨▨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친히 보살피고 길렀다. 자라나자 문음(門蔭)으로 처음 벼슬을 하였다. 원종 4년 계해년(1263 )에 음(陰)으로 지강화군판관(知江華郡判官)이 되고, 임기가 차자 또 사경원판관(寫經院判官)이 되었다. 원종 7년 병인년(1266)에 약관(弱冠)의 나이로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4 국학학록(國學學錄)으로 옮기고, 해▨부녹사전(海▨府錄事典)을 거쳤다. 원종 10년 기사년(1269)에 액정내시백(掖庭內侍伯)으로 옮겼다. 이 해 겨울 12월에 원의 조정에 조회하러 갈 때 본국의 문순공(文純公)이 부추(副樞)로서 임금의 행차를 수행하였으므로, 공이 또한 엄군(嚴君)을 부축하여 모시면서 행궁반록(行宮班祿)을 겸하여 관장하였다. 임금이 돌아오게 되자 첨사부승(詹事府丞)이 더하여지고 얼마 되지 않아 감찰어사(監察御史)에 임명되었다.
여러 관직을 거쳐 태부소윤(太傅少尹)이 되고, 청주목부사(淸州牧副使)가 되어 나가자 다스림에 위엄과 은혜가 있었다. 이듬해에 국가에서 재상의 아들로 재능이 있는 자 10여 명을 뽑아 천자의 조정에 입시(入侍)하게 하였는데 궁전배(弓箭陪)라고 불렀다. 이 때에 총재(冢宰, 金方慶)의 아들인 대장군(大將軍) 김흔(金忻)이 그 우두머리가 되고, 공은 ▨ 재상의 아들로 부(副)가 되었다.
5 ▨ 이 때 조의대부 비서윤 세자중윤(朝議大夫 秘書尹 世子中允)으로 뛰어 올랐다. 정해년(충렬왕 13, 1287)에 부친상을 당하여 돌아오게 되었으나, 상이 끝나자 다시 기용되어 정헌대부 전법판서 문한학사 지첨사부사(正獻大夫 典法判書 文翰學士 知詹事府事)가 되었다. 무자년(충렬왕 14, 1288)에 형부의 관리[秋官]로서 여러 사람의 비방이 갑자기 일어나자, 공또한 면하지 못하고 1년 동안 벼슬에서 벗어나 있었다. 기축년(충렬왕 15, 1289)에 다시 기용되어 정헌대부 판예빈시사 보문각학사 지제고(正獻大夫 判禮賓寺事 寶文閣學士 知制誥)가 되었다.
경인년(충렬왕 16, 1290)에 합단적(哈丹賊 : 거란의 遺種)이 이웃 국경에서 사납게 일어나 장차 우리의 영토로 들어오려고 하였다. 적의 형세가 매우 성하여 그 예봉을 감당하기 어려웠으므로 국가에서는 임시로 강화(江華)로 피난하려고 하면서, 공을 본경(本京 : 開京)의 유수만호(留守萬戶)로 삼았다. 공이 이에 나라 일로 인하여 자신의 몸을 잊고 어려움에 임하여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충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니, 드디어 성곽과 궁궐과 백성의 가옥[閭舍]이 비록 적화(賊火)를 입기는 하였으나 전과 같이 편안할 수 있었다. 임금이 매우 기뻐하여 특별히 판도판서(版圖判書)로 임명함으로써 상을 내려 주었다.
계사년(충렬왕 19, 1293) 겨울 세조(世祖)황제가 글[詔]을 내려 본국에서 일본을 정벌[東征]할 전함을 준비하도록 하였다. 임금이 고위관리를 여러 도(道)에 나누어 보내었는데 공은 서해도
6 지휘사(西海道 指揮使)가 되었다. 공은 이에 부지런함을 다하여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낮을 가리지 않고 독려하여 60여 척을 만들었으므로, 조야(朝野)가 그 능함을 칭찬하였다. 동정(東征)은 비록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오히려 관선(官船)이 되어 해마다 세(稅)를 거두어들이니 나라의 비용에 이익이 되는 판단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다.
갑오년(충렬왕 20, 1294)에 봉익대부 삼사사 문한학사승지(奉翊大夫 三司使 文翰學士承旨)가 되었다. 병신년(충렬왕 22, 1296)에 밀직학사(密直學士)가 되고, 거듭하여 지밀직사사 판도판서(知密直司事 版圖判書)가 되었다. 동생[舍弟]인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경(卿)의 혼례로 인하여 집안에 틈이 생겨 일이 벌어졌는데,
7 공 또한 의심을 받아서 배척당하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문을 닫아 걸고 출입하지 않으며 단지 거문고와 책으로서 스스로 즐길 따름이었다.
대덕(大德) 11년 정미년(충렬왕 33, 1307)에 ▨ 임금<忠宣王>이 친히 정사를 처음 보면서 공을 기용하여 광정대부 도첨의시랑찬성사 상의도첨의사(匡靖大夫 都僉議侍郞贊成事 商議都僉議事)가 되고, 무신년(충선왕 즉위, 1308)에 첨의중호 행민부전서 영전의등사(僉議中護 行民部典書 領典儀等事)가 되었다. 기유년(충선왕 1, 1309)에 밀직사사(密直司使)로 바꾸었는데 이에 민부전서(民部典書)를 겸하면서 다시 기밀(機密)에 참여하게 되었다. 공은 가득 차면 급한 물결을 만나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용감하게 물러나려 하였다. 임금 또한 그 뜻을 어기기 어려워 광정대부 첨의찬성사 진현관대제학 부총부사(匡靖大夫 僉議贊成事 進賢館大提學 副摠副事)로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하게 하였다.
경술년(충선왕 2, 1310)에 대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공은 이 때 나이가 예순이 넘고 수염과 머리가 모두 하얗게 되었으나 다시 소복을 입고 힘을 다하여 장례를 치르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어머니의 장수와 아들의 효도를 아름답게 여겼다. 이로부터 불교[三寶]에 정성을 드려 힘써 명복[追福]을 빌게 되었다. 성의 북쪽 구룡산(九龍山) 사나사(舍那寺)의 승려 ▨▨▨▨▨▨▨ 세월이 오래 되어 이미 허물어진 것이 또한 많았으므로, 공이 이를 새롭게 중창하려는 원(願)을 세웠다. 일년[朞年]도 되지 않아 고운 색깔을 입힌 윤어(輪魚)의 관(觀)을 부처님께 바치고 승려에게 재(齋)를 드리니 이전보다 더함이 있었다. 또 강절(江浙)에서 대장경 한 부가 만들어져서 항주(杭州)
8의 혜인사(惠因寺)
9에 모셔두었는데, ▨ 실로 만세(萬世)의 보물이었다. 이를 아울러 사들이면서 ▨전(田)▨장(藏), ▨백찬(白粲, 白米) 15▨를 바쳤다. 몇 년에 걸쳐 토지와 노비[田藏]의 경비를 들여 기울여 장수를 비는 비석을 세우니, 강남의 도인(道人)과 속인(俗人)이 노래를 지어 찬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시를 이은 것이 한 축(軸)이나 되었는데 이를 보내왔다.
금년 연우(延祐) 3년 병진년(충숙왕 3, 1316 ) 4월[首夏]에 재산을 거의 기울여 은(銀)으로 『화엄경 3역(華嚴經 三譯)』1부를 베꼈는데, 낮밤으로 재촉하여 마침내 이루게 되었다. 6월[季夏] 중에 공은 가벼운 병을 얻었는데, 26일이 되자 집에서 돌아가셨다. 향년 70세이다.
공은 처음 지첨의부사 판삼사사(知僉議府事 判三司事) 홍녹준(洪祿遵)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자녀가 없이 사망하였다. 다시 동지밀직사사 전리판서(同知密直司事 典理判書)로 은퇴한 곽여필(郭汝弼)의 딸과 결혼하여 1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관례(冠禮)를 올리기 전 일찍 죽었고, 딸은 관군만호 성균제주(官軍萬戶 成均祭酒) 김승용(金承用)
10에게 시집갔다. (부인이) 공보다 먼저 죽었으므로 다시 좌승지(左承旨) 김신(金信)의 딸과 결혼하여 2남 3녀를 낳았다. 장남 충(忠)
11은 ▨▨ 통헌대부 밀직부사 상호군(通憲大夫 密直副使 上護軍)이고, 차남은 ▨인데 역시 먼저 죽었다. 큰딸은 서원수군만호 ▨▨위보승호군(西原水軍萬戶 ▨▨衛保勝護軍) 박거실(朴居實)에게 시집갔고,
12 둘째 딸은 동지밀직사사 민부전서(同知密直司事 民部典書) 민적(閔頔)에게 시집갔으며,
13 셋째 딸은 우사보 지제교(右思補 知製敎) 김광철(金光轍)에게 시집갔다.
이 해 ▨ 9월 초나흘에 장단현(長湍縣)
14의 금동(金洞)에 장례지내려 하면서, 아들과 사위들이 행장을 갖추어 나에게 묘지명을 부탁하였다. ▨ 나는 늙고 병든 지 오래 되어 ▨▨▨▨▨ 사양하고 피하려고 하였으나, 공은 나와 같은 해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므로[同榜], 어쩔 수 없이 다만 엉성하게나마 그 대략을 적는다.
명(銘)하여 이른다.
▨▨ 부친[先公]은 동한(東韓)의 주석(柱石)이었고
공은 실로 봉추(鳳雛)이니 일대의 조정에서 오색(五色)이 빛나도다.
중화(中華)에서 ▨ 뛰어나고 사직을 위해 충성을 다하였으니
흑두(黑頭, 젊은 관리)는 재상의 명령을 따르고 백성들은 그 덕을 그리워하네.
가득참을 알아서 스스로 물러나 한가롭게 자적하니
만년에는 부처를 섬기는데[樂善] 그 힘을 다하도다.
원찰(願刹)을 ▨▨(〔지으며〕) 금벽(金碧)을 입혀 새롭게 중창하니
규장▨▨ 이역(異域)에 이름을 전하도다.
마침내 『삼역 대장경(三譯 大藏經)』이 다 이루어지자
푸른 닥나무 종이에 은니(銀泥)로 쓰니
글씨는 장중하고도 이름답도다.
나머지 복이 아직 다하지 않았는데
훌륭한 공로는 다시 쌓이도다.
스스로 노니는 곳천당과 극락일지니
자손에게 청아한 기풍[淸風]과 재상의 지위[黃閣]를 남기셨도다.
〔출전:『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