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충익대보조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수태위 판중서문하사 상장군 평양군(宣忠翊戴輔祚功臣 壁上三韓 三重大匡 守太尉 判中書門下事 上將軍 平壤君)이며 추증된 시호 정숙공(貞肅公) 묘지명
대저 신하가 된 사람은 네 가지 몸가짐을 가져야 하나니, 몸단속을 잘하여 엄중하게 바른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 하나이고, 일에 임해서는 공(公)을 따르고 사(私)를 가볍게 보는 것이 둘이며, 사신으로 나가게 되면 잘 대처하여 나라의 명예를 높이고 넓히는 것이 셋이며, 조정에서 일하게 되면 행동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 넷이다. 신하로서 그 한 가지를 가진 이도 또한 드문데, 하물며 한 몸에 네 가지 몸가짐을 구비한 사람은 대개 천 년에 한 사람뿐일 것이니, 우리 평양군(平壤君)이 바로 그 분이다.
공의 이름은 인규(仁規)이고, 자는 거진(去塵)으로, 평양군(平壤郡) 사람이다. 아버지 영(瑩)은 금오위 별장(金吾衛 別將)이었는데, 공이 높이 되었기 때문에 금자광록대부 추밀원부사 이부상서 상장군(金紫光祿大夫 樞密院副使 吏部尙書 上將軍)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이씨(李氏)는 내원승(內園丞) 유분(有芬)의 딸인데 여러 차례 봉해져서 토산군부인(土山郡夫人)이 되었다. 어머니가 태양이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이에 잉태하여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뛰어났으며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학문에 뜻을 둘 나이가 되자 공을 세워 나라를 바로 잡겠다는 큰 뜻을 세워, 문자(文字)를 가볍게 여겨 그것을 버리고 태자부시위(太子府侍衛)가 되었다. 무오년(고종 45, 1258)에 이르러 장군 인규(仁揆) 휘하의 대정(隊正)이 되었다. 나라에서 무반[山西]의 자제 중에 영리하고 재능이 있는 자를 골라 대조(大朝, 元)의 언어를 가르치게 하였는데, 공이 이에 참여하여 선발되었다. 계해년(원종 4, 1263)에 교위(校尉)로 승진하고, 기사년(원종 10, 1269)에 지금의 임금(忠烈王)이 세자로서 원의 조정에 들어갈 때에 공이 수행하여 갔는데, 여러 차례 승진하여 섭산원(攝散員)이 되었다. 임금을 수행한 4년 동안 보좌한 공로가 많았다.
갑술년(원종 15, 1274)에 임금이 원 황실의 딸을 배필로 삼고
1 돌아와 왕위를 이어 받으니, 그 공로로 중랑장(中郞將)으로 뛰어 오르고, 얼마 되지 않아 장군 지합문사 겸 어사중승(將軍 知閤門事 兼 御史中丞)에 임명되었다. 무인년(충렬왕 4, 1278)에 대장군 직문하성(大將軍 直門下省)으로 옮기고, 기묘년(충렬왕 5, 1279)에 우승선(右承宣)에 임명되면서 정의대부 상장군 지병부사 태자우유덕(正議大夫 上將軍 知兵部事 太子右諭德)이 더해졌다가 곧 좌승선 지이부사(左承宣 知吏部事)로 옮겼다. 임오년(충렬왕 8, 1282)에 신호위상장군(神虎衛上將軍)으로서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 병부상서(銀靑光祿大夫 樞密院副使 兵部尙書)로 뛰어 올랐다. 갑신년(충렬왕 10, 1284)에 지원사(知院事)가 더해지고, 병술년(충렬왕 12, 1286)에 어사대부 태자빈객(御史大夫 太子賓客)으로 승진하였다. 정해년(충렬왕 13, 1287)에 금자광록대부 지문하성사(金紫光祿大夫 知門下省事)로 뛰어 오르고, 이어 문하평장사 태자소사(門下平章事 太子少師)가 더해졌다. 무자년(충렬왕 14, 1288)에 태자태보(太子太保)가 더해지고, 경인년(충렬왕 16, 1290)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와 선수 가의대부 왕부단사관(宣授 嘉義大夫 王府斷事官)이 더해지면서 삼주호부(三珠虎符)를 띠었다. 신묘년(충렬왕 17, 1291)에 판병부사(判兵部事)가, 임진년(충렬왕 18, 1292)에 문하시중 판이부사 태자태사(門下侍中 判吏部事 太子太師)가, 정유년(충렬왕 23, 1297)에 벽상삼한 삼중대광 수태위 판중서문하사(壁上三韓 三重大匡 守太尉 判中書門下事)가 더해졌는데, 나머지는 모두 그전과 같았다.
무술년(충렬왕 24, 1298)에 간사한 사람이 말을 꾸며서 망녕되게 고소하니, 공은 이 때문에 원의 조정에 가게 되었다. 원의 조정에서는 여러 가지로 힐문하였으나, 대의를 확고하게 지키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른 말이 없었으므로, 중국 조정의 사대부들이 모두 훌륭하게 여겼다. 칠팔 년 남짓 억류되어 있다가, 황제(成宗)가 한결같은 절개를 가상하게 여겨 대덕(大德)
2 9년 을사년(충렬왕 31, 1305)에 조칙을 내려 그전과 같은 임무를 맡으면서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그 해 12월에 벽상삼한 삼중대광 판중서문하사(壁上三韓 三重大匡 判中書門下事)에 다시 임명되고 나머지도 전과 같이 되었다. 정미년(충렬왕 33, 1307)에 자의중서문하사(咨議中書門下事)로 승진하고 평양군(平壤君)으로 봉해지자, 비록 집에 있으면서도 무릇 군국(軍國)에 관한 중요한 일은 모두 나아가 결정하게 되었다.
무신년(충선왕 즉위, 1308)에 부(府)를 설치하고 관원을 두게 하였으며, 선충익대보조공신(宣忠翊戴輔祚功臣)을 더하였다. 공은 이에 “평생 동안 사방으로 바쁘게 다니느라 자리가 따뜻해질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이제는 이미 군(君)으로 봉해지기에 이르고, 나이도 70이 넘었으니, 마땅히 잔치를 베풀면서 즐겁게 지내해야 하겠소” 라고 하고 사안(謝安)
3이 동산(東山)에 은거하며 고결하고 즐겁게 지낸 일을 사모하였다. 또 마음으로는 오로지 부처를 섬겼다. 일찍이 대장경을 펴내려 하여 특히 승려[開士]들을 집으로 불러 모아 책을 만들었는데, 그 해 3월에 시작하여 4월 19일에 와서야 일을 다 마쳤다. 그 날 밤에 집안의 어른과 아랫사람 네 명이 같은 꿈을 꾸었는데, 꿈에 어떤 신인(神人)이 옷을 갖추어 입고 찾아 와 문을 두드리면서 말하였다. “저승에서 평양군이 불경을 만드는 것을 끝내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자를 보내어 맞아 오라고 하기에 왔습니다.” 과연 이튿날이 되자 목 위에 작은 종기가 돋아났다. 용한 의원을 불러 진찰하게 하였으나 “질환이 어찌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공도 또한 “죽고 사는 것은 명(命)에 달려 있는 것이니 회피할 수가 없습니다” 라고 하며 드디어 의약(醫藥)을 물리쳤다. 처음에 공은 꿈에서 관음보살(觀音菩薩)의 존상(尊像)이 하늘에 닿도록 서있는 것을 보았다. 그 모양과 같은 그림 한 폭을 이루고자 하여 병이 위중한데도 몸소 벽에 의지하여 점을 찍고 곧 화공을 불러 초벌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비록 병중에 있으면서도 쾌활하고 자재(自在)함이 이와 같았다.
이에 앞서 여러 아들이 모두 왕명을 받아 원에 들어가 있고, 오직 둘째 아들 연(璉)이 곁에서 모시고 있었다. 25일이 되자 뒷일을 부탁하여 말하였다. “오랜 전생부터 인연이 있어 같은 형제로 태어났으니, 집안일로 서로 시기하고 미워해서는 안 된다. 무릇 나라를 잘되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그 집안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 맏아들 서(瑞) 등이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형은 공손하고 동생은 순종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지 마라.” 말을 마친 뒤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저녁이 되자 서쪽을 향해 무릎을 꿇고 앉아 향로를 받들며 찬불(讚佛)하고, 옛날의 게(揭)를 외우면서 단정히 앉은 채 돌아가시니, 향년 72세이다.
성 안의 선비들과 백성들이 달려와 우러러 예를 바치면서, “공이 바르고 곧게 공사(公事)를 받든다고 들은 지 오래되었는데, 지금에 와서야 그 참 본성을 알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모두 찬탄하면서 울었다. 임금도 부음을 듣고 몹시 슬퍼하여 담당 관리에게 장례일을 도와 주라고 명하였다. 6월 28일에 개성(開城) 웅곡(熊谷) 북쪽 기슭에 장례지내고 시호를 정숙공(貞肅公)이라고 추증하였다.
공은 사람됨이 풍채가 잘 생기고 말이 적었으며, 단정하고 진실하여 번드레함이 없었다. 비록 무관직에 종사하였으나 사서(四書)와 전기(傳記)에도 자못 관심을 두었고, 또 글씨를 잘 썼다. 평생에 사물을 대하면 관대하고 온화하여 겸손하였으나, 일을 두고서는 꺼리지 않고 바른 말을 하였으므로 사람들 중 감히 범하는 자가 없었다. 하위직에 있을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중국 조정에 출입한 것이 무릇 30여 차례였는데 거동하기만하면 나라를 바르게 하고 구한 성과가 있었다.
지난 을해년(충렬왕 1, 1275)에 중국 조정에서 보낸 두목(頭目) 흑적(黑的)이 우리 나라와 언짢은 감정을 쌓아 왔는데, 우리의 습속을 고치려고 황제에게 가서 상소하자 일이 이미 이루어져 어찌할 수가 없게 되었다. 공은 홀로 말을 달려 황제에게 친히 정상을 아뢰어 윤허를 받지 않은 것이 없었다. 달로화적(達魯花赤)
4 의 종전군(種田軍)
5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모두 파하여 철수하게 하였으니,
6 이 일이야말로 만세에 남을 공적이다. 그리고 또 임금(忠烈王)이 여덟 글자의 공신(功臣)이 되게 하고
7 행성승상(行省丞相)에 오르게 한 것,
8 첨의부(僉議府)가 2품의 아문(衙門)이 된 것,
9 양대(兩臺, 僉議府와 密直司)의 은인(銀印)을 내려 받게 한 것,
10 그리고 남쪽의 섬과 북쪽의 변방지대가 우리의 강토로 다시 속하게 한 것
11 등은 모두 공의 힘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전후하여 세운 것을 다 기록할 수 없으므로 단지 그 중에서 더욱 두드러진 것만을 든 것이다.
조청대부 사재경(朝請大夫 司宰卿)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한 조온려(趙溫呂)공의 딸과 결혼하여 5남 4녀를 낳았다. 장남 서(瑞)는 우림(羽林)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지금 은청광록대부 지추밀원사 보문각대학사 상장군(銀靑光祿大夫 知樞密院事 寶文閣大學士 上將軍)으로 선수 관고려군 정동좌부도원수(宣授 管高麗軍 征東左副都元帥)가 되었고, 두 아들을 낳았는데 공의 생전에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이 서급(犀級)에
12 이르렀다. 차남 연(璉)은 지금 금자광록대부 추밀원부사 병부상서 응양군상장군(金紫光祿大夫 樞密院副使 兵部尙書 鷹揚軍上將軍)으로 선수 왕부단사관(宣授 王府斷事官)이다. 셋째 연수(延壽)는 지금 영렬대부 비서감 한림시강학사 충사관수찬관 지제고(榮列大夫 秘書監 翰林侍講學士 充史館修撰官 知制誥)이고, 선수 관고려군만호(宣授 管高麗軍萬戶)에 제수되었다. 형제 세 명이 일시에 다같이 삼주호부(三珠虎符)를 띠었으니, 참으로 드문 일이다. 올 봄에 원수공(元帥公, 瑞)이 중국 조정에 들어가 처음으로 부명(符命)을 받았는데 이에 앞서 시를 지어 부친에게 바쳤다.
한 가문에 세 명씩이나 호부(虎符)를 받으니
천만고(千萬古)에 없는 일입니다.
누구의 음덕 탓인지 잘 알 수는 없지만
아버님은 머리가 하얗게 세셨군요.
마침 공이 별세하여 미쳐 눈으로 보지 못하고 다만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으니, 이것이 하나의 한이다. 넷째 의선(義旋)은 천태종(天台宗)에 투신하여 선과(禪科)의 상상과(上上科)에 합격하였는데 지금 선사(禪師)가 되어 진구사(珍丘寺) 주지로 있다. 다섯째 위(瑋)는 지금 조산대부 신호위보승장군(朝散大夫 神虎衛保勝將軍)이다.
장녀는 영렬대부 추밀원좌부승선 판비서시사 한림시독학사 충사관수찬관 지제고(榮列大夫 樞密院左副承宣 判秘書寺事 翰林侍讀學士 充史館修撰官 知制誥)인 노영수(盧潁秀)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원(大元)의 영록대부 강절등처 행중서성평장정사(榮祿大夫 江浙等處 行中書省平章政事)인 오말(吳抹)에게 시집갔으며, 셋째는 조의대부 신호위대장군 지각문사(朝議大夫 神虎衛大將軍 知閣門事)인 백효주(白孝珠)에게 시집갔으며, 넷째는 조봉대부 용호군대장군(朝奉大夫 龍虎軍大將軍)인 염세충(廉世忠)에게 시집갔다.
공은 미관으로부터 요직을 두루 거쳐 재상에 오르고, 생전에 군(君)으로 책봉되는 은총[分茅之寵]을 입었으며, 또 훌륭한 자손들이 조정의 대각(臺閣)에 빛나고 있으니, 삼한(三韓) 이래로 공과 같이 시종 영예를 누리게 된 이가 능히 몇 사람이나 있겠는가. 수재거사(睡齋居士) 시중(侍中) 홍규(洪奎)가 시를 지어 곡(哭)하면서 말하기를
세 임금을 섬긴 재상이로다
봉군(封君) 된 이 중에서 공보다 위에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라고 하였고, 또 계속하여
집안에 가득 찬 아들과 사위들이 이미 재상이 되었으니
현인(賢人)을 이어서 백성을 보전하리라.
라고 하였으니, 이는 대개 실제의 일을 적은 것이다.
장례 날에 앞서 원수공이 공의 행장을 갖추어 나에게 묘지명을 지어줄 것을 부탁하였다. 내가 작년에 직한림원(直翰林院)으로서 공을 모시고 원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러 들어갔을 때 나를 직접 돌보아 주었으며, 하물며 여러 아들과 사위가 모두 나의 친구이니 감히 글이 졸렬하다는 이유로 사양할 수가 있겠는가. 삼가 재배하고 명(銘)을 짓는다.
뿔 달린 짐승 중에서는 기린이고, 날짐승 중에서는 봉(鳳)새이니
구구하게 날거나 달리는 짐승이야 비록 많으나 또한 어찌 하리오.
예전에 공의 어머니가 해가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낳고 기르니 제비 턱에 무쏘뿔의 정수리 뼈[頂骨]를 가졌도다.
13
장성하기에 이르러 무반[山西]으로 이름을 올려
수레[軺軒]을 타고 북국으로 가니 들고남이 몇 차례였던가.
세 임금을 언각(鶠閣, 中書省)과 난대(鸞臺, 門下省)에서 두루 보좌하고
나라의 주춧돌이 되어 임금을 도와 선정을 베풀게 하였다.
작위는 5등(五等)보다 높았고 지위는 삼태(三台, 三公)에 달하였으며
주옥(珠玉)을 이어 매단 여러 아들은 호부(虎符)와 금패(金牌)를 찼도다.
그 공명과 덕업(德業)은 예로부터 견줄 이 없었고
단정하게 앉아 돌아가시니 처음부터 끝까지 정신이 혼란하지 않았도다.
명(銘)으로 쓴 글에도 부끄럼이 없고 무덤자리도 매우 아름다운데
돌에 새겨 무덤에 넣으니, 아, 슬프도다.
지대(至大)
14 원년 무신년(충렬왕 34, 1308) 6월 일 조의대부 판예빈시사 충사관수찬관 지제고(朝議大夫 判禮賓寺事 充史館修撰官 知制誥) 방우선(方于宣)이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