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문화유산연구원이(가) 개방한
이강묘지(李岡墓誌)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 1유형
"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할수 있습니다.
개관
묘지명은 이색의 문집인『목은문고(牧隱文藁)』권18과『동문선(東文選)』권127에 실려 있으며, 1368년(공민왕 17)에 이색이 작성하였다.
묘지명의 주인공 이강(李岡 : 1333~1368)의 자는 사비(思卑)이다. 처음 이름은 강(綱)인데, 같은 항렬의 이름을 피하여 고쳤다. 고성(固城) 사람이다. 증조는 존비(尊庇), 조부는 우(瑀)이며, 아버지는 암(嵒)이다. 어머니 홍씨(洪氏)는 자번(子藩)의 손자인 승서(承緖)의 딸이다.
묘지명에 따르면 이강은 충정왕 때 서연(書筵)의 시독(侍讀)으로 선발되었고, 왕위를 물러주자 왕을 따라가 원나라에 함께 머물렀다. 공민왕이 즉위하자 다시 주부(主簿)에 임명되어 부새(符璽)를 관장하였다. 1361년(공민왕 10) 경상도안렴사(慶尙道按廉使)가 되었을 때 홍건적의 침략으로 왕이 남쪽으로 피난오자 잘 대응하였으며, 서울로 돌아와 관리의 인사를 관장하는 등 상하를 유지하고 각기 바라는 바를 채워 공을 이루었다고 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부인은 곽씨(郭氏)이며, 연준(延俊)이다. 아들 하나와 딸이 몇 명 있으나, 모두 어리다.
문경이공 묘지명 병서(文敬李公 墓誌銘 幷序)
선친 가정공(稼亭公 : 李穀)이 일찍이 정해년(충목왕 3, 1347)의 과거를 주관하여 선발한 선비 중에 이름난 사람이 많았다. 문경 이공(文敬 李公)은 나이 15세로 용모와 재능이 빛나 당시에 이미 그 아버지의 풍모가 있다는 말이 있었다. 그 뒤로 배움이 깊어지고 학식이 높아져 이름이 날로 중해져 당당히 재상이 될 재목이었다. 그가 병이 들자 사람들은 “결코 걱정할 것이 없다. 이 사람이 어찌 여기서 그치겠는가”라고 말하였다. 그가 죽자 또 말하기를 “때를 잘못 타고 태어났는가, 약물에 잘못이 있는가. 어찌 이 사람이 이에 이르렀는가” 하였다. 사대부들은 서로 조정에서 조문하고 친척과 친구들은 서로 그 신위(神位)에 곡하였으며, 길가는 사람들도 그를 위해 탄식하고 애석해 하였다.
임금은 부음을 듣고 심히 애도하며 후하게 부의(賻儀)를 하고 태상(太常)에 시호를 논의하도록 명하면서 “추밀(樞密)은 시호를 주지 않는 것이지만 내가 특별히 강(岡)을 포상하려는 것은, 문신으로 오랫동안 수고한 사람은 정당문학(政堂文學) 원송수(元松壽)뿐이다. 내가 이로 인해 잊지 않고 있는데, (원송수와) 몸은 다르나 공적이 같은 사람은 지금 강(岡)뿐이다”라고 하셨다. 의논이 되어 올라가자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문경(文敬)은 오직 강(岡)에게 족히 해당한다” 하셨다. 아. 공은 유감이 없다고 할 것이다.
그 친구인 상당(上黨 : 지금의 청주 일대)의 맹운(孟雲) 한수(韓脩)와 곡성(曲城 : 지금의 경기도 파주)의 중창보(仲昌父) 염흥방(廉興邦)이 한산(韓山 : 지금의 충청도 서천)의 이색(李穡)에게 의논하면서 “우리 친구가 죽은 이래로 모두들 슬퍼하는데도 오히려 죽음을 면하지 못했다. 우리 친구가 전할 만한 것을 전하고 죽는 것이 우리 셋의 책임이며, 또한 그 슬픔을 스스로 위로하는 것이 된다”라고 하였다. 이에 명문(銘文)은 나(이색)에게 맡기고, 수(脩)는 글씨를 쓰고, 흥방(興邦)이 전각(篆刻)하여 돌에 새기는 일은 중창보(仲昌父)와 맹운(孟雲)이 주관하기로 하였다. 슬프다, 내 어찌 차마 친구의 명문을 짓는가.
공의 이름은 강(岡), 자는 사비(思卑)이다. 처음 이름은 강(綱)인데, 같은 항렬의 이름을 피하여 고쳤다. 성은 이씨로, 고성인(固城人)이다. 증조 존비(尊庇)는 판밀직사사 겸 감팔대부(判密直司事 兼 監察大夫)로 경릉(慶陵 : 충렬왕) 때 유명하였다. 조부 우(瑀)는 철성군(鐵城君)이다. 아버지 암(嵒)은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서법(書法)이 당대에 빼어났으며, 호는 행촌(杏村)이다. 어머니 홍씨(洪氏)는 시중으로 시호가 충정(忠正)인 자번(子藩)의 손자인 우대언(右代言) 승서(承緖)의 딸이다.
처음에 문음으로 복두점녹사(幞頭店錄事)가 되었고, 급제하여 경순부승(慶順府丞)이 되어, 전의시(典儀寺)에서 직장(直長)과 주부(主簿)에 또 영(令)이 되었다. 병부(兵部)에서 원외랑(員外郞), 문하성(門下省)에서 사간(司諫), 이부(吏部)에서 낭중(郎中), 호부(戶部)에서 시랑(侍郞), 밀직사(密直司)에서 대언(代言) 지신사(知申事) 제학(提學) 부사(副使)가 각각 되었다. 내외의 지제고(知制誥)를 역임하고, 관직(館職)은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으며 품계는 봉익대부(奉翊大夫)에 이르렀다. 총릉(聰陵 : 충정왕)이 서연(書筵)에 있을 때 시독(侍讀)에 선발되었고, 왕위를 물러주자 공은 왕을 따라가 함께 머물렀다. 그 뜻을 세운 것이 구차하지 않았다고 할만하다.
상(上 : 공민왕)이 즉위 5년인 을미년(1355) 공을 불러 보고 특별히 여겨 즉시 주부(主簿)에 임명하고 부새(符璽)를 관장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늘 왕의 곁에 있었고, 오래 있을수록 더욱 신중하였다. 이부에 있을 때 옮길 때가 되어 공은 “신이 붓을 잡고 신의 관직을 스스로 임명하는 일은 감히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은 공을 더욱 중히 여겼다. 신축년(공민왕 10, 1361) 가을 경상도안렴사(慶尙道按廉使)가 되었다. 마침 북쪽지방이 침략을 당해 온 나라가 남쪽으로 피난하였다. 그 경계에 들어가 대접하고 물자를 제공하는 것이 충분하여 이르는 곳마다 제 집에 온 것 같았다. 사기가 다시 떨쳐져 마침내 흉악한 무리를 섬멸하였다. 대개 공의 도움이 있었던 것이다. 서울로 돌아와 원문정(元文定 : 원송수)를 대신하여 관리의 인사를 관장하였다. 바야흐로 변방의 보고가 끊이지 않았으나 상하를 유지하고 각기 바라는 바를 채워 공을 이루는데 공의 힘이 컸다.
시중(侍中 : 공의 부친인 이암)이 별세하자 임금은 친히 그 모습을 그렸다. 비록 임금이 특별히 큰 공신을 포상한 것은 여러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고자 한 것이지만, 그 덕이 또한 매우 성대하였고, 또한 효성이 능히 하늘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일에 임하여 조심하고 친구를 사귐에 믿음으로 하며, 독실하게 선을 좋아하며 공평함으로 마음을 추스렸기 때문에 내가 벗으로 삼은 것이다. 하늘이 혹 나이를 빌려주어 조정에서 큰 의논을 결정하고 큰 정치를 뜻과 같이 행했더라면 내가 장차 스승으로 섬겼을 것인데, 그러지 못하고 말았다. 슬픔을 어찌 다하리오.
부인은 곽씨(郭氏)이며, 아버지는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연준(延俊)이다. 딸이 몇 명 있다. 모두 어리고, 아들은 하나인데 올해 태어났다. 모월(某月) 모일(某日)에 별세하여, 모년(某月) 모일(某日)에 성남(城南)의 남촌(藍村)에 장사지냈다. 향년은 36세이다.
명(銘)하기를,
어찌 온전함을 주고도 장수하게 하지 않았는가,
참으로 알 수 없구나 하늘의 미정(未定)함을.
내 이 명문(銘文)을 새겨 천년을 울릴 것이니,
오히려 우리 문경공(文敬公)에게서 상고함이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