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성군(龜城君) 묘지문(墓誌文)
중대광 전 첨의찬성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판총부사 구성군(重大匡 前 僉議贊成事 右文館大提學 監春秋館事 判摠部事 龜城君) 오기(吳祁)는 자가 흥우(興雨)이고, 옛 이름은 자의(子宜)이다. 사명(賜名)은 잠(潛)이고, 호는 동헌(東軒)으로, 동복(同福)
1 사람이다. 아버지는 광정대부 첨의시랑찬성사 판판도낭사 상호군(匡靖大夫 僉議侍郞贊成事 判版圖郞事 上護軍)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한 선(璿)이고, 할아버지는 조정대부 신호위대장군(朝靖大夫 神虎衛大將軍)으로 은퇴한 광례(光禮)이며, 증조는 시중(侍中) 문헌공(文獻公) 대승(大陞)이다. 어머니는 안강군대부인 안씨(安康郡大夫人 安氏)로 안강(安康)
2 사람이며, 아버지인 금오위 정용별장(金吾衛 精勇別將) 부(孚)의 딸이다. 처는 이천군부인 신씨(利川郡夫人 申氏)로 이천(利川)
3 사람이며, 아버지는 통의대부 판예빈시사 춘궁시독학사 수사관수찬관 지제고(通議大夫 判禮賓寺事 春宮侍讀學士 修史館修撰官 知制誥) 욱(頊)이다.
두 아들을 낳았다. 맏아들 승봉조 내부시승(承奉詔 內府寺承) 길(佶)은 공보다 먼저 죽었으나,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은퇴한 백서경(白瑞卿)의 큰딸과 결혼하여 딸 둘을 낳으니 대구(大邱) 사람이다. 둘째 아들 전 좌도지유 신호위 보승낭장(前 左都指諭 神虎衛 保勝郎將) 선(僐)은 밀직사 우부승지 상호군(密直司 右副承旨 上護軍) 송진(宋瑨)의 둘째 딸과 혼인하여 아들 다섯과 딸 셋을 낳으니 여산(礪山)
4 사람이다.
공은 남송(南宋) 개경(開慶) 원년 기미년(고종 46, 1259)에 태어났다. 지원(至元)
5 12년 을해년(충렬왕 1, 1275)에 진사(進士)에 오르고,
6 지원 16년 기묘년(충렬왕 5, 1279)에 병과(丙科)에 급제하였다.
7 지원 17년 경진년(충렬왕 6, 1280) 5월에 천장 병과(天場 丙科)에 급제하여
8 7월에 처음으로 비서교서랑(秘書校書郞)에 더해졌다. 드디어 차례로 승진하면서 액정내알자(掖庭內謁者), 상승직장(尙乘直長), 사재주부(司宰注簿), 첨사부주부(詹事府注簿), 사직(司直), 당후관(堂後官), 종묘승(宗廟承), 통례문지후(通禮門祗侯), 소부승(少府承), 감찰사(監察史), 예문사인(禮門舍人), 내의조봉(內衣朝奉), 판도좌랑(版圖佐郞), 동경판관(東京判官), 상사조봉(尙舍朝奉), 도관좌랑(都官佐郞), 국학직송(國學直誦), 전중시사(殿中侍史)를 두루 역임하였다.
대덕(大德)
9 원년(충렬왕 23, 1297) 8월에 죄 없이 교동(喬洞)
10으로 유배되었으니, 세자[忠宣王]가 명한 것이었다. 이 해 10월 서울로 소환되어 대덕 2년에 정방(政房)에 들어갔으며, 12월에는 기거랑(起居郞)을 더하였다. 3년 정월에는 기거주 조현대부 도첨의사인 직보문각 지제고 군부총랑 보문각대제 전리총랑 문한시송관(起居注 朝顯大夫 都僉議舍人 直寶文閣 知制誥 軍簿摠郞 寶文閣待制 典理摠郞 文翰侍誦官)을 더하고, 이 해 5월에는 수찬관 지제고(修撰官 知制誥)가 되었으며, 12월에는 조봉대부 밀직사 좌부승지 비서윤 지제고(朝奉大夫 密直司 左副承旨 秘書尹 知制誥)를 더하였는데, 이는 1년 동안 옮긴 것이다. 4년 3월 성균시(成均試)를 주관하여 김낭운(金琅韻) 등 80명을 뽑았다.
11 7월에는 조의대부 밀직사지신사 지제고 지감찰사사(朝議大夫 密直司知申事 知制誥 知監察司事)를 더하고, 12월에는 국학대사성(國學大司成)을 더하였으며, 지신사 지감찰사사는 전과 같았다. 이 해에 임금을 수행하여 원에 들어갔으며, 7월에 승무랑 고려국 왕부단사관(承務郞 高麗國 王府斷事官)에 제수되었다. 5년 5월에는 문한내학 상호군(文翰內學 上護軍)을 더하면서, 지신사 지제고 지감찰사사는 전과 같이 하였다.
대덕 2년부터 5년까지 무릇 4년 동안 집정(執政)이 되고, 9월에는 봉익대부 동지밀직사사 문한학사응지 상호군(奉翊大夫 同知密直司事 文翰學士應旨 上護軍)이 더해졌다. 6년 정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었는데 나머지는 전과 같았다. 4월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시험에서 최응(崔凝) 등 33인을 얻었다.
12 7월에는 감찰대부(監察大夫)를 더하였고 나머지는 전과 같았으며, 10월에 광정대부 지도첨의사사사 보문각대사학 동제수사 상호군(匡靖大夫 知都僉議使司事 寶文閣大司學 同提修史 上護軍)을 더하였다. 7년(충렬왕 29, 1303) 윤5월에는 정당문학 연영전대사학(政堂文學 延英殿大司學)을 더하였는데 이상은 모두 충렬왕이 명한 것이다.
이 해 8월 동료들이 시기하여 참소를 입어 원의 조정으로 들어왔다. 8년 12월에 장안(長安)의 경조부(京兆府)에 머물면서 귀양살이를 할 때 한인(漢人) 엄씨(嚴氏)의 딸을 얻어 아들 하나를 낳으니, 이름이 눌(訥)이다.
지대(至大)
13 3년 경술년(충선왕 2, 1310)에 다시 변량(汴梁, 開封)으로 옮겨졌다가 황경(皇慶)
14 원년 임자년(충선왕 4, 1312) 8월에 황제의 명으로 (원의) 서울로 돌아왔으며, 충선왕을 수행하면서 잠(潛)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2년 2월에 홀로 광정대부 밀직사사 판전의시사 예문관대제 지춘추관사 상호군(匡靖大夫 密直司事 判典儀寺事 藝文館大提 知春秋館事 上護軍)으로 옮기고, 3월에 총부전서(摠部典書)로 옮겼는데 나머지는 전과 같았다. 5월에는 임금을 수행하여 고려로 돌아왔다. 7월에는 언부전서 상호군(匡部典書 上護軍)으로 옮겼으나 나머지는 전과 같았으며, 그 달에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로 옮겼는데 나머지는 전과 같았다. 12월에는 첨의평리 상의회의도감사 상호군(僉議評理 商議會議都監事 上護軍)을 더하고, 3년 정월에는 삼사사 상호군 상의도감사(三司使 上護軍 商議都監事)를 더하였다.
연우(延祐)
15 원년(충숙왕 1, 1314) 윤3월에 정윤(正尹)으로 옮기고, 3년 정월에는 원윤(元尹)으로 옮겼으며, 6년 2월에는 중대광 구성군(重大匡 龜城君)을 더하였다. 7년 11월에는 예문관대제학 중대광 첨의찬성사 지제교 지춘추관사 상호군(藝文館大提學 重大匡 僉議贊成事 知製敎 知春秋館事 上護軍)을 더하였다. 지치(至治)
16 원년(충숙왕 8, 1321) 정월 중대광 첨의찬성사 우문관사제학 감춘추관사 판총부사 구성군(重大匡 僉議贊成事 右文館事提學 監春秋館事 判摠部事 龜城君)을 더하고, 4월에는 왕을 수행하여 원의 조정으로 들어갔다. 태정(泰定)
17 원년(충숙왕 11, 1324) 2월 대도(大都)에서 연좌되어 면직되었다가, 지순(至順)
18 원년 경오(충숙왕 17, 1330)에 귀국하였다.
지원(至元 : 後至元)
19 2년(충숙왕 복위5, 1336) 8월 20일, 78세의 나이에 병으로 집에서 사망하였다. 9월 4일 대덕산(大德山) 동쪽 언덕에 묻으니, 예(禮)에 따른 것이다. 장례날이 되자 그 아들 선(僐)이 와서 아버지가 부탁한 바를 알리며, 울면서 나에게 묘지명을 청하였다. 나 또한『춘추(春秋)』를 배운 무리로서 사람의 선악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으니, 하나는 대부(大夫)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서이며, 둘째는 효자의 마음 씀씀이를 가상히 여기기 때문이다. 처음과 끝을 대략 적어서 명(銘)을 짓는다.
명(銘)하여 이른다.
씩씩한 인걸이고 당대의 굳센 영웅으로
갖추지 않은 덕이 없고 통달하지 않은 재주가 없도다.
또한 조정에 고관으로 참여하여 시중(侍中)을 바라보는 자리에 올랐으나
하릴없는 자가 책략을 부려 참소하여 공을 배신하였다.
경조(京兆)에서 귀양살이하며 멀리 해동(海東)을 바라보니
천자[天蘖]는 가히 멀어졌지만 총명한 황제가 소식을 들었도다.
특별한 조칙으로 사면을 내려 은혜로이 집으로 돌아가는 허락을 받게되니
이지러진 달은 다시 차오르고 남은 불꽃은 다시 타오르도다.
아상(亞相)에 오르는 것으로 그친 채 뜻밖에도 유궁(幽宮)을 지키게 되니
관직은 덕(德)을 갚지 못하고 작위는 공(功)을 보상하지 못하네.
사람에게는 한이 남았고, 나라에는 높은 지위에 임용할 사람이 없으니
누가 그 책무를 맡겠는가, 끝없이 넓은 푸른 하늘이여.
후지원(後至元) 2년(충숙왕 복위5, 1336) 9월 일에 광정 전 첨의 정당문학 우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匡靖 前 僉議 政堂文學 右文館大提學 知春秋館事) 야재 저헌(野齋 樗軒) 윤혁(尹奕)이 짓고, 문생(門生) 전 승랑 사설서령(前 承郞 司設署令) 이훤(李暄)이 쓰다.
〔출전:『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