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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전지묘지(朴全之墓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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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이 묘지명은『죽산박씨파보(竹山朴氏派譜)』(宣川, 1938)에 실려 있다. 이에 따르면 1788년(정조 12) 개성부(開城府) 승제문(承制門) 밖 20리 지점인 고산동(高山洞) 삼랑산(三朗山) 남쪽 기슭에서 부인인 최씨(崔氏)의 묘지명과 함께 발견되었다고 한다. 묘지명은 1325년(충숙 12) 박효수(朴孝修)가 작성하였다.묘지명 주인공인 박전지(朴全之 : 1250~1325)의 자는 반원(返圓)이다. 죽주(竹州 : 지금의 경기도 안성군 일대) 사람이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후손인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박기오(朴奇悟)의 13세손이다. 아버지는 휘(輝), 어머니는 경원군대부인(慶源郡大夫人) 이씨(李氏)로 장용(藏用)의 딸이다.묘지명에 따르면 박전지는 삼분(三墳 : 중국의 3황제)과 백가서(百家書)와 음양비결(陰陽秘訣)을 꿰뚫었으며, 글을 잘 지었고 악장(樂章)이 특히 뛰어났다고 한다. 1267년(원종 8) 국자감시, 1268년(원종 9) 과거에 급제하여 관료생활을 시작하였다. 특히 충선왕 즉위때 사림원(詞林院)의 학사로 즉위개혁에 참여하였다. 원종·충렬왕·충선왕·충숙왕때 관료로서 활약하였다. 부인은 대령군부인(大寧郡夫人)이며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으로 추증된 최씨(崔氏)로서, 염(恬)의 딸이다. 공보다 먼저 죽었으며, 1남 2녀를 낳았다. 아들은 원(瑗)이다. 장녀는 정탁(鄭倬)에게, 차녀는 이직(李稷)에게 각각 시집갔다.부인 최씨, 아들 원 및 부인 홍씨의 묘지명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어 참고가 된다.
상호군(上護軍) 연흥군(延興君) 묘지명 및 서문
전 통훈대부 밀직부사 예문관제학 동지춘추관사(前 通訓大夫 密直副使 藝文館提學 同知春秋館事)로, 본관이 같으며[本宗人] 호가 석재(石齋)인 박효수(朴孝修)가 짓다
공의 이름은 전지(全之)이고, 자는 반원(返圓)이다. 가계는 죽주(竹州)1)에서 나왔으니, 그 선조는 신라(新羅) 시조인 박혁거세(朴赫居世)로 자주빛 알에서 태어났다. 그 알이 박[瓠]과 같았으며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고을 사람들이 박[瓠]을 박(朴)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에 성을 박(朴)으로 삼고,2) 그 능(陵)을 봉하여 천흥(天興)이라고 하였다. 군은 자주빛[紫 : 박혁거세]을 이은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박기오(朴奇悟)의 13세손이다. 아버지 휘(煇)3)는 정의대부 전법판서 응선부우첨사(正義大夫 典法判書 膺善府右詹事)이고, 어머니는 경원군대부인 이씨(慶源郡大夫人 李氏)로 금자광록대부 □특진 수태□ 개부의동삼사 문하시중 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판이부 한림원사 태자태사(金紫光祿大夫 □特進 守太□ 開府儀同三司 門下侍中 修文殿大學士 監修國史 判吏部 翰林院事 太子太師)이며 시호가 문진공(文眞公)으로 추증된 장용(藏用)의 딸이다.
공이 처음 태어나자, 문진공이 총명한 재능이 있음을 알고 자신의 아들처럼 길렀다. 자라나자 널리 삼분(三墳)과 백가서(百家書)를 통달하고 아울러 음양비결(陰陽秘訣)도 꿰뚫었으며, □□방약(方藥)의 서적까지도 훤하게 알지 않는 것이 없었다. 글을 잘 지었는데 악장(樂章)이 특히 뛰어났다. 외조부가 아끼고 또 귀하게 여겨 할아버지와 손자가 서로 친구[知己]와 같이 되었다. 오직 대대로 집에 전해 오는 만 권의 서적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진실로 금덩어리를 광주리에 가득 채우는 것이 한 권의 경서(經書)를 남기는 것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 아는 법이다.
18세인 지원(至元)4) 정묘년(원종 8, 1267 )에 국자감시(國子監試)에 합격하고,5) 무진년(원종 9, 1268 ) 4월에 과거에 급제하여 방(榜)을 염전(簾前)에 내걸었으니,6) 명하여 내시(內侍)에 속하도록 하였다. 기사년(원종 10, 1269 )에 문음(門蔭)으로 바로 교서랑(校書郞)에 임명되었다.7) 신미년(원종 12, 1271 )에 여러 차례 옮겨 사의·도교·대관(司儀·都校·大官) 3서(三署)의 승(丞)이 되었다. 갑술년(원종 15, 1274 )에 양온령(良醞令)이 되었다가 곧 대관령(大官令)으로 옮겼으나 모두 한림원(翰林院)을 겸하였다. 을해년(충렬왕 1, 1275 ) 6월에 문하주서(門下注書)에 임명되고 겨울에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候)가 되었다. 정축년(충렬왕 3, 1277 ) 정월에 시지후(試祗候)로 동주군(東州郡)8)으로 나가 군의 도장[郡符]를 찼으며, 이듬해 2월에 권지후(權祗候)로 소환되었다.
□□(〔을묘년〕)(충렬왕 5, 1279 ) 봄에 비서시승(秘書寺丞)에 임명되면서 자금어대[紫金]를 하사받았다. 그 해에 우리 나라가 세조황제(世祖皇帝)의 조지(詔旨)를 받들어 공경자제(公卿子弟)를 간택하여 원의 조정에 입시(入侍)하게 하자, 공이 단연 으뜸으로 천거되어 나라를 떠나 원 조정에 이르렀다. 이에 앞서 문진공이 입조(入朝)하였는데, 학사(學士) 왕악(王鶚)9)은 금(金)나라의 장원(壯元)으로써 공<문진공>을 보자 옛친구를 만나는 것과 같아 드디어 마음을 터놓고 사귀게 되었다. 그 외조카[外甥] 한림학사(翰林學士) 왕지강(王之綱)은 공이 궁궐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두 사람이 서로 □□ 마음을 튼 것을 생각하여, 공을 데려다가 집에서 술을 마시고는 왕악의 노년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보게 하였다. 공이 우러러보며 예를 바친 뒤 시를 지어,
흰 수염에 붉은 뺨은 완연히 살아계신 듯하니
사람들은 중국의 노장원(老壯元)이라고 이야기한다.
나를 대하여 서로 쳐다보는데 어찌하여 말이 없으신가.
상공(相公)은 이미 낙헌(樂軒, 李藏用)의 손자를 알아 보시도다.
라고 하니, 온 집안의 자손들이 시를 보고 모두 눈물을 떨구었다. 이로부터 문장의 명성이 중국에 떨쳤다.
원의 서울에 머물러있으면서 공은 해마다 매 번 나이 들고 덕망 높은 학자들과 고금(古今)의 흥망과 치란(治亂)의 자취와 더불어 외국의 산천과 풍토에 관해 확실하게 대답하기를 마치 손가락이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처럼 하였다. 모두 그 총명함에 탄복하여, “공은 일찍이 눈으로 보지 않고서도 어떻게 저 나라의 풍속이 이와 같은 줄 알고 있습니까. 가히 문 밖을 나서지 않고도 천하를 아는 이라고 할만합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듣고 훌륭함을 드러낸 것을 가상히 여겼다.
중국에서 해가 감에 따라 벼슬을 더해주고 녹봉을 내려주며 포상하였다. 경진년(충렬왕 6, 1280 )부터 대덕(大德)10) 정유년(충렬왕 23, 1297 )에 이르는 18년 동안 6부(六部)와 제조(諸曺)의 3·4·5품을 두루 지내면서 학사(學士)를 겸하고 제고(制誥)를 대유(帶有)하였는데, 마치 번개가 옮겨가고 바람이 부는 것같이 빠르고 대단히 성하니 그러한 예가 없었다. 기축년(충렬왕 15, 1289 )에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의 수령이 되어 나간 것은, 공이 젊은 나이에 지위가 높은 것을 스스로 꺼려서 글[章]을 올려 직책에서 물러나기를 원하자, 임금이 벼슬에서 물러나는 것을 애석하게 여겨 지방관으로 내려보냈기[分憂] 때문이다.
병술년(충렬왕 12, 1286 )에 상국(上國, 元)에서 조칙을 내려 장사랑 정동행중서성조마 겸 충유학교수 동제거(將仕郞 征東行中書省照磨 兼 充儒學敎授 同提擧)로 임명하니, 공이 황제의 명령을 받고 귀국하였다.
무술년(1298) 태위왕(太尉王, 忠宣王)이 선양(禪讓)을 받아 즉위하게 되자 사림원(詞林院)을 가까이에 설치하여 모든 일을 맡아서 다스리게 하였으며, 겸하여 왕명을 출납하는 임무[喉舌之任]도 주관하게 하였다. 공을 봉익대부 삼사우사 사림학사승지(奉翊大夫 三司右使 詞林學士承旨)로 삼았다가 얼마 뒤 밀직학사 중경유수11)(密直學士 中京留守)를 더하였다. 항상 원(院, 詞林院) 내에 머물면서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정사를 논의하니, 무릇 관호(官號)를 고치고 관작(官爵)을 주고 빼앗는 것이 모두 공의 한 손에서 나왔다.
변고가 예측하지 못한데서 일어나 일수왕(逸壽王, 忠烈王)이 복위하게 되자, 공은 전 임금에게 총애를 극진히 받았던 까닭에 관직에서 물러나 한가로이 지냈다. □□ 태위왕이 성종황제(成宗皇帝)가 즉위할 때 특별히 뛰어난 공을 세워 명성을 사방에 떨치면서 그 본국의 관작을 올리거나 내려주고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한결같이 모두 오로지 한 까닭에, 정미년(충렬왕 33, 1307 ) 봄에 봉익대부 밀직부사 보문각대사학(奉翊大夫 密直副使 寶文閣大司學)에 임명되었다. 가을에 판밀직사 제수사(判密直司 提修史)가 더해지고 곧 광정대부(匡靖大夫)를 더하였으며, 겨울에 □성(□省)하여 정당문학 첨의도감사(政堂文學 僉議都監使)가 되었다. 지대(至大)12) 무신년(충선왕 즉위, 1308 )에 검교평리(檢校評理)로써 온주13)목사(溫州牧使)가 되어 나갔다. 이것은 폄출(貶黜)된 것이 아니었으니, 태위왕이 글을 내려서 청렴하고 가난함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기유년(충선왕 1, 1309 ) 6월에 중대광 첨의찬성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판선부사(重大匡 僉議贊成事 右文館大提學 監春秋館事 判選部事)로 물러나 은퇴하고, 연우(延祐)14) 기미년(충숙왕 6, 1319 ) 4월에 추성찬화공신 예문관대제 검교첨의정승 감춘추관사 연흥군(推誠贊化功臣 藝文館大提 檢校僉議政丞 監春秋館事 延興君)이 되었다. 지대(至大) 기유년(충선왕 1, 1309 )부터 지치(至治)15) 신유년(충숙왕 8, 1321 )에 이르기까지 때로는 의회(議會)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군(君)으로 봉해졌으며 혹은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하기도 하면서, 아침에는 (조정에) 들어가고 저녁에는 나오는 것을 되풀이하였다. □(〔이와〕) 같이 한 것은 공이 비록 쇠약해졌지만 다스리는 이치에 밝아, 뛰어난 지혜가 조정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임금<충숙왕>이 (공이) 병들고 쇠약하여 다시 기용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태정(泰定)16) 을축년(충숙왕 12, 1325 ) 4월에 삼중대광 수첨의정승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상호군(三重大匡 守僉議政丞 右文館大提學 監春秋館事 上護軍)으로 승진하여 은퇴하게 하면서 연흥군(延興君)과 공신호(功臣號)는 예전과 같이 하였다. 지난 정사년(충숙왕 4, 1317 ) 8월에 과거[禮闈]를 주관하여 장복령(掌服令) 홍의손(洪義孫)을 첫째로 뽑으니,17) 삼한에 과거가 치러진 이래 서대(犀帶)18)를 두르고 시험에 응시한 것이 오직 이 때 뿐이었다. 나머지들도 모두 세상에서 이름을 떨쳤으므로 문학하는 선비들을 이야기하는 자들이 아름답게 여겼다.
아, 공의 품성은 온화하고 뜻이 깊고 고상하였으며 사람을 예로써 대우하니, 보는 자들이 기꺼이 공경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한 까닭에 중국의 소림장로(小林長老)가 한 번 보고는 훌륭하게 여겨 모습을 그려 진상(眞像)을 전하게 하고 남악(南嶽)의 철산화상(鐵山和尙)19)이 찬(讚)을 지었으니, 가히 고상한 풍모와 밝은 기운이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감격하게 함을 알 것이다. 스스로 호를 지어 행산몽천무구거사(杏山蒙泉無垢居士)라고 하였으며, 항상『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을 외우면서 ‘무자(無字)’ 화두(話頭)를 더욱 절실하게 하였는데, 즐거운 소식을 들으면 술잔을 기울이면서도, 일찍이 한 번도 ‘무자(無字)’를 거론하지 않는 적이 없었다.
아, 향년 76세인 을축년(충숙왕 12, 1325 ) 7월 계유일의 술시(戌時) 초에 병색을 보이다가 갑술일 묘시(卯時)에 홀연하게 떠나니, 슬프다, 어찌 그처럼 빠르게 가시는가. 임금이 듣고 슬퍼하며 시호를 추증하여 문광(文匡)이라 하고,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장례지낼 차비를 갖추게 하였다. 8월 갑진일에 백관이 모여 성부(城府)에서 20여 리 되는 삼랑산(參廊山) 언덕에 장례지내게 하였다.
공의 부인은 대령군부인(大寧郡夫人)이며 변한국부인(卞韓國大夫人)으로 추증된 최씨(崔氏)이다. 조정대부 위위경 동궁시독학사 지제고(朝靖大夫 衛尉卿 東宮侍讀學士 知制誥) 염(恬)의 딸인데, 공보다 먼저 죽었으며 1남 2녀를 낳았다. 아들 원(瑗)20)은 예문관제학 정순대부 밀직사우부대언 성균관대사성 지제교 동지춘추관사 지삼사사(藝文館提學 正順大夫 密直司右副代言 成均館大司成 知製敎 同知春秋館事 知三司事)로 당성군부인 홍씨(唐城郡夫人 洪氏)와 결혼했는데,21) 광정대부 첨의찬성사 상호군(匡靖大夫 僉議贊成事 上護軍)이며 추증된 시호가 양순공(良順公)인 홍경일(洪敬一)의 딸로, 5남 2녀를 낳았다. 장녀는 연흥군부인(延興君夫人)으로 전 광정대부 첨의평리 상호군(前 匡靖大夫 僉議評理 上護軍) 정탁(鄭倬)에게 시집가서 1남 2녀를 낳았고, 차녀 연흥군부인은 이미 사망하였는데 □□랑 요물고부사(□□郞 料物庫副使) 이직(李稷)에게 시집가서 1남 5녀를 낳았다.
성대하도다.『시경(詩經)』에 이르는 바 ‘마땅히 그대 자손들은 창성할 것이로다’와 같이 되었도다. 장례를 지내면서 아들 원이 돌을 다듬고, 사라지지 않게 하고자 묘지명을 청해 돌에 새기고자 하였다. □□ 공은 □□ 의리를 중하게 여겼으니, 감히 재주가 모자란다고 사양할 수 있겠는가.
마침내 명(銘)을 지어 이른다.
하늘에서 자주빛 알이 내려와 비로소 귀한 가문이 열리니
그 누가 세계(世系)를 이었는가, 연흥(延興)이 그에 봉해지도다.
4대에 걸쳐 임금을 돕고 충성하니 왕업이 떨쳐지고 공훈을 세우면서
명군(明君)과 양신(良臣)이 도(道)로써 맺어지니 용이 날자 구름이 따르는 듯하도다.
긴 수명과 높은 관직이 나에게 편중되었으니
푸른 옷소매와 자주빛 옷을 입었으되 조그마한 더러움도 용납하지 않았도다.
풀잎에 찬 이슬이 맺혔으니 어찌 생애가 끝나지 않을 것이며
바람이 가을 나무 사이로 슬프게 부니 무성한 소나무에는 □□.
덕 있고 길한 무덤은 봉우리 사이에 우뚝 솟아 있으니
자손은 만세토록 솥[鼎]과 종(鍾)에서 빛나리로다.22)
태정(泰定) 2년 을축년(충숙왕 12, 1325 ) 8월 일 돌에 새기다.
〔출전:『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