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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성진력안정공신 삼중대광 남양부원군(推誠陳力安定功臣 三重大匡 南陽府院君) 홍규(洪奎) 묘지명
<결락> 인간 세상을 내려다보며 티끌과 쭉정이나 겨처럼 낮게 보아 족히 쳐주지도 않지만, 간혹 잘못을 범하여 세상에 내려오게 되는 것을 면하지 못하는 경우도 때때로 있다. 어찌하여 그러한 줄 알 수 있는가. (그들의) 인품이나 생각이 보통의 무리들과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옛날 하감(賀監)이 이태백(李太白)을 일러 귀양온 신선이라고 한 것이 그것이니, 지금 남양부원군 또한 그 무리에 속하지 않겠는가.
공의 이름은 문계(文系)인데 고쳐서 규(奎)라고 하였으며, 자는 미루(彌樓)이다. 중고(中古) 시기의 이름난 재상인 <결락> <개부의>동삼사 문하시랑평장사 판이부사 상장군 상주국(<開府儀>同三司 門下侍郞平章事 判吏部事 上將軍 上柱國) 홍관(洪灌)의 손자 원중(源中)이 증조인데, 관직이 성불도감판관(成佛都監判官)에 그쳤으니 내가 생각하건대 일찍 세상을 떠나지 않았는가 한다. 은청광록대부 추밀원사 공부상서(銀靑光祿大夫 樞密院使 工部尙書) 사윤(斯胤)은 조부이고, 은청광록대부 동지추밀원사 형부상서 한림학사(銀靑光祿大夫 同知樞密院事 刑部尙書 翰林學士) <결락><홍진(洪縉)은 아버지이다.> 당성(唐城)
2에서 비롯하였으니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학사의 배필은 창원군부인 최씨(昌原郡夫人 崔氏)로 공을 낳았으니, 공의 내외 조상은 모두 뛰어난 가문[衣冠甲族]이다.
(공은) 처음 권무(權務)가 되었다가 곧 산원(散員)으로 바뀌었으나, 그대로 금모(金帽)를 쓰고 금의(錦衣)를 입은 채 견룡(牽龍)을 이끄는 행수(行首)가 되어 임금 가까이에서 금장(禁杖)을 받들었으며, 흑삭장군 겸 어사중승(黑槊將軍 兼 御史[栢署]中丞)으로 옮겼다. 위사공신(衛社功臣) 임연(林衍)은 평미한 가문에서 출세한 자인데 일찍이 간절하게 (공에게) 사위가 되라고 청하였다. <결락> 사위가 되었으나 여러 차례 불손한 말을 하므로 꾸짖고 모욕을 주었는데, 임공은 <결락> 비록 시기심이 많고 잔인하였지만 성낸 얼굴을 지을 수 없어서 짐짓 못 들은 척하였다. (원종 10, 1269, 元宗을) 폐하고 (安慶公 淐을) 세워 국병(國柄)을 오로지 잡고 권신(權臣)이 되려 하였다. 당시 원종은 상국(上國 : 蒙古)에 들어가 엄명을 받고 도읍을 옮겨 육지로 나가고자 하여 군사의 호위를 받으면서 우리 나라로 돌아왔다. 임공(林公 : 林衍)은 이미 죽고 그 아들 유무(惟茂)
3가 이어 정권을 잡아 불궤(不軌)를 도모하니, 삼한(三韓)이 모두 “나라가 나라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두려워하였다.
<결락><경오년(원종 11, 1270)> 3월 15일에 공이 대장군(大將軍) 송송례(宋松禮)와 <결락> 지략과 용기로써 굳센 정예를 몰아 부(府)를 습격하여 유무와 그의 무리들을 징벌한 뒤에 문무 군신들에 앞서 임금의 행차를 맞이하러 나갔다. 왕업이 이로 말미암아 무너지지 않았으니, 그 뛰어난 공훈은 어찌 황하(黃河)가 띠 같이 좁아지고 태산(泰山)이 숫돌처럼 작아진다[帶礪]고 하더라도 잊지 아니하겠는가. 이 해 12월에 비(批)를 내려 우부승선(右副承宣)에 임명하고, 임신년(원종 13, 1272 )에는 은청광록대부 추밀원(銀靑光祿大夫 樞密院) <결락><제수하였으나 사양하여 취임하지 않았다. 일찍이 세자가> 황제가 있는 곳으로 조회하려 갈 때 함께 갔다. 이에 아홉 겹으로 된 아름다운 도포[九袍雲錦]과 고삐가 두 개 달린 은으로 된 안장[雙勒銀鞍]을 내려주며 장려하고, 유시(諭示)를 내려 마땅히 1·2품의 관직을 상으로 주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공은 내려주는 물품은 받고 관직은 사양하였으니, 하물며 이와 같은 본국의 관직에 있어서이겠는가. 그러나 사양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교서(敎書)를 내려, “짐이 옛날에 상국에 친히 조회하러 갔을 때 황제가 (강화에서) 나와 옛 도읍에 자리를 잡으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대군(大軍)과 함께 우리 땅으로 들어오니, 천 리에 걸쳐 그물을 펼친 것처럼 늘어서서 떠들썩하였습니다. <결락> 공은 학사(學士) 집안에서 나와 장군의 반열에 올랐는데, 권문(權門)과 혼인한 것이 어찌 본심으로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대의(大義)로 친척을 멸하였으니, 오직 충절에 따라 행동한 것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의심을 칼 아래에서 확연하게 벗어버리고 군사들 앞에서 임금의 행차를 받들어 맞이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돈독하게 타이르자 공은 사례하는 표(表)를 올렸는데 대략 다음과 같다.
“사직이 아직 편안하지 않지만, 감히 거문고를 타고 글씨나 쓰는 편안함을 따르고자 합니다. 꼴과 나무를 베는 천한 이들도 가히 골라 쓰면 부지런하게 국가를 도울 지략을 내는 것을 바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래되지 않아 공이 또 <결락><사직하기를 원하니 허락받아>
4 전원에서 지낸 것이 거의 20년이 되었다. 신묘년(충렬왕 17, 1291 )에 비(批)를 내려 추충안사공신 광정대부 첨의시랑찬성사(推忠安社功臣 匡靖大夫 僉議侍郞贊成事)로 삼았다. 을미년(충렬왕 21, 1295 )에 광정대부 삼중대광 도첨의중찬(匡靖大夫 三重大匡 都僉議中贊)으로 삼았는데, 이들은 치사직(致仕職)이니 공의 희망에 따른 것이다. 정유년(충렬왕 23, 1297 ) 10월 일에 벽상삼한 삼중대광 광정대부 수사도 판삼사사(壁上三韓 三重大匡 匡靖大夫 守司徒 判三司事) <결락>로 삼고, <결락> 숭록대부 수사도 경령전사(崇祿大夫 守司徒 景靈殿事)에 임명하였다. 무신년(충선왕 즉위, 1308 )에 익성군(益城君)에 봉해졌다. 경술년(충선왕 2, 1310)에 삼중대광 수첨의정승 상호군 행한양부윤 익성군(三重大匡 守僉議政丞 上護軍 行漢陽府尹 益城君)으로서 (한양에) 출진(出鎭)하였다. 12월 14일에는 지익성군
5사(知益城郡事)로 옮겼는데 고향[本邑]에 임명된 것은 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심왕(瀋王)이 다시 권하여 나온 것으로 높은 지위이다. 그렇지만 스스로 녹(祿)을 <결락><사양하였다?>. 갑인년(충숙왕 1, 1314 ) 정월에 추성진력안정공신 삼중대광 남양부원군(推誠陳力安定功臣 三重大匡 南陽府院君)을 제수하고, 전첨(典籤)과 녹사(錄事) 등 보좌 막료들을 갖추게 하는 특별한 상을 주었다.
공은 몸집이 크고 용모가 수려하였다. 젊을 때[妙齡]부터 거문고와 바둑을 잘 하였고, 말을 타고 격구(擊毬)하는 놀이는 호협(豪俠) 중에서 가장 뛰어났지만, 하루아침에 모두 그만 두고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오직 글하는 선비[文儒] 중 이름난 이들과 <결락> 글을 지으면서 즐거움을 삼았으며, 행서(行書)와 초서(草書)에 더욱 뛰어나 따로이 일가(一家)의 기공(氣骨)을 이루었다. 시를 지으면 반드시 소리와 가락이 맑고 높으며 호방하였으니,『망천시(輞川詩)』와 같은 한 편의 시를 보면 나머지는 가히 알 수 있다. 비록 존귀한 사람일지라도 뜻에 거슬리게 되면 반드시 수염을 떨치면서 중니(仲尼 : 孔子)처럼 지팡이를 휘두르고 양자(楊子)처럼 담장을 가리키니, 그 엄중함을 꺼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한 번 나가고 한 번 물러날 때마다 스스로 행동한 것을 성찰하고 헤아리기 반복하여 능히 가볍게 움직이지 않았다. <결락> 선비의 문호가 고요하였으며 <결락> 낮에도 겹문으로 가리고 새그물[雀羅]을 설치하고는 정성을 오로지 하여 부처를 섬겼다. 벽 위에 시 한 수를 걸었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어찌 불 태운 단약(丹藥)을 써서 힘들게 젊은 얼굴을 유지하고
시끄럽다고 성시(城市)를 욕하며, 고요하다고 산을 나무라랴.
사람들이 장생(長生)하는 약을 물어온다면
사물에게 무심(無心)함, 그것이 바로 크게 환생하는 것이라고 하겠네.
좌우명이 이와 같다면 그 가슴 속에 어찌 한 점이나마 티끌이 있겠는가.
후취(後娶)는 금자광록대부 지문하성사 이부상(金紫光祿大夫 知門下省事 吏部尙) <결락> 사(事) 김련(金鍊)의 딸인 광주군대부인 김씨(光州郡大夫人 金氏)인데, 1남 5녀를 낳았다. 아들<戎>은 지금 대광 삼사사 상호군(大匡 三司使 上護軍)이고, 장녀는 중국 좌승상(中國 左丞相) 아고알(阿高歹)에게 시집갔고,
6 2녀는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 정해(鄭瑎)에게 시집갔으며, 3녀는 순화원비(順和院妃 : 忠宣王妃)이고, 4녀는 밀직부사(密直副使) 원충(元忠)
7에게 시집갔으며, 5녀는 지금 덕비(德妃)
8이다. 자손[蘭玉]이 영화롭게 현달한 것이 이와 같고 양대(兩代)에 요조숙녀가 되어 <결락> 매우 귀하게 되었으니 어떠한가.『주역(周易)』에서 말하기를 ‘착한 일을 한 집에는 반드시 복이 뒤따른다’고 하였는데, 내가 오늘 그것을 보았다.
나이 75세인 연우(延祐)
9 3년(충숙왕 3, 1316 ) 6월 23일에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나니, 온 나라가 슬퍼하며 탄식하였다. 마침 이 <결락> 때가 장례 지낼 달을 택하기가 <결락> 마땅하지 않았는데, 다만 7월 28일이 범하는 것이 없어 길하였다. 양부(兩府 : 僉議府와 密直司)가 역마를 달리게 하여 장례날을 알리고 왕명을 얻어 장례를 치렀는데, 시호를 광정공(匡定公)이라고 추증하였다. 점을 쳐서 덕수현
10 저룡동(德水縣 猪龍洞)에 무덤을 정하였는데, 장례 날에 앞서 삼사 상공(三司 相公 : 洪戎)이 묘지명을 간곡하게 청하였다. 나는 공에게 부끄럽게도 가장 두텁게 보살핌을 받았으니, 감히 늙고 둔하다고 하여 사양할 수 있겠는가. 삼가 글을 짓는다.
명(銘)하여 이른다.
<결락> 도우니 참으로 정성되이 나아가고,
<결락> 이루고 또 천해지니 분수를 넘어 영화가 길어지도다.
공은 벌열에서 태어나 또한 공명을 세웠으나,
스스로 높은 벼슬[冠冕]을 사양하고 도리어 홀가분한 몸을 좋아하도다.
한 마음으로 부처를 모시며 향을 피우며 정성을 다하고
금지옥엽 같은 자손은 귀하기가 왕성(王城)에 으뜸이로다.
군(君)으로 봉해지고 부(府)를 세우니 지극한 총애가 사람을 놀라게 하였으나
문을 항상 낮에도 걸어닫으니 청탁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도다.
<결락><집안 살림에 관심을 두지 않고?> 진실로 검소하고 진실로 청렴하였으나,
어찌 병이 들어 갑자기 세상을 버리는가.
산이 있고 땅이 있어 맥락(脈絡)이 분명한데
그 땅에 안장하니 영원히 상서롭도다.
좋은 돌에 명(銘)을 새겼으니 무덤을 환하게 빛내리로다.
중대광 검교첨의정승 영예문관사 임해군(重大匡 檢校僉議政丞 領藝文館事 臨
海君) 이진(李瑱)이 짓다.
〔출전:『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