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신 내시 검교호부상서 시대복소경(內侍 檢校戶部尙書 試大僕少卿) 윤공(尹公) 묘지명
공의 이름은 언민(彦旼)이고, 자는 일장(日章)으로, 그 선조는 평산 파평현(平山 波平縣)
1 사람이다. 증조 선지(先之)는 군기감(軍器監)에 추증되고, 조부 집형(執衡)은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에 추증되었으며, 아버지 관(瓘)은 수대위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守大尉 門下侍中 判尙書吏部事)로 문숙공(文肅公)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이씨(李氏)는 경원군부인(慶源郡夫人)으로 검교태자소보(檢校太子少保) 성간(成幹)의 딸이다.
공은 어려서 공부할 때부터 사람됨이 담백하고 조용하였다. 불교에 마음을 돌려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을 즐겨 읽고, 견성(見性)과 관공(觀空)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부처를 섬기는 일 이외에 또 의술을 공부하여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을 일로 삼았으니, 진실로 마음에 아무 집착이 없어 가히 얽매이지 않은 사람이라 할만하다.
처음 가음(家蔭)으로 벼슬길에 나가 조정에 이름을 올렸으며, 제기도감판관(祭器都監判官)을 거쳐 내시원(內侍院)에 속했다가, 거듭 승진하여 봉선고판관 내고부사 시예빈주부(奉先庫判官 內庫副使 試禮賓主簿)에 이르렀다. 을묘년(인종 13, 1135) 여름에 임금의 명령을 받아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候)에 임명되고, 이어서 시전중내급사(試殿中內給事)와 성주
2방어사(成州防禦使)에 올랐다.
관직에 임해서는 재산을 모으지 않고, 날마다 푸른 소를 타고 관청에 나가 낮에는 일을 처리하고 밤에는 불경을 외었다. 인종(仁宗)이 그 실상을 듣고 탄복하기를 마지않다가, 그 모습을 손으로 그려 그림을 만들게 하고, 그림 위에다 임금의 글씨를 더하여 ▨일장선생이 푸른 소를 타고 불경을 외우는 그림[日章先生騎靑牛念經之圖]▨이라고 불렀는데, 온 주(州)의 사람들이 베껴 전하는 일이 성행하였다.
경신년(인종 18, 1140) 봄에 왕명으로 다시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候)가 되고, 시합문지후(試閤門祗候)와 시전중내급사(試殿中內給事)를 거쳐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았으며, 시상식봉어 합문부사 시병부낭중 지합문사 시위위소경 광주목부사(試尙食奉御 閤門副使 試兵部郞中 知閤門事 試衛尉少卿 廣州牧副使)에 올랐다. 경오년(의종 4, 1150) 봄에 서울로 들어가 시공부낭중(試工部郞中)에 임명되고 시대복소경(試大僕少卿)에 올랐다. 이 때 마침 숙환이 생기자 글을 올려 한가한 관직을 청하니 안서대도호부사(安西大都護府使)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그 병이 낫지 않고 날이 갈수록 더해지자, 병 중에 다음과 같은 송(頌)을 지었다.
봄이 가고 다시 가을이 오니, 복숭아는 붉고 물은 푸르구나.
▨(〔서쪽에서〕) 다시 동쪽으로 가니 우리의 진군(眞君)을 지켜주네.
금일은 병중에 있어서 ▨▨▨ 신세이니
먼 하늘 만 리(里)의 한 점 떠가는 구름은 서방으로 가네.
3
향가(鄕歌) 한 관(關)도 지어 붙였다.
정원(貞元)
4 2년 갑술년(의종 8, 1154) 3월 8일에 집에 있을 때 ▨행승(▨行僧) 담여(曇如)에게 명하여 ▨ 정화수(井花水) 한 잔을 떠오게 하여 마시자 뱃속에 있던 오물들을 ▨ 토해냈다. 얼마 있다가 날짜와 시각을 물으며 “나는 곧 죽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다음날 병야(丙夜)
5가 되니 결가부좌(結跏趺坐)를 하고
<뒷면>
향을 사르고 손을 거두었는데, 죽음을 보기를 집에 돌아가는 것처럼 여기며 평안하게 돌아가셨다. 향년 60세이고, 그 용모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그 뒤 ▨ 평생 더불어 지낸 도가(道家)와 석가(釋家)의 고류(高流)들이 모두 앞에 나와 분향하고 예를 바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명문의 후예로서 은둔하였지만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학식과 도량을 지녔고, 두 임금을 섬기면서 내시[內宦]에는 들어갔으나 중추원[天庭]직은 역임하지 못하였다. 벼슬이 경상(卿相)과 같이 귀한 자리에는 오르지 못하고 관직이 아경(亞卿)에 그친 채 돌아가시니, 이는 ▨ 나라를 위하여 길이 통▨(〔痛歎〕)할 일이다.
공은 이씨(李氏)와 결혼하였는데, 돌아가신 참지정사(叅知政事) 안간공(安簡公, 李寵麟)의 딸이다. 7남을 두었는데, 장남 치허(致虛)는 불성사 주지(佛聖寺 住持)로 중대사(重大師)이고, 차남 명첨(明瞻)은 도원도관역사(桃源道館驛使)이며, 3남 청첨(淸瞻)은 관직은 가지고 있으나 품계에 오르지 못하였고, 4남 효수(孝脩)는 우엄사 주지(隅嚴寺 住持)로 중대사(重大師)이며, 다음은 사첨(師瞻)과 수첨(壽瞻)은 역시 관직은 있으나 품계는 없다. 7남 덕원(德元)은 어려서 광명대선사(廣明大禪師)를 따라 ▨ 출가하였다. 딸은 2명이 있는데, 장녀는 구복원판관 우군녹사(句覆院判官 右軍錄事) 진윤승(陳允升)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이미 시집갈 나이가 되었으나 가정의 도리를 아직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이 달 20일에 서울 동북쪽 운용산(雲湧山)의 동쪽 기슭에 장례지냈다. 묘지명을 쓰는 날, 영고(永固)의 사위 사첨(師瞻)은 공의 6남인 까닭에, 여러 아들들이 가록(家錄) 1권을 나에게 보내어 두세 차례 묘지명을 지어주기를 간청하도록 하였다. 하물며 영고(永固)는 일찍이 공과 함께 광주(廣州)에 근무하면서 공을 막부(幕府)에서 보좌할 때 평소 공이 의리를 숭상한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사양하지 못하고 곡하며 명(銘)을 짓는다.
문숙공(文肅公, 尹瓘)은 일찍이 나라를 다스리는 자리에 올라
나가서 장수가 되고 들어와 재상이 되니 큰 공을 세웠다.
집안의 아들과 사위에게 이어져 모두 조정에 가득 찼으나
오직 막내인 일장(日章)공은 오히여 남들과 특별히 달라서,
신선계(神仙界)에서 노닐며 구속을 받지 않고
더욱이 불교에 뛰어나서 견성(見性)하고 관공(觀空)하였네.
끝을 잘 맺을 줄 알아 태연하게 앉아서 돌아가셨으나
나이가 육순[下壽]에 그치고 지위가 아경(亞卿)에 그쳤으니
사람들이 애통해 하네.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정원(貞元) 2년 갑술년 3월 일 문림랑 전 감찰어사(文林郞 前 監察御史) 방입기(邦立基)가 짓고, 문인(門人)인 승려 호심초당(湖心草堂) 계휴(繼休)가 글씨를 쓰다.
처 경원군부인 이씨(慶源郡夫人 李氏)는 참지정사(叅知政事) 이총린(李寵鱗)의 장녀이다. 갑오년(명종 4, 1174) 정월 6일에 파평현(波平縣)에서 돌아가시니, 노후를 보낸 곳이다. 향년 80세이다. 정유년(명종 7, 1177) 5월 21일에 홍호사(弘護寺) 북쪽 언덕에 나란히 유골을 옮겨, 부부를 함께 장례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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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