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군비(柴將軍碑)
- 시대
- 신라
- 연대
- 미상
- 유형
- 비문
- 크기
- 높이 68.0cm, 너비 61.0cm, 별석 높이 57.0cm, 너비 58.0cm
- 소재지
-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 216 직지성보박물관
- 서체
- 해서(楷書)
- 찬자 /각자 /서자
- 미상 / 미상 / 미상
- 지정사항
- 비지정유산
- 연구정보
개관
시장군비는 1999년에 경북 김천시 남면 월명1리 203의 1번지의 미륵암에서 발견되었다. 미륵암은 단칸의 소암자로서 불전 안에 큰 석불이 하반부가 매몰된 채 있었는데, 하반부를 노출시키기 위하여 불전을 철거하고, 불상 주변을 발굴하던 중에 비편 3개를 수습하게 되었다. 비편들은 현재 직지사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가장 큰 비편은 15행에 행마다 21자가 새겨져 있다. 이 비편은 비의 오른편 위쪽에 해당되기 때문에 비의 하단과 좌변이 파괴되었다고 볼 수 있다. 비의 건립연대는 660년(백제 멸망)에서 668년(고구려 멸망) 사이로 추정되며, 그 내용은 당(唐)나라의 가림도행군총관(加林道行軍摠管), 함자도행군총관(含資道行軍摠管)을 역임한 시장군(柴將軍)이 정사초당(精舍草堂)을 건립한 것으로 정리된다. 여기에 보이는 정사초당이 바로 비편이 출토된 미륵암으로 보인다. 시장군(柴將軍)은 『구당서』와 『신당서』에 보이는 시철위(柴哲威)일 가능성이 높은데, 그는 당 태종의 외척인 시소(柴紹)의 아들이다. 시장군은 백제를 멸망시키고, 가림도행군총관(加林道行軍摠管)으로 김천 방면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때 신라사신이 새로이 연호를 바꾼 용삭(龍朔)을 당에서 받아오고, 게다가 자신에게 고구려 정벌을 명령하고 함자도행군총관(含資道行軍摠管)을 제수하자, 이에 감격하여 정사초당(精舍草堂)을 짓고 그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비를 세운 것으로 판단된다.
관련 금석문
판독문/해석문
전체 1개
판독문 | 장충식 |
참고문헌
전체 3개 / 페이지 ( 1 / 1 )
단행본 | 2002 | 『한국고대금석문종합색인』 |
논문 | 2002 | 민덕식, 2002, 「唐 柴將軍 精舍草堂碑에 대한 檢討」『百濟文化』31, 公州大百濟文化硏究所 |
논문 | 1999 | 張忠植, 1999, 「金泉 彌勒庵 柴將軍碑의 調査」『韓國古代史硏究』15, 서경문화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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