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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昌原 鳳林寺址 眞鏡大師塔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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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봉림사진경대사적조탑비는 본래 경상남도 창원시 봉림동 165번지 봉림사터에 있었으나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보관하고 있다. 탑비의 전체 높이는 3.37m이고, 비신의 높이는 1.71m, 너비는 99cm이며, 비신의 일부가 파손되어 새로 보완하였다. 보물이다. 진경대사의 속성은 신김씨[김유신의 후손]이고, 법호는 심희(審希)이며, 선종 9산문의 하나인 봉림산문(鳳林山門)을 개창한 사람이다. 대사는 853년(문성왕 15)에 태어나 9세에 출가하였으며, 현욱(玄昱)에게서 선법(禪法)을 배웠다. 888년(진성여왕 2)에서 904년(효공왕 8)까지 설악산, 명주(溟州)의 산사(山寺), 김해의 진례성(進禮城) 등지에서 교화활동을 폈고, 특히 진례성(進禮城)에서는 김해지역의 호족인 김율희(金律熙)와 김인광(金仁匡)의 후원을 받기도 하였다. 918년(경명왕 2)에 경문왕의 부름을 받아 신라 궁궐에 들어가 설법하였고, 이후 봉림사로 돌아와 제자 양성에 주력하다가 923년(경명왕 8) 4월 24일에 70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탑비는 그 다음해인 924년에 건립되었으며, 비문은 경명왕이 직접 지었다. 글씨를 쓴 사람은 문하제자 행기(幸其)이고, 최치원의 사촌 동생인 최인연(崔仁渷)이 전액(篆額)을 썼다. 비문의 내용은 신라말기 봉림산문의 조사(祖師) 계승 관계, 김해지역 호족세력의 변천, 선종사상의 성격을 연구하는 핵심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고(故) 진경대사의 비 유당 신라국 고국사 시진경대사 보월능공지탑 비명 및 서 문하승 행기가 교를 받들어 쓰고, 문인인 조청대부 전 수집사시랑 사자금어대 최인연이 전액을 쓰고, 내가 짓는다.내가 듣건대, 높고 높은 하늘의 현상은 광활함을 차지하는 이름만이 아니고, 두텁고 두터운 땅의 모습은 깊고 그윽함을 칭하는 이름만은 아니다. 저 선(禪)에 깃든 상사(上士)와 법을 깨친 진인(眞人) 같을 수야 있겠는가. 그러한 사람만이 사대(四大)를 초월하여 즐거이 노닐며 경치를 구경하고 삼단(三端)을 피하여 한가로이 거하며 달을 희롱하다가, 마침내 호가호위하는 선백(禪伯)으로 하여금 혼란한 시절에 마▨(魔▨)를 일소하게 하고, 법령을 좇는 법왕(法王)으로 하여금 태평한 시절에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돕게 하여, 자비의 구름이 다시 드리우고 불일(佛日)이 거듭 빛나며, 외도(外道)를 모두 물리쳐 하늘 끝까지 따르고 복종하며, 비밀스런 인(印)을 가지고서 심오한 뜻을 발휘하며, 그윽한 그물을 들어서 진실한 종지를 널리 드러내게 할 수 있으니, 오직 우리 대사가 바로 그 사람이다. 대사의 이름은 심희요, 속성은 김씨이니, 그 선조는 임나의 왕족이요, 풀에서 성스러운 가지를 뽑았다. 이웃나라의 침략에 괴로워하다가 우리나라에 투항하였다. 먼 조상인 흥무대왕은 오산(鼇山)의 정기를 타고, 바다(鰈水)의 정기에 올라서, 문신의 길조를 잡아 재상의 뜰에 나왔고, 무신의 지략을 잡아 왕실을 높이 부양하였으며, 평생토록 ▨▨하여 두 적이 영원히 안정되고 토군(兎郡)의 사람들이 능히 세 조정을 받들어 멀리 진한(辰韓)의 풍속을 어루만졌다. 아버지 배상(盃相)은 도(道)는 노장사상을 높였고 뜻은 송교(松喬)를 흠모하였으며, 물과 구름이 비록 그 한가로움을 내버려둔다 할지라도 조야(朝野)는 그가 벼슬을 귀히 여기지 않음을 아쉬워 하였다. 어머니 박씨가 일찍이 앉은 채로 선잠이 들었다가 꿈에 휴▨(休▨)를 얻었다. 나중에 미루어 생각해 보고는 깜짝 놀라며 임신을 하였다. 곧 냄새나는 음식을 끊고 그 몸과 마음을 비웠으며, 가만히 그윽한 신령에 감응하여 지혜로운 아들을 낳기를 빌었다. 대중(大中) 7년(853) 12월 10일에 태어났다. 대사는 기이한 자태가 넉넉히 드러났으며 신비한 색이 원융하게 밝았다. 나이 어려서도 철부지같은 마음은 없었으며, 이를 가는 7,8세의 나이에도 불사(佛事)를 ▨▨하였다. 모래를 쌓아 탑을 이루고, 잎을 따다 향으로 바쳤다. 아홉 살에 혜목산(惠目山)으로 곧장 가서 원감대사(圓鑑大師)를 알현하니, 대사는 지혜의 싹이 있음을 알고 절(祇樹)에 머물 것을 허락하였다. 나이 비록 어렸지만 마음은 오히려 정성을 다하였다. 부지런히 애쓰는 데는 고봉(高鳳)도 공을 미루고 민첩함에는 양오(揚烏)도 아름다움을 양보할 만 하였다. 좇아서 승▨(僧▨)를 밟고 법당을 떠났다. 함통(咸通) 9년(868)에 스승이 병에 걸려 대사를 불러 말하기를, “이 법은 본래 서천(西天;인도)에서 동쪽으로 왔으며, 중국에서 꽃이 한번 피자 여섯 잎이 번성하였다. 대대로 서로 전승하여 끊임이 없도록 하였다. 내가 지난번에 중국에 가서 일찍이 백암(百巖)을 사사하였는데, 백암은 강서(江西)를 이었고 강서는 남악(南嶽)을 이었으니, 남악은 곧 조계(曺溪)의 아들이며 숭령(嵩嶺)의 현손이다. 비록 전신가사(傳信架裟)는 전하지 않았으나 심인(心印)은 서로 주었다. 멀리 여래(如來)의 가르침을 잇고 가섭(迦葉)의 종지를 열었다. 그대는 마음의 등불을 전하라. 나는 법신(法信)을 부촉하노라” 하고는 아무 말도 없이 스스로 열반(泥洹)에 들어갔다. 대사는 눈으로 이별함에 슬픔이 깊고 마음으로 사별함에 수심이 간절하였다. 스승을 잃은 애통함은 더 쌓이고 배움이 끊긴 근심은 실로 더하였다. 19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이윽고 계율을 지킴에 마음이 들떠서 정처없이 발길 닿는 대로 떠돌아 다녔으니, 산 넘고 물 건너 여러 지방을 떠돌아 다니는 것이 어찌 수고롭겠는가. 일따라 돌아다녔다. 명산을 찾아 고산을 우러러 보고, ▨▨을 더듬어 절경까지 찾았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대사께서는 비록 이 땅을 돌아다니며 수행하여 두루 현관(玄關)을 뵈었으나, 다른 나라까지 순력하여 모름지기 큰 선비를 뵙고 공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하였다. 대사가 대답하기를, “달마(達摩)가 법을 부촉하고 혜가(惠可)가 마음을 전한 이래로 선종이 동쪽으로 전해졌거늘, 배우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서쪽으로 가리오. 나는 이미 혜목(惠目)을 참알하였고 바야흐로 꽃다운 티끌을 접하였으니, 어찌 뗏목을 버린 마음을 가지고 뗏목을 탈 뜻을 근심하리오?”하였다. 문덕(文德) 초년부터 건녕(乾寧) 말년 사이에 먼저 송계(松溪)에 자리를 잡자, 학인들이 빗방울 처럼 모여 들였으며, 잠시 설악에 머물자 선객(禪客)들이 바람처럼 달려왔다. 어디 간들 감추지 않았을 것이며 어찌 오직 그것 뿐이겠는가! 진성대왕(眞聖大王)이 급히 편지를 보내어 궁전(彤庭)으로 불렀다. 대사는 비록 임금의 말씀을 외람되이 받들기는 하였으나, 조사(祖師)의 업(業)을 어찌 중단하리오. 길이 험하다는 이유로 표를 올리고 굳이 사양하였으니, 가히 하늘 밖 학의 소리는 계림(鷄林)의 경계에 빨리 닿지만, 사람 가운데의 용덕(龍德)을 대궐 문(象闕) 옆에서 구하기는 어렵다고 할 수 있도다. 대사는 인하여 세속을 피하여 홀연히 운수처럼 떠나 명주(溟州)로 가서 머무르며, 산사에 의지하여 마음을 깃들였다. 천리가 잘 다스려져 편안하고 한 지방이 소생한 듯하였다. 얼마 안되어 멀리 김해(金海) 서쪽에 복림(福林)이 있다는 말을 듣고 문득 이 산을 떠났다. 그 소문이 남쪽 경계에 미치고 (대사가) 진례(進禮)에 이르러 잠시 머뭇거렸다. 이에 ▨▨진례성제군사(▨▨進禮城諸軍事) 김율희란 자가 있어 (대사의)도를 사모하는 정이 깊고 가르침을 듣고자 하는 뜻이 간절하여, 경계 밖에서 (대사를) 기다리다가 맞이하여 성안으로 들어갔다. 인하여 절을 수리하고 법의 가르침을 자문하는 것이 마치 고아가 자애로운 아버지를 만난 듯하며, 병자가 훌륭한 의사를 만난 듯하였다. 효공대왕(孝恭大王)이 특별히 정법전의 대덕인 여환(如奐)을 보내어 멀리 조서를 내리고 법력을 빌었다. 붉은 인주(紫泥)를 사용하고 겸하여 향기로운 그릇(鉢)을 보냈으며, 특별한 사자(專介)를 보내어 신심(信心)을 열게 하였다. 그 임금이 귀의할 때 사람들이 공경하고 우러름이 모두 이러하였다. 어찌 육신보살(肉身菩薩)만이 멀리 성▨(聖▨)의 존중함을 입고, 청안율사(靑眼律師)만이 여러 어진이들의 존중함을 자주 입으리오. 이 절은 비록 지세가 산맥과 이어지고 문이 담장 뿌리(墻根)에 의지하였으나, 대사는 수석이 기이하고 풍광이 빼어나며, 준마가 서쪽 산봉우리에서 노닐고 올빼미가 옛터에서 운다고 하였으니, 바로 대사(大士)의 정에 과연 마땅하며 신인의 ▨에 깊이 맞는다고 하겠다. 그래서 띠집을 새로 수리하고 바야흐로 가마를 멈추고, 이름을 봉림(鳳林)이라 고치고 선방을 중건하였다. 이보다 앞서 지김해부 진례성제군사 명의장군(知金海府 眞禮城諸軍事 明義將軍) 김인광(金仁匡)은 가정(鯉庭)에서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고 대궐에 정성을 다하였으며, 선문에 귀의하여 숭앙하고 삼보(三寶)의 집을 돕고 수리하였다. 대사는 마음에 가련히 ▨▨하고 여생을 보낼 뜻을 가졌다. 현묘한 종지를 높이 강연하고 부처의 도를 널리 선양하였다. 과인이 삼가 대업을 받고 큰 기틀을 이어 다스림에, 도안과 혜원의 도를 힘입어 우탕(禹湯)의 운세를 가져오고자 하였다. 듣건대 대사는 당시 천하 사람들의 존숭을 받고 해우(海隅;신라)에서 독보적 존재요, 북악의 북쪽에 오래도록 거처하며 동산(東山)의 법을 가만히 전수했다고 한다. (이에) 흥륜사(興輪寺) 상좌(上座) 석언림(釋彦琳)과 중사성(中事省) 내양(內養) 김문식(金文式)을 보내어 겸손한 말과 두터운 예로 간절히 초청하였다. 대사가 대중에게 이르기를, “비록 깊은 산속이나 이 역시 임금의 땅이요, 하물며 (석가모니의) 부촉도 있으니 임금의 사자를 거절하기는 어렵다”하였다. 정명(貞明) 4년(918) 겨울 10월에 문득 산문을 나서서 ▨에 이르렀다. 가마가 11월 4일에 이르러 과인은 면류관과 예복을 정돈하고 마음을 깨끗이 하여, 예궁(蘂宮)으로 인도하고 난전(蘭殿)에서 공경히 만났으며, 특별히 스승과 제자의 예를 표하고 공손히 숭앙하는 자세를 나타내었다. 대사는 법복을 높이 휘날리며 법좌에 올라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케 할 술수를 설하고, 승려에 귀의하고 ▨▨에 ▨▨할 방책을 말하였다. 과인은 기쁜 마음으로 대사의 얼굴을 우러르고 오묘한 종지를 친히 들으매, 감격스러워 거듭 자리를 피하고 기쁨에 일일이 기록하였다. 이날 대사를 따라 궁궐에 오른 자가 80인이니, 무리 가운데 상족(上足) 경질선사(景質禪師)가 있어 우러러 종과 같은 맑음을 두드리고 그윽히 거울과 같은 지혜를 품었다. 대사가 ▨▨를 치매 소리가 조용하였다. 새벽의 해는 온 산에 비치고 맑은 바람에 온갖 만물의 소리가 화답하였다. 조용히 법을 연설하매 공유(空有)의 극단을 오로지 초월하였고, 분연히 선을 얘기하매 세속의 바깥을 진실로 벗어났으니, 누가 그 끝을 알았으리오. 다음날 마침내 모든 관료들에게 명하여 대사가 머물고 있는 곳으로 나아가 나란히 ▨(〔제자〕)을 칭하게 하였다. 인하여 벼슬이 높은 사람을 보내어 존호를 올려서 법응대사(法膺大師)라 하였으니, 이는 곧 남의 모범이 될 만하였다. 항상 덕을 숭앙하고 삼가 큰 이름을 드러내어 심오한 가르침을 빛나게 하였다. 그후에 대사는 이미 예전에 은거하던 곳으로 돌아와 향기로운 가르침을 거듭 열어서 죽은 도(道)에 빠진 여러 학인들을 깨우쳤으며, 법의 요체를 갖추어 전하여 도탄에 빠진 뭇 중생들을 구원하였다. 자애로운 바람을 보시함은 필연적이다. 갑자기 가벼운 병에 걸렸는데도 마치 피로한 기색이 완연한 듯하매, 대중들은 돌아가실까(兩楹之夢) 의아하여 미리 쌍수의 슬픔을 머금었다. 용덕(龍德) 3년(923) 4월 24일 새벽에 대중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모든 법은 다 공(空)하며 온갖 인연은 함께 고요하다. 말하자면 세상에 의지한 셈이니 흐르는 구름과 꼭 같도다. 너희는 힘써 머무르되 삼가하고 슬피 울지 말라”하고는 오른쪽으로 누워 봉림사 선방에서 입적하니, 세속의 나이로는 70이요 승려 나이로는 50이었다. 이때에 하늘색이 왕성하게 오르고 햇빛이 참담하였으며, 산이 무너지고 내가 마르며 풀이 초췌하고 나무가 말랐다. 산짐승이 이에 슬피 울고 들짐승이 슬피 울었다. 문인들은 시신을 받들어 절의 북쪽 언덕에 임시로 장사지냈다. 과인은 갑자기 (대사가) 입적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애통해 하였다. 인하여 소현승(昭玄僧) 영회법사(榮會法師)를 보내어 먼저 조문하고 제사하게 하였다. 21일째에 이르러 특별히 중사(中使)를 보내어 장례용 물자를 주고 또 시호를 진경대사(眞鏡大師)라 추증하고 탑 이름을 보월능공지탑(寶月凌空之塔)이라 하였다. 대사는 타고난 자질로 지혜로이 깨닫고 산악이 정령(精靈)을 내려서, 자비의 거울을 영대(靈臺)에 걸고 계율의 구슬을 인식(認識)의 집에 걸었다. 이에 사방으로 교화를 넓히고 지경마다 자비로움을 보였으니, 알고서도 하지 않음이 없어 넉넉히 여유가 있었다. 세상을 마칠 때까지 마음이 단단하여 잠시라도 번뇌가 일어남이 없었고, 비록 잠깐이라도 몸이 단정하여 세속의 번뇌에 물들지 않았다. 법을 전하는 제자인 경질선사(景質禪師) 등 500여인은 모두 심인(心印)을 전하매 각각 계주를 보존하였다. 함께 보탑 곁에 머무르며, 같이 선림(禪林)의 고요함을 지켰다. 멀리서 (대사의) 행장을 기록하여 비석에 새길 것을 요청해 왔다. 과인은 재주는 속기를 벗어나지 못하였고 배움은 ▨를 상대할 수 없으나, 유약한 붓으로 그 선덕(禪德)을 감히 드날리고 너절한 말로 그 도풍을 널리 펴고자 하노라. 웅이(熊耳)의 명문을 선뜻 재단하는데 어찌 양무제(梁武帝)를 부끄러워 하리오. 천태(天台)의 게송을 추억하며 짓는데 수나라 황제도 부끄럽지 않다.사(詞)에 이르기를,석가가 가섭에게 법을 부촉하되, 오래도록 떠돌다가 나중에 오리라.마음은 멸한데 법 흐름 언제 끊고, 도(道) 있거늘 떠난 사람 언제 돌아오리.위대하도다 철인은 미로(迷路)를 근심하여, 염부제(閻浮提) 성모(聖母)의 태내에 태어났도다.바다의 높은 파도 일엽편주로 건너고, 가야산 험한 길 삼재(三材)로 돌고자 .흔연히 자리 앉으매 은색 꽃 피고, 문득 열반을 탄식하매 보월(寶月)은 사라져.서리 젖은 학림(鶴林)에 슬픔은 길고, 계산(鷄山)의 짙은 안개 한번 걷히길 기다려.용덕(龍德) 4년 갑신년(甲申年) 4월 1일에 세우고 문하승 성림(性林)이 새기다.[출전:『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1992)]
집사시랑(執事侍郞): 집사성(執事省)의 시랑(侍郞). 집사성은 신라 시대의 행정부로서 중국의 문하성과 같은 기능을 수행하였으며, 시랑은 집사성의 차관직으로서 관등은 나마(奈麻, 제11위)에서 아찬(阿飡, 제6위)까지이고 정원은 2명. ↩
최인연(崔仁渷): 868(신라 경문왕 8)~944(고려 혜종 1). 신라말 고려초의 문인. 유학자. 나중에 이름을 언휘(彦撝)로 고쳤다. 시호는 문영(文英). 18세 때 당나라에 유학하여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살이 하다가 42세 때 귀국하였다. 고려 태조(太祖)의 태자사부(太子師傅)가 되고, 문한(文翰), 한림원령(翰林院令),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당시 선승들의 비문을 많이 쓰거나 지었다. ↩
혜목산(惠目山): 경기도 여주군에 있는 산. 여기서는 이 산에 있던 고달사(高達寺)를 가리킴. 고달사는 764년(신라 경덕왕(景德王) 23)에 창건되었으며, 신라말에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봉림산파(鳳林山派)를 개창한 현욱(玄昱)이 머물렀으며, 고려초인 광종(光宗) 때에는 고려 3대 선원(禪院)의 하나로서 왕실의 후원하에 번성하였다. 어느 무렵엔가 폐사가 되었으며, 현재에는 심희(審希)의 제자인 원종대사(元宗大師) 찬유(璨幽, 869~958)의 탑(보물)과 탑비의 귀부(龜趺) · 이수(螭首)(보물) · 부도(浮屠)(국보) 및 석조불좌(石造佛座)(보물)가 남아있다. ↩
원감대사(圓鑑大師): 연욱(玄昱). 787(元聖王 3)~868(景文王 8). 속성은 김씨. 808년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824년 당나라에 들어가 마조도일(馬祖道一)의 문하 장경회휘(章敬懷暉) 밑에서 수학하였다. 837년 왕자(王子) 김의종(金義宗)을 따라 귀국하여 남악(南嶽)(지리산) 실상사(實相寺)에 머물 때 민애왕(閔哀王, 838~839) · 신무왕(神武王, 839) · 문성왕(文聖王, 839~857) · 헌안왕(憲安王, 857~861)이 제자의 예를 표하였다. 개성(開城, 836~840)말에 혜목산에서 결원(結苑)하였으며, 경문왕(景文王, 861~875)이 혜목산(惠目山) 고당사(高達寺)로 옮겨 머물도록 하였다. 봉림산파(鳳林山派)의 개조로 추앙됨. ↩
기수(祇樹): 기원정사(祇園精舍)의 숲. 기림(祇林)이라고도 함. 기원정사는 옛날 인도 마가다國의 수달장자(須達長者)가 석가모니를 위하여 세운 절. 여기서는 절의 뜻. ↩
고봉(高鳳): 중국 후한시대의 유학자. 자(字)는 문통(文通). 가업(家業)은 농사(農事)였다. 어려서부터 배움에 심취하였다. 처가 한번은 밭에 가면서 보리를 뜰에 널어놓고는 고봉에게 닭을 쫓으라고 부탁하였다. 때마침 비가 퍼부었으나 고봉은 막대기를 잡은 채 경전 읽느라 여념이 없는 사이에 보리가 갑자기 불은 물에 다 떠내려 갔다. 처가 돌아와 이상하여 묻자 그제서야 사태를 알았다. 그는 밤낮 쉬지 않고 독서하여 마침내 명유(名儒)가 되었다. 원화(元和) 연간에 서당산(西唐山) 속에서 제자를 가르쳤으며, 임금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은둔하여 낚시를 즐겼다고 한다(『후한서(後漢書)』 권113). ↩
양오(揚烏): 『전문』에는 ‘조(鳥)’이나 『금석원』과 『총람』에 의하면 ‘오(烏)’임. 양오(揚烏)는 한(漢)나라 양웅(揚雄)의 아들로 일곱살에 아버지 웅(雄)이 능한 현문(玄文)에 참여할 정도로 무척 총명하여 신동(神童)으로 불렸는데, 불행히도 아홉살에 요절하였다(『화양국지(華陽國誌)』 선현양웅전(先賢揚雄傳) 참조). ↩
此法~不令斷絶: 5세기 말경에 보리달마(菩提達摩)가 인도로부터 중국으로 와서 선(禪)을 꽃피운 이래 6조 혜능(慧能)에 이르기까지 선종(禪宗)이 번성하였음을 가리킴. ↩
백암(百巖): 756~815. 장경회휘(章敬懷暉). 속성은 사(謝). 천주(泉州) 동안(同安) 사람. 785년 경 마도도일(馬祖道一)을 참알하여 심인(心印)을 얻었다. 808년 헌종(憲宗)의 조칙으로 장경사(章敬寺) 비로사나원(毗盧舍那院)에 주석하였다. 이후 학도들이 운집하고 조야의 명사들이 날로 모여들어 법을 배웠다. 그는 “자성(自性)은 신령스럽게 밝아서 영원토록 물들지 아니하고 우매하지 아니하고 변하지 않는다. 이에 비해 온갖 현상은 허공의 꽃과 같이 허망한 마음이 낳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권덕여(權德輿)가 지은 비문(『융흥편년통론(隆興編年通論)』 권22)과 『송고승전(宋高僧傳)』 및 『전등록(傳燈錄)』에 전기가 실려 있다. ↩
□□: 문맥상 ‘강서(江西)’임. 마도도일(馬祖道一, 709~788). 선(禪)의 일상생활화에 큰 기여를 하였으며, ‘즉심시불(卽心是佛)’을 주장하였다. 이 계통의 선을 홍주종(洪州宗) 또는 강서종(江西宗)이라고 한다. 신라말 고려초에 성립되는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8산문이 바로 마조도일 계통이다. ↩
조계(曺溪): 선종의 제6조 혜능(慧能, 638~713). 시호는 대감(大鑑). 속성은 노(盧). 광동성(廣東省) 출신. 5조 홍인(弘忍) 문하에서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을 설파함으로써 마침내 선종 제6조로 인정받았다. 신수(神秀)의 복종선(北宗禪)과 구분하여 그의 문하를 남종선(南宗禪)이라 하는데, 안사(安史)의 난 이후 당말(唐末) 오대(五代)에는 남종선이 중국 불교계를 풍미하게 된다. 그의 설법을 모은 것에 『육조단경(六祖壇經)』이 있다. ↩
숭령(嵩嶺): 중국 선종의 개조인 보리달마(菩提達摩). 남인도국의 왕자 출신으로서 출가하여 대승불교를 배웠다. 6세기 초에 중국으로 건너와서 대승선(大乘禪)을 전하였으나, 당시의 불교계에서 용납되지 않자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 들어가 9년 동안 면벽하며 좌선(坐禪) 활동을 하였다.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은 그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저서이다. ↩
신의(信衣): 선종에서는 후계자를 뽑을 때 상징물로서 옷(衣)과 그릇(鉢)을 주기 때문에 자연 衣鉢은 사자상승의 정통성과 관련하여 중시되었다. ↩
심인(心印): 선종에서는 문자(文字)와 언설(言說)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 자아(自我)를 계발함으로써 깨달음을 체험할 것을 주장한다. 그리고 스승에서 제자로의 법의 계승도 마음에서 마음으로 직접 전한다고 보아 ‘이심전심(以心傳心)’을 강조하고 있다. 제자가 깨달았을 때 스승이 마음으로 이를 인가해주는 것을 심인(心印)이라 하며 그것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의발(衣鉢)이 등장한다. ↩
혜가(惠可): 487-593. 선종의 제2조. 속성은 희(姬). 어려서의 이름은 신광(神光). 520년 40세 때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로 가서 보리달마의 제자가 되었다. 선종 내에서는 혜가가 달마의 제자가 될 때 자신의 팔을 잘라서 법을 구하고자 하는 열렬한 마음을 드러냈다고 한다. 달마와의 안심문답(安心問答)에 의해 깨달았다. ↩
진성대왕(眞聖大王): 신라 제51대 임금이자 세번째 여왕. 재위 887~897. 이름은 만(曼)으로 경문왕(景文王)의 딸. 각간(角干) 위홍(魏弘)과의 사통(私通)은 궁중의 기강을 문란케 하였으며, 가혹한 수취는 각 지방세력의 광범위한 조세저항을 초래하였다. 최치원(崔致遠)이 개혁안을 제시하기는 하였으나 이를 실행할 능력을 이미 상실하였다. 왕위를 선양한 후 해인사(海印寺)에 은거하며 일생을 마쳤다. 그의 치세를 계기로 통일신라는 후삼국으로 분열하게 되었다. ↩
김율희(金律熙): 소율희(蘇律熙). 신라하대 김해지방의 호족. 「태자사랑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에 의하면 효공왕 11년(907) 여름 당시 김해부지부(金海府知府)인 소충자(蘇忠子)의 동생으로서 김해지방의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광조사진철대사보월승공탑비(廣照寺眞澈大師寶月乘空塔碑)」에 의하면 늦어도 동왕 15년 무렵까지는 소충자의 뒤를 이어 김해부지군부사(金海府知軍府事)로서 김해 일원의 최고지배자였던 듯하다. ↩
효공대왕(孝恭大王): 신라 제52대 임금. 재위 897~912. 이름은 요(嶢). 헌강왕(憲康王)의 서자요, 어머니는 의명태후(義明太后) 김씨. 희(妃)는 이찬(伊飡) 우겸(又謙)의 딸. 진성여왕(眞聖女王)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라 태봉의 궁예(弓裔), 후백제의 견훤(甄萱)과 각축을 벌임에, 주색에 빠지고 정사를 돌보지 않아 국세는 날로 위축되었다. ↩
육신보살(肉身菩薩): 살아있는 보살. 청정한 사람은 마음을 가라앉혀서 정(定)을 닦아 산 몸으로 보살의 지위에 오름. 역사상 용수(龍樹) · 세친(世親) · 부대사(傅大士) · 행기(行基) 등이 육신보살로 지칭됨. 여기서는 륙조혜능(六祖慧能)을 가리킴. 즉 유송(劉宋) 때의 구나발타라삼장(求那跋陀羅三藏)이 예언하되 6조가 육신보살이라 하였음(『대정(大正)』권8, p.362 下). 이들이 입적하면 전신사리를 얻을 수가 있다고 하는데, 실제로 혜능과 석두희천(石頭希遷)은 전신사리를 남김. ↩
청안률사(靑眼律師): 계빈국(罽賓國) 사람인 비마라차(卑摩羅叉). 또는 무구안(無垢眼). 율장(律藏)에 밝아서 사방의 학자가 다투어 와서 사사하였다. 처음에 구자(龜玆)에서 율장을 홍포할 때 구마라십(鳩摩羅什)도 와서 배웠다. 그 후 중국에 들어와 406년(후진(後秦) 홍시(弘始) 8) 관중(關中)에 이르자, 구마라십(鳩摩羅什)이 스승의 예로서 존경하였다. 구마라습(鳩摩羅什)이 죽자 안휘성(安徽省) 수춘(壽春)으로 가서 석간사(石澗寺)에 머물렀다. 여기서 구마라습(鳩摩羅什)이 번역한 『십송률(十誦律)』58권을 교정하여 61권으로 삼았다. 현재 전해지는 것은 이 중교본(重校本)이다. 그 후 강릉(江陵)으로 가서 신사(辛寺)에서 『십송률(十誦律)』을 강의하며 계율의 홍포에 주력하다가 다시 수춘(壽春) 석간사(石澗寺)로 돌아와서 77세로 입적하였다. ↩
안원(安遠): 중국의 고승인 도안(道安)과 혜원(慧遠)(추만호, p.386). 도안(312~385)은 하북성 출신으로서 5호16국의 격동기에 북중국에서 활약하였다. 신이승(神異僧) 불도징(佛圖澄)을 사사하였으며, 말년에는 전진(前秦) 부견(符堅)의 후원을 받았다. 『만야경(般若經)』을 연구하여 종래의 격의불교를 비판하고 많은 주석서를 남김. 선관(禪觀) 및 계율에도 뛰어나 다수의 주석서를 남겼으며, 역경에도 뛰어나 한역불전의 진위를 조사한 「綜理衆經目錄」(364)을 저술. 석(釋)씨성을 처음 주장하였으며, 열렬한 미륵(상생)신자였다. 불교교단의 발전과 관련하여 일찍 왕권의 중요성을 인식하였으며(王卽佛思想), 사실상 중국불교의 개척자임. 혜원(334~416)은 산서성 출신으로 동진시대에 활약. 도안의 제자. 북중국의 전란을 피하여 남하. 384년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로 들어가 결사를 맺고 이후 30여년간 산을 나오지 않은 채 계를 지키며 반야학과 선관을 닦음. 구마라집이 영도하는 장안불교계와 교류하여 새로운 불교사상(삼론학)을 흡수하고 이 과정에서 양자간의 질의응답을 저술로 남김(『大乘大義章』). 또 여산교단을 장악하려는 정치권력에 맞서 「沙門不敬王者論」』(404)을 지음. 정토사상(염불삼매)에 심취하였으며, 중국의 전통적인 습속과 사상에 대하여 결연히 불교를 옹호. 강남불교뿐만 아니라 중국불교의 방향을 결정. ↩
공유지변(空有之邊): 인도의 대승불교는 공(空)을 주장하는 중관파(中觀派)와 유(有)를 인정하려는 유가유식파(瑜伽唯識派)로 구분된다. 중관파는 객관세계(境)뿐만 아니라 이를 인식하는 주체(心, 識)조차 그 독자성이 없는 空이라고 하는 데 비해서, 유가유식파는 객관세계는 공(空)이지만 이를 인식하는 주체의 작용은 인정(有)해야 한다고 한다. 철학상의 이러한 대립은 6세기 인도불교계의 주요한 과제였으며, 7세기 중반 경 현장(玄奘)법사에 의해 중국불교계에도 소개되었다.이 사상적 대립을 철학적으로 극복한 최초의 학자가 바로 신라의 원효(元曉, 617-686)였으며, 그 경전적 토대가 된 것이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이었다. ↩
웅이지명(熊耳之銘): 웅이산은 중국 하남성(河南省) 노씨현(盧氏縣) 남방에 위치하는 산으로서, 산의 두 봉우리가 곰의 귀와 같다고 하여 웅이산이라 하였다고 함. 이 산 정림사(定林寺)에는 선종의 초조인 보리달마(菩提達摩)의 탑이 있는데, 그 비명을 양나라 무제(武帝)가 지었다고 한다. 『전양문(全梁文)』권6의 보리달마대사비(菩提達摩大師碑). ↩
천태지게(天台之偈): 게(偈)를 『총람』에는 ‘게(揭)’라 하였다. 수나라 양제가 사신을 천태산에 보내어 그가 평소 존경했던 천태지의를 위하여 공덕을 빈 게송. 즉 『전수문(全隋文)』권7 「견사입천태위지의건공덕원문(遣使入天台爲智懿建功德願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