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숭은 복원사(大崇恩福元寺) 고려제일대사(高麗第一代師) 원공(圓公)의 비(碑)
이곡(李穀)
1 지음
무종황제(武宗皇帝)
2가 불법을 숭상하여 처음에 사원을 도성의 남쪽에 일으켰는데, 인종황제(仁宗皇帝)
3가 뒤를 이어 이루어서 황경(皇慶) 원년(충선왕 4, 원 인종 1, 1312)에 준공하였다. 곧 여러 곳의 훌륭한 승려들에게 명하여 그 해 겨울부터 법당을 열고 설법을 시작하였다. 고려의 유가교사(瑜伽敎師)
4 원공(圓公)이 그의 무리를 거느리고 들어와 살아서 그곳에 머무른 것이 무릇 29년이나 되었는데, 지원(至元) 경진년(충렬왕 6, 1280) 2월 18일에 그곳 무휴지당(無虧之堂)에서 입적하였다.
5년이 지난 뒤인 갑신년(충렬왕 10, 1284) 가을에 그의 법을 이은 고제(高弟)인 현인(玄印) 등 30여 명이 유골을 안치할 탑을 만들었다. 또 그의 도행(道行)을 비석에 싣고자 하여 나에게 글을 청하여 말하기를, “삶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는 것은 사람의 떳떳한 이치이며, 그의 삶을 기르고, 그의 죽음을 보내는 데 예(禮)를 다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의 아들된 자의 간절한 심정입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대하는 것과 제자가 스승에 대하는 것은 그 길이 한가지입니다. 공자가 돌아가자 제자들은 3년을 상을 치르며 오히려 묘에 여막을 짓고 지내면서 차마 떠나가지 못하였습니다. 공자는 후사가 있었지만 제자들이 그렇게 하였는데, 하물며 우리 승려들의 인륜을 끊고 법을 전하는 것으로써 후사를 삼는 자들에게 그 마지막을 신중히 하는 뜻이야 어떠하겠습니까. 옛날 부처가 입적할 때, 오른쪽 옆구리를 땅에 붙인 것은
5 마지막이 있음을 보임이며, 금관(金棺)에 거두어 넣은 것은 예(禮)가 박(薄)하지 않은 것을 보인 것입니다. 불교는 비록 죽고 사는 것을 도외시하나 그 자애하고 효도하라는 가르침이 일찍이 그 사이에 깃들지 않음이 없습니다. 우리 스승이 돌아가신 때로부터 다른 사람들이 입실(入室)하기까지 우리 무리로 하여금 흩어져 없어지게 만들었으므로, 지금까지 다섯 해를 지내고 비로소 유골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슬픔이 골수에 사무치게 하는 바로써 감히 하루도 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대는 우리 스승의 비명을 써 주셔서. 우리 스승은 비록 입적하였으나 없어지지 않는 것이 있도록 해 주십시오” 하였다. 내가 전일에 그들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노닐었으니, 승낙하여 비명 쓰는 일을 감히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공의 휘는 해원(海圓)이요, 속성은 조씨(趙氏)이니, 함열군(咸悅郡) 사람이다. 아버지는 검교 감문위 대호군(檢校監門衛大護軍) 혁(弈)이며, 어머니는 완산군부인(完山郡夫人) 이씨(李氏)이다. 공은 나면서부터 단정하고 장중하며 타고난 자질이 자상하고, 행동거지가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부모가 일찍이 말하기를, “이 애가 만약 큰 벼슬을 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대복전(大福田, 복의 터전이 되는 훌륭한 이. 부처나 고승을 말함)이 될 것이다” 하였다. 나이 겨우 열두 살이 되어 금산사(金山寺, 전북 김제시 금산면 모악산에 있는 절. 법상종의 주요 사찰)의 대사(大師) 석굉(釋宏)에게 가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그가 법을 배우는데 날마다 나아감이 있어 같은 무리들은 감히 바라보지 못할 정도였다.
갑오년(충렬왕 20, 1294) 봄에 승과(僧科)에 급제하여 불주사(佛住寺)에 주석하였다. 대덕(大德) 을사년(충렬왕 31, 1305)에 안서왕(安西王)이 고려의 승려는 계행(戒行)이 매우 높다는 말을 듣고 성종(成宗)에게 청탁하여 사자를 보내어 초빙하였다. 공이 그 명에 응하여 들어가 뵙고 이어 안서왕을 좇아 삭방에 갔다. 북방의 풍속은 농사짓는 일은 하지 않고 목축으로써 생업을 삼기 때문에, 가축의 고기를 먹고 고깃국물을 마시며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었다. 공이 거기에 있은 지 두 해 동안에 굶주림을 참을지언정 절대로 냄새 나는 것을 먹지 않고 계율을 지킴이 더욱 굳으니, 안서왕이 더욱 존중히 여겼다. 정미년(충렬왕 33, 1307) 겨울에 무종(武宗)의 뜻을 받들어 도제(徒弟)들을 거느리고 관청의 곡식을 먹었으며, 봄 가을의 순행(巡幸)에는 왕의 수레에 호종하도록 하였다. 인종(仁宗)이 왕위를 이은 뒤에 공에게 이 절에 주석할 것을 명하였다. 은총과 지우는 더욱 풍부해지고, 도의 명성은 더욱 드러났다. 천력(天曆) 연간(1328~1329) 초에 이르러서는 저폐(楮幣) 2만 5천을 하사하였으니, 이는 남달리 총애하였기 때문이다.
본국 고려의 왕이 더욱 존중하는 예를 더하니 공이 소(疏)를 올려 멀리 백제의 금산사에 머물기를 청하였다. 호를 내리기를 혜감원명 편조무애 국일대사(慧鑑圓明遍照無礙國一大師)라 하고, 중대광
6 우세군(重大匡祐世君)에 봉하였다. 종문(宗門)을 영화롭고 빛나게 함이 당시에 으뜸이었다.
공은 마음 씀이 관대하고 화순하며, 몸을 닦아 실행함이 위엄 있고 정중하여, 사람들이 보고는 사랑하고 존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른바 유식(唯識)의 논서에 대해 이미 대의(大意)에 통달하여 사람들과 더불어 수다스럽게 논쟁하는 일이 없었으며, 사람들도 또한 감히 논난하려 하지 않았다. 성품이 손님을 좋아하여 존귀하거나 비천하거나 삿되거나 바르거나를 구별하지 않고 한결같이 대접하니, 손님들로 마루는 항상 가득 찼다. 공(空)을 말하고 유(有)를 설하기를 부지런히 하여 게을리 하지 않았다. 수입이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여 간혹 음식 대접이 이어지지 못하기도 하고, 주머니와 바릿대는 쓸쓸하였다. 입적하던 날에 남아 있는 자산이라곤 없었다. 향년이 79세였다. 아, 참으로 이른바 복전(福田, 복의 터전이 되는 훌륭한 이. 부처ㆍ보살ㆍ고승)이었던가.
나는 원통(元統) 계유년(충숙왕 복위2, 1333)에 함께 계획하고 와서 공의 별원(別院)인 보은승방(報恩僧房)에 머물렀으므로 공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와 보니 공은 돌아간 지가 이미 해를 넘겼으며, 그의 무리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나는 슬퍼하지 않을 수 없고, 또 그 부처를 배우는 자들이 오히려 사원을 빼앗는 것을 일삼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것이 일찍이 세속의 사람들만도 못한 것을 민망하게 여겼다. 이제 우리 대사의 무리가 이미 능히 절을 회복하여 가지고, 대사의 상사(喪事)가 늦어진 것을 통탄하여 탑을 잘 이루었으니, 다만 그의 뜻을 계승하고 그의 은혜를 갚았을 뿐 아니라, 또 그의 덕행을 높이 받들어 영원무궁하게 전하게 하였다. 이에 마땅히 명을 쓴다. 명(銘)하기를,
크도다 성스러운 원나라여
한 나라 당 나라보다 뛰어나네
옛 제왕을 본 받아 법도로 삼고
부처님을 존숭하여 믿네
밝게 빛나는 사찰이
무종황제 때 창건되어
인종조에 이르는 동안
공양물이 모두 갖추어졌네
그 때 해원공이
왕명을 받고 법당을 열었으니 주미(麈尾)
7는 꽃비를 뿌리고
옷에는 하늘의 향기가 스미네
공이 그 제자들에게 이른다
혹시라도 게으르고 거칠어지지 말라
백성의 힘을 다해
이 도량 이루었다
우리 창고에 좁쌀이 이어지면
백성들은 술찌끼와 쌀겨에 싫증난다
너희들이 만약 먹기만 하는 무리라면
어리석음 아니면 미침이로다
제자들이 옷깃을 여미고
감히 힘쓰지 못하였는데
숭은 복원사에서
30년 동안이나
홀연히 세상을 싫다하고
무상함을 보여 주었네
많고 많은 제자들이여
백미가 가장 뛰어나구나
사원은 의탁할 데가 어다
종파들은 서로가 옳다고 하며
저 어두운 지 알지 못하고
감히 억지로 모든 것을 빼앗네
천도가 좋게 돌아와서
그들의 죄과에 재앙을 내렸네
청전(靑氈, 푸른 담요, 대대로 내려오는 공부 전통)은 전과 같이 돌아오고
비단 도포는 더욱 광채가 난다
높다란 저 탑이여
그의 유골 깊이 감췄네
지세가 매우 견고한
신주(神州)의 양지녁이네
사람들이 말하길 불교는
삼강 밖에 벗어나 있다 하지만
누가 말하는가, 그 제자들이
능히 돌아간 이를 기리어
그 은덕에 보답하고
또 아름다운 이름을 길이 전하네
모든 장래의 후예들은
이 새긴 글을 드러낼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