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정공(金文正公) 묘지
1
공의 이름은 태현(台鉉)
2이고, 자는 불기(不器)이며, 성은 김씨(金氏)이다. 본래 광산(光山)
3의 망족(望族)으로, 개국 초기부터 벼슬하여 대대로 끊이지 아니하였다. 증조 신호위중랑장(神虎衛中郞將) 광세(光世)는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추증되고, 조부 금오위대장군(金吾衛大將軍) 경량(鏡亮)
4은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에 추증되었으며, 아버지 감찰어사(監察御史) 수(須)는 여러 차례 추증되어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다.
시중은 일찍이 충헌왕(忠憲王, 高宗) 을묘년(고종 42, 1255 )에 진사제(進士第)에 급제하였는데,
5 성품과 용모가 훌륭하고 아름다웠으며 담력과 지략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 중앙과 지방의 관직에 종사하면서 청렴하고 유능하다는 평판이 있었다. 지원(至元)
6 기사년(원종 10, 1269)에 어사(御史)를 거쳐 지영광군
7주사(知靈光郡州事)로 나갔다. 이듬해에 삼별초(三別抄)가 난을 일으켜 강도(江都, 江華)의 인물을 약탈하고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며 먼저 탐라(耽羅)를 점거하려 하였으므로, 본국에서 장군 고여림(高汝霖)을 파견하여 쫓아가 토벌하도록 하고, 또 전라도 선정관(全羅道 選正官)
8에게 문서를 내려보내 사람들이 평소 믿고 따를 수 있는 자가 군사를 이끌고 함께 나가라고 하였다. 시중이 그 선발에 뽑히자 집에서 숙식을 하지 않고 드디어 초군(抄軍)과 함께 급하게 가서 고여림과 탐라에서 만났다. 적들이 아직 진도(珍島)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탐라에는 이르지 못하였으므로, 이에 밤낮으로 성벽을 쌓고 병기를 수리하며 내습로를 끊어서 쳐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지키는 사람들이 겁을 내어 움추리고 힘을 다하지 아니하니 적이 다른 길을 거쳐 이르렀는데도 깨닫지 못하였다. 시중이 평소와 같이 대의(大義)로써 사졸을 격려하니 사람들이 크게 감동하여 용기를 백 배나 더하여 용감하게 소리치며 다투어 달려나가 적의 선봉을 거의 다 죽였다. 그러나 토착지방민[土人]들이 적을 도와주게 되니 중과부적으로 마침내 고 장군과 함께 진중에서 전사하고 돌아오지 못하게 되어서 사람들이 지금까지 원통하게 여기고 있다.
공은 10세에 부친을 잃었다. 대부인(大夫人)은 작고한 예빈경(禮賓卿) 고정(高侹)공의 딸로 영광에서 아버지를 잃은 자녀들을 데리고 (서울로) 돌아와 법도에 맞게 가르치니, 공도 생각을 고쳐서 독서에 힘썼다. 14세가 되자 숙부이자 작고한 재상인 문숙공(文肅公, 金周鼎)을 따라가 과거시험 공부를 하였는데, 문숙공이 그가 지은 사부(詞賦)가 뛰어난 것을 보고 “우리 가문을 크게 떨칠 사람은 너로구나. 우리 형님은 돌아가시지 않았도다” 라고 하였다. 15세에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하여 한 번에 으뜸으로 합격하였으며,
9 이듬해에는 또 예부시(禮部試)에 나가 진사에 급제하였다.
10 정축년(충렬왕 3, 1277)에 녹원사(錄苑事)가 되었다가 뒤에 강음
11목감직(江陰牧監直)이 되었으며, 얼마 있다가 첨사부녹사(詹事府錄事)가 되었다. 경진년(충렬왕 6, 1280) 여름에 전시(殿試)에 급제하여
12 좌우위참군 겸 직문한서(左右衛叅軍 兼 直文翰署)에 제수되었다. 이로부터 7년 동안 모두 세 차례 관직이 바뀌면서 7품에 이르렀다. 모두 문한(文翰)으로 이름이 났다.
13무자년(충렬왕 14, 1288)에 밀직당후관(密直堂後官)을 거쳐 권지통례문지후(權知通禮門祗候)가 되었다. 얼마 뒤 우정언 지제고(右正言 知制誥)에 제수되고, 우사간(右司諫)
14을 거쳐 은비(銀緋)를 입고 감찰시사(監察侍史)
15로 옮겼다가 금자(金紫)를 하사받았다. 기거랑(起居郞)으로 바뀌었다가 기거주(起居注)를 거쳐 첨의사인(僉議舍人)에 제수되었으며, 전법총랑(典法摠郞)으로 바뀌면서 조현대부(朝顯大夫)의 품계를 받았다.
대덕(大德)
16 무술년(충렬왕 24, 1298) 봄에 덕릉(德陵, 忠宣王)이 내선[內讓]을 받아 왕위를 계승하자 공의 잘못을 면해 주었다. 가을에 덕릉이 (원의) 조정에 들어가고 충렬왕(忠烈王)이 복위하자 판도총랑(版圖摠郞)에 기용되고, 전중윤(殿中尹)으로 옮겼다가 여러 차례 옮겨 밀직우승지 판사재사 문한시독 사관수찬 지제고 지군부감찰사(密直右承旨 判司宰事 文翰侍讀 史館修撰 知制誥 知軍簿監察司)가 되었으며, 조봉·중열(朝奉·中列) 2대부(大夫)가 더해졌다.
경자년(충렬왕 26, 1300)에 봉익대부 밀직부사 겸 감찰대부(奉翊大夫 密直副使 兼 監察大夫)에 제수되고, 신축년(충렬왕 27, 1301)에 왕명을 받들어 천수성절(天壽聖節)을 축하하는 사신으로 상도(上都)로 들어가게 되었다.
17 마침 성종(成宗)이 삭방유수(朔方留守)로 친행(親行) 중에 있었으므로, 성(省)에서 각국 사신들에게 군사일에 관한 긴급한 일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상도에) 머물러 있으라고 조칙을 내렸다. 공이 성에 나가 “우리 나라가 귀국을 섬긴 이래 해마다 보내는 축하사절을 일찍이 빠뜨린 일이 없는데, 이제 여기에 머물러서 나아가지 못하게 하니 참으로 매우 황공한 일입니다”라고 하니, 드디어 상도를 떠나 북으로 가기를 허락받았다. 1년 동안 한 역[站] 한 역을 지나면서 행재소(行在所)에 도달하여 성절(聖節)을 맞이하였다. 조복(朝服)을 갖추어 하례를 올렸는데 의식이 궁궐의 연회에서 행하는 것과 같으니, (황제가) 멀리서 왔다고 하여 특별히 어식(御食)을 내려주면서 총애하였다. 당시 황제가 친히 적을 정벌하여 물리쳤는데, 공이 먼저 황제의 기쁜 소식을 가지고 돌아오니 이르는 곳마다 모두 경하하였다.
동지지사사(同知知司事)에 오르면서 문한승지(文翰承旨)직을 겸대하고, 또 원에서 황제의 명[宣命]으로 승무랑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낭중(承務郞 征東行中書省 左右司郎中)을 제수받았다. 밀직사사(密直司使)로 옮기면서 대보문(大寶文)을 겸하였고, 광정대부(匡靖大夫)로 바뀌었다. 을사년(충렬왕 31, 1305)에 첨의부(僉議府)에 들어가 지사사(知司事)가 되고, 병오년(충렬왕 32, 1306 )에 또 천수절(天壽節)을 축하하러 원에 갔다가 돌아왔다.
18 이 때 충렬왕이 상도에 있으면서 신하를 만나고 있었는데, 무술년(충렬왕 24, 1298)에 복위한 때로부터 나라 사람들이 파당을 나누어 부자의 정을 서로 통하지 못하도록 하기에 이르렀다. 공이 그 사이에서 중재를 하였는데, 한결같이 공정하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다른 말을 하지 못하였다.
정미년(충렬왕 33, 1307) 봄에 덕릉이 인종(仁宗)을 거들어 내부의 난을 평정하니 공(功)이 천하에 높았으므로, 본국의 신하로서 임금에게 다른 마음을 품은 자는 모두 떠나갔다. 위로는 이부(二府, 僉議府와 密直司)로부터 아래로는 일반 관리에 이르기까지 혹은 죽이기도 하고 혹은 유배보내기도 하면서 모두 바꾸었으나, 홀로 공만을 유임시켜 다시 지밀직사(知密直司)로 삼았는데, 여름에 밀직이 혁파되자 자의찬성사(咨議贊成事)가 되었다.
지대(至大)
19 무신년(충렬왕 34, 1308)에 충렬왕이 승하하고 덕릉이 즉위하자 대신들을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내어 백성을 생활을 살피고 호적을 정리하려 할 때에, 공을 양광수길도 계점사 행수주목사(楊廣水吉道 計點使 行水州牧使)로 삼았다. 각도에서 첨의사(僉議司)에 글을 올려 적용할 법규를 요청하였으나 첨의사에서는 정해진 것이 없었으므로 회송문서에다 매번 마땅히 양광수길도의 1도에서 정한 예에 따라 시행하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모두 관리를 보내어 그 법을 배워 갔다.
기유년(충선왕 1, 1309) 여름에 다시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임명되어 2년 간 재임하다가, 삼사(三司)가 혁파되자 대광 상의찬성사(大匡 商議贊成事)가 되었다. 신해년(충선왕 3, 1311)에 또 상의(商議)의 관직을 없애니 관례에 따라 물러나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벼슬 없이 한가하게 지낸 것이 10년이었다. 신유년(충숙왕 8, 1321)에 기용되어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었다가 곧 판삼사가 되고, 관계(官階)는 중대광(重大匡)에 이르렀다.
연우(延祐)
20 말에 덕릉이 토번(吐蕃)으로 가게되는 일이 벌어지고, 지치(至治)
21 초에 상왕(上王)이 원에 들어와 머물게 되자 나라에서는 파당의 논의가 일어났다. 당시 총재(冢宰)는 임금을 수행하여 갔으므로 공이 이부(二府)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나 아래에 있는 관리들이 오히려 나라의 권력을 장악한 채 서로 마음을 합하지 않았으므로, 일이 있을 때마다 모두 의견이 엇갈리게 되었다. 그러나 끝내 나라가 잘못되지 아니한 것은 오직 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정(泰定)
22 갑자년(충숙왕 11, 1324)에 상왕이 다시 복위하게 되자 여러 가지가 다시 바뀌게 되면서 공을 파면시키고자 하였다. 임금은 “이 노인은 시종일관하여 다른 뜻이 없는 분이니, 내쫓는 것은 옳지 않소” 라고 하였으나, 권력을 잡은 자로 어리석게 찬동하는 자가 있어서 마침내 파직되었다. 이듬해에 임금이 귀국하자, 삼중대광
23첨의정승(三重大匡 僉議政丞)으로 벼슬을 물러나 은퇴하였다.
이 해에 대부인의 나이가 100세였으므로 해마다 30석(碩)의 곡식을 하사받았다. 정묘년(충숙왕 14, 1327)에 관호를 다시 바꾸었으므로 삼중대광 첨의중찬 수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상호군 판전리사사(三重大匡 僉議中贊 修文館大提學 監春秋館事 上護軍 判典理司事)가 되어 그대로 은퇴하였다. 이 때에 대부인이 작고하니 나이가 102세로서, 특별히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으로 추증하였다.
지순(至順)
24 경오년(충숙왕 17, 1330) 봄에 국왕<충혜왕>이 지위를 이으라는 명을 받게 되니, (원의) 조정에서 객성(客省)에 70명의 날랜 군사[堅]를 보내어 금인(金印)을 가져오게 하면서 공을 권행성사(權行省事)로 임명하였다. 공이 거듭하여 그 명을 받지 않자 또 서사(署事, 署行省事)로 기용하였다. 조정의 사신이 2월 2일에 돌아가고 29일이 되자 당시 재상들이 순군(巡軍)에 모여 앉아 전 임금의 명령이라 하여 공을 소환하였다. 공이 도착하자 승상의 관인(官印)을 몰수하고 성부(省府)에서 공을 축출하였다. 명에 따라 귀가하여 몇 달을 특별하게 하는 일 없이 보내다가, 4월에 식구들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금강산(金剛山)을 유람하였는데, 대개 의혹을 피하고자 한 것이었다. 5월에 임금의 사신이 상도(上都)로부터 와서 당시의 재상이 마음대로 승상인(丞相印)을 빼앗은 것을 질책하면서, 좌우의 담당 관리를 파직하고 모든 월봉(月俸)을 정지시켰다. 임금의 명을 받은 관리 한 명을 파견하여 산에 다달아 명을 전하니 공은 역마(驛馬)를 타고 서울로 돌아와 다시 서성사(署省事)가 되었으나, 즐겨 한 일은 아니었다. 7월에 병환의 기운이 있어 약으로 다스렸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고 10월 6일 계축일에 집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70세이다.
공은 성품이 청렴하고 공평하였으며 생김새가 뛰어나고 단정하였다. 말과 행동거지가 예법을 따랐으므로 사람들이 보기에는 가히 근접할 수 없을 것 같으나, 한 번 접해보면 목소리와 기색이 따뜻하면서도 부드러운데도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대부인을 섬기며 효도를 다하였고, 부인을 대하면서도 예의를 지켰다. 자손을 가르치는 데에도 방정함이 있었고, 친척과도 매우 화목하여 말을 하지 아니하여도 화합하였다. 사람들과 더불어 함부로 교유하지 않았고 또한 원한을 가진 사람도 없었으며, 이부(二府)에 재직할 때나 파직되어 한가로이 있을 때나 손님이 오고가는 것에는 더함이나 줄어듬이 없었다. 평소에 일이 없을 때에도 이른 아침에 일어나고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으며, 낮에 눕는 일이 없었고 더워도 웃옷을 벗는 일이 없었으며, 비록 발[簾]을 드리운 곳에 있을 때라도 옷깃을 여미고 단정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서 엄정하고 공손하였다.
나이가 어려서 내시(內侍)에 들어가서 감창시(監倉寺)의 명을 받았을 때, 번잡한 일을 현명하게 처리하니 경험이 많은 사람이라도 미치지 못하였다. 대간(臺諫)에 참여하였을 때에는 말한 것이 모두 원대한 계책이 되었으며, 충청·경상(忠淸·慶尙) 2도(道)의 안찰사(按察使)와 동계 안집사(東界 安集使)로 나갔을 때에는 감옥의 일과 소송을 공평하게 처리하여 이익은 늘리고 손해는 줄이는 일을 즐겨하였으니, 당시에 이미 나라를 잘 다스리고 백성들을 구제하리라 기대되었다.
세 임금<忠烈·忠宣·忠肅>을 두루 섬기면서 행동을 예의바르게 하였으며 일찍이 실낱만큼의 실언(失言)도 없었다. 역대(歷代)의 전고(典故)를 마치 어제 일처럼 환하게 알고 있어서, 매 번 나라에서 크게 의심스러운 일이 있을 때마다 (공을) 찾아가서 바로 잡고는 하였다. 저술은 문장[詞]의 가르침이 체(體)를 이루고 있었으며, 시(詩)는 맑으면서도 고와서 가히 애송할 만하였다. 또 우리 나라 사람들의 글을 손수 모아서 『동국문감(東國文鑑)』이라 하였으니, 정수를 모아 배열한 것이라 할 만하다. 스스로 호를 지어 쾌헌(快軒)이라 하였으며 만년에는 또 설암(雪庵)이라고도 하였다. 일찍이 성균시(成均試)를 주관하여 이천(李蒨)등 70명을 얻고,
25 예부시[禮闈]를 주관하여서는 박리(朴理) 등 30여 명을 얻으니,
26 당시의 이름난 선비들이 많이 그 중에 들어 있다.
공은 좌우위낭장(左右衛郎將) 김의(金儀)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일찍 세상을 뜨자, 다시 신호위낭장(神虎衛郞將) 왕단(王旦)
27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개성군대부인(開城郡大夫人)으로 봉해졌다. 어질게 능히 가정을 다스려서, 있고 없음으로 공을 혼란스럽게 하지 아니하였으며, 아들 3인을 모두 과거에 합격시켜서 나라에서 해마다 20석(石)의 곡식을 받았다. 공은 아들이 4명이고 딸이 2명인데, 첫 부인이 1남을 낳았고 나머지는 모두 후부인이 낳았다. 광식(光軾)은 갑오년(충렬왕 20, 1294)의 과거에 합격하여
28 관직이 총부의랑(摠部議郞)에 이르렀으나 먼저 사망하여 자식이 없다. 광철(光轍)은 을사년(충렬왕 31, 1305)의 과거에 합격하여
29 지금 군부총랑 진현직제학(軍簿摠郞 進賢直提學)이며, 광재(光載)는 계축년(충선왕 5, 1313)의 과거에 합격하여
30 지금 도관정랑(都官正郞)이 되었다. 광로(光輅)는 정사년(충숙왕 4, 1317)의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31 결혼하기 전에 일찍 사망하여
32 관직은 가안부녹사(嘉安府錄事)에 그쳤다. 장녀는 전교령 예문직제학(典校令 藝文直提學) 안목(安牧)에게 시집가서 익양군부인(翼陽郡夫人)
33으로 봉해졌고, 차녀는 예문공봉(藝文供奉) 박윤문(朴允文)에게 시집갔다. 손자가 2명이 있는데 하나는 아무개로 별장(別將)이며, 다음은 아직 이름이 없다.
34
국왕이 어릴 때부터 (공의) 명성을 들었는데 즉위한 처음에 성(省)의 권임(權任)을 맡긴 것은 대개 다시 재상으로 삼아 국공(國公)이 되게 할 뜻이 있어서였다. 공이 병이 들어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하여 부의를 후하게 내리고 시호를 문정(文正)이라 추증하면서, 다시 담당 관청에게 비용을 쓰라고 명하였다. 11월 8일 갑신일에 덕수현(德水縣)
35 동쪽 풀이 많은 언덕[多草之原]에 장사지내면서, 두 아들이 공이 남긴 명(命)이라 하여 문인(門人) 최(崔) 아무개
36에게 묘지의 명(銘)을 부탁하였다. 아무개가 공을 섬긴 지 거의 30년이나 되는데 항상 송구스럽게도 보살핌을 비할 바 없이 받아 왔다. 드리워진 덕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도록 글을 짓는 일은 마땅히 능한 사람에게 미루어야 할 것이나, 공이 명하였으니 사양할 수 없어서 삼가 백 번 절하고 울면서 명(銘)을 짓는다.
명(銘)하여 이른다.
아, 문정공이여, 실로 나라의 원로이신데
이제 홀연히 가시니 어디에다 물어보아야 합니까.
산이 무너지고 들보가 부러졌고, 어질고 맑은 분께서 가시니
그 슬픔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공자(孔子)[宣尼]를 잃은 느낌입니다.
졸옹(拙翁) 최해(崔瀣)가 짓고, 자금어대(紫金魚袋) 김원준(金元俊)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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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