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화공(昌和公)으로 시호가 추증된 권공(權公) 묘지명<題額>
원 고려국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 길창부원군(有元 高麗國 三韓壁上功臣 三重大匡 吉昌府院君) 권공(權公) 묘지명 및 서문
문인(門人)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도사 봉익대부 밀직사사 진현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征東行中書省 左右司都事 奉翊大夫 密直司使 進賢館大提學 知春秋館事 上護軍) 이인복(李仁復)이 지음.
손자(孫子) 선수 선무장군 합포등처 진변만호부만호 중대광 보문각제학(宣授 宣武將軍 合浦等處 鎭邊萬戶府萬戶 重大匡 寶文閣提學) 현성군(玄城君) 권용(權鏞)이 쓰고 전(篆)도 아울러 씀.지정(至正)
1 임진년(공민왕 1, 1352) 가을 7월 을유일에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 권공(權公)이 세상을 떠났다. 염습(斂襲)을 마친 뒤 사위인 삼사좌사(三司左使) 홍군(洪君 : 洪彦博)이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서 말하였다. “장인이 임종할 때에 ‘나의 장례에 묘지명을 지을 사람은 내 문인(門人)만한 사람이 없는데, ▨▨ 이인복(李仁復)은 말이 쓸 데 없이 화려하지 않으니 후세에 믿을 만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글을 짓기를 부탁하니, 사양하지 말아주십시오.” 인복(仁復)은 삼가 명을 받고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다음과 같이 적는다.
대저 권씨(權氏)는 복주(福州)
2의 이름난 집안[望族]으로 대대로 덕망이 높은 사람이 있어서 역사서에 기록이 끊기지 않는다. 한림학사(翰林學士) 위(韙)는 공에게 증조(曾祖)가 되고,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 단(㫜)은 시호가 문청(文淸)으로 공에게 조부가 되며,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 부(溥)는 시호가 문정공(文正公)으로 공에게 아버지가 되며,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 유씨(柳氏)는 공에게 어머니가 된다.
공의 이름은 준(準)이고, 자는 평중(平仲)이다. 9세에 문공(門功)으로 ▨재고판관(▨齋庫判官)에 보임되고, 9년이 지나자 대전행수(大殿行首)가 되었다. 관례(冠禮)를 올린 뒤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고, 행수(行首)를 거쳐 ▨ 여섯 번 옮겨 좌우대언(左右代言)이 되었다. 또 여섯 번 옮겨서 검교첨의정승 대우문 감춘추 상호군(檢校僉議政丞 大右文 監春秋 上護軍)에 이르고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의 호를 하사받았다. 품계는 여러 차례 승진하여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으며, 관작은 여러 차례 봉해져서 부원군(府院君)에 이르렀다.
대덕(大德)
3 말엽에 공이 원의 서울에 이르자 충선왕(忠宣王)이 보고 기뻐하여 드디어 대언(代言)으로 발탁하니 나이 27세이다. 이로부터 임금의 은총과 대우가 갈수록 더욱 풍성하여 전후하여 하사한 물품이 헤아릴 수 없었다. 이듬해인 지대(至大)
4 원년(충렬왕 34, 1308)에 임금이 원에서 돌아와 수령궁(壽寧宮)에서 왕위에 오르자, 명[旨]을 내려 위사(衛士)를 거느리고 직숙(直宿)하며 궁궐 안에서 섬기게 하였다. 그 해 겨울에 임금이 원의 서울로 조회하게 되자 따라갔으며, 이듬해에는 오대산(五臺山) 유람길에 수행하였다. 또 이듬해에 상도(上都 : 燕京)의 행차에 따라가니, 그 이듬해에 황제에게 글을 올려 무의장군(武毅將軍) 합포만호(合浦萬戶)로 삼았다.황경(皇慶)
5 초엽에 임금이 충숙왕(忠肅王)에게 왕위를 물려주자, 이에 함께 원으로 갔다. 얼마 뒤에 (고려) 조정으로 돌아오게 되니 여러 차례 사신(使臣)의 일을 공에게 명하였다. ▨ 이에 자주 오고 가다가 연우(延祐)
6 말년에 이르러서야 그만 두었다.
지치(至治)
7 연간에 충숙왕(忠肅王)이 또 원으로 가게 되니, 심왕(瀋王)과 서로 다투게 되었다. 불만을 품은 나쁜 무리들이 본국에 있으면서 모의를 더욱 심하게 꾸미자,
8 공은 스스로 의리를 굳게 지키면서 버텼다. 일이 진정되자 찬성사(贊成事)에 제수되고, 또 과거시험을 주관하였다.
9 조적(曹頔)이 변란을 일으키자,
10 공은 문을 닫아걸고 스스로 외부와의 접촉을 끊어버렸다. 조적이 패하고 영릉(永陵 : 忠惠王)이 복위(復位)하게 되자, 부원군(府院君)으로 봉하고 부(府)를 설치하여 관리를 두게 하였다.
명릉(明陵 : 忠穆王)이 승하하자 나라 안팎이 희망을 잃었다. 공은 이에 원로대신(元老大臣)들과 함께 원 황제<順帝>에게 글을 올려 지금의 임금<恭愍王>을 받들어 임금으로 삼기를 원하니, 작년 겨울에 임금이 ▨ 즉위하였다.
공이 병이 들자, 의원과 문병이 집에 끊이지 않았다. 지금에 이르러 끝내 일어나지 못하니, 춘추(春秋)가 72세이다.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임금이 슬퍼하여 조회를 보지 않고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장례를 예(禮)에 따라 치르게 하고, 시호를 창화(昌和)라 하였다. 8월 병진일에 자효사(慈孝寺)의 서쪽 언덕에 장례지내니 공의 뜻이다. 처음 중서령(中書令) 창화 이공(昌和 李公)
11의 장지(葬地)가 임진(臨津)
12에 있는데, 그 곁에 절이 있어서 자효사(慈孝寺)라고 하였다. 공이 일찍이 그 절을 중수(重修)하면서 또한 말하였다. “이 절이 폐사가 된지 오래 되었는데 내가 이와 같이 수리하였습니다. 내 전신(前身)이 창화공(昌和公)이 아닌 줄을 어찌 알겠소. 내가 죽은 뒤에 이 절로써 ▨ 이 곳에 장례지내고 ▨▨▨.”
공은 생김새와 행동이 훌륭하고 뛰어나 바라보면 우뚝하여 존경할 만하였으므로, 문정공(文正公 : 權溥)이 일찍이 말하기를, “이 아이가 반드시 우리 가문을 크게 일으킬 것이오.”라고 하였다. 귀하게 되어서도 뜰 아래에서 절을 올리는 것을 보면 반드시 일어났고, 재상의 지위에 있을 때에도 ▨▨▨▨▨▨▨▨▨ 예(禮)로 삼았다.
천성이 순수하고 중후하여 항상 말씨와 웃음이 적었다. ▨ 발[簾] 사이의 안석에 앉아 있었는데, 하루가 다 가도록 감히 명함을 올려 자기 이름을 알리려는 사람이 없었다.
스스로 봉양하는 것을 매우 후하게 하여 맛난 음식과 잔치 술상 등을 더욱 가득하게 하고, 매일 아침마다 10명의 승려에게 공양을 바친 것이 30년이나 되었다. 함께 ▨(〔교유한〕) 이는 예천 권한공(醴泉 權漢功), 완산 배정(完山 裴珽), 평강 채홍철(平康 蔡洪哲), 덕성 기철(德城 奇轍)인데 모두 당대의 위대한 인물이었다.
공의 나이 64세에 (어머니) 한국(韓國 : 卞韓國大夫人)이 별세하고, 또 2년 뒤에 (아버지) 문정공(文正公)이 별세하였다. 공의 동모제(同母弟) 세 명이 모두 공이 가문을 일으킨 데 힘입어 마침내 고위 관직에 올랐다.
부인의 성은 ▨ 오씨(吳氏)로 재상 인영(仁永)의 딸이다. 아들은 두 명으로, 염(廉)은 먼저 죽었는데 합포만호(合浦萬戶)를 지내고 현복군(玄福君)에 봉해졌으며, 적(適)은 왕부단사관(王府斷事官)을 지내고 화산군(花山君)에 봉해졌다. 딸도 두 명인데, 장녀는 행성낭중(行省郎中) 익성부원군(益城府院君) 홍탁(洪鐸)에게 출가하고, 막내는 유학제거 삼사좌사(儒學提擧 三司左使) 홍언박(洪彦博)에게 출가하였다.
손자는 여섯 명으로, 용(鏞)은 합포만호(合浦萬戶)이고, 현(鉉)은 전의령(典儀令)이고, 호(鎬)는 상호군(上護軍)이고, 균(鈞)과 주(鑄)는 모두 별장(別將)이고, 현(顯)은 ▨계관직(▨溪舘直)이다. 증손자는 세 명인데 모두 어리다.
내가 생각하건대, 「홍범(洪範)」
13의 오복(五福)
14은 사람이 바라는 것이지만, 능히 그것을 가지고 누리는 사람은 대개 드물다. 어찌 하늘이 아끼는 것은 반드시 사람을 기다려서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세상에서 말하는 부귀한 사람이라는 것은 공로로 얻었으나 혹은 덕으로는 잃어버리기도 하고, 처음에는 얻지만 혹은 끝내는 잃어버리기도 하며, 몸으로는 즐기면서도 혹은 마음에는 근심을 없앨 수도 없는 것이니, 말로 하자면 가련하게 생각할 것이 있지 않겠는가. 공은 부귀하였으나 이러한 몇 가지의 근심이 없었고, 또 장수를 얻었으면서도 자손이 모두 귀하게 현달하였으니, 아, 하늘이 공에게 내려준 것이 어떠하다고 하겠는가.
명(銘)하여 이른다.
어버이에게 순종하고서 임금에게 총애를 받지 못할 이 누구인가.
공이 충선왕을 만나니 진실로 그 신하가 되었네.
효도가 아니면 어찌 충성하겠으며 사랑이 아니면 어찌 은총을 받겠는가.
이미 부(富)하고 또 귀(貴)하니 ▨▨▨▨
가득 차면 넘치지 않음이 없고 높으면 위태롭지 않음이 없는데
나는 이와 달라서 능히 지키고 능히 가졌네.
▨ 명예가 있으니 어찌 좋게 마치지 않으랴.
무덤에 명(銘)을 새기니 ▨▨▨▨.
지정(至正) ▨▨ ▨월 16일 도인(道人) 의견(義堅) 새김.
〔출전:『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