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천군 시문정 정공묘지명 병서(烏川君 諡文貞 鄭公墓誌銘 幷序)
근세에 태평성대를 논하는 자들은 반드시 명릉(明陵 : 충목왕)을 일컫는다. 대개 영릉(永陵 : 충혜왕)은 군소배(群小輩)를 가까이 하여 악양(岳陽)
1의 화를 입었고, 총릉(聰陵 : 충정왕)은 나라를 보살핀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또한 최원(崔源)이 나라를 배반하는 환란이 있었다.
2 홀로 명릉만은 5년만에 나라가 잘 다스려져, 선비는 즐거워하고 백성은 의지하였다. 이를 소강(小康)이라 일컬어도 또한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때에 공은 낭관(郎官)으로 관리의 인사에 참여하였고, 4년이 지나 지위가 추밀(樞密)에 이르렀다. 일을 집행함에 공경하고 몸가짐이 정성스럽고 신중하여 일찍이 일국에 명예가 드러난 자로는 오천(烏川) 정문정공(鄭文貞公)이 마땅히 맨 먼저 일컬어져야 한다.
현릉(玄陵 : 공민왕)초에 예에 따라 재상에서 파면되어 한가하게 있은 지 13년이었다. 날마다 산수와 더불어 스스로 유유자적하면서 편안히 지내 바깥을 그리워함이 없었다. 현릉이 오래도록 이를 아름답게 하여 일성군(日城君)에 봉하였다. 얼마 후 밀직상의 재상(密直商議 宰相)에 임명되었다가, 외직으로 나가 합포(合浦)와 동북면(東北面)을 맡아, 내직으로 들어와서는 재상이 되고 외직으로 나가서는 장군이 되니 위망이 더욱 두터웠다.
지금의 임금(우왕)이 바야흐로 구신(舊臣)들을 등용하려 하는데, 공은 병이 났으니 아! 슬프다. 공이 병이 나 내가 가서 병문안을 하였는데 매우 중하지 않았는데, 몇 개월이 지나 또 가서 병문안을 하니 손님을 접대하지 못하였다. 돌아가자 내가 상당(上黨) 한맹운(韓孟雲)과 함께 조문하였으나, 나도 병이 나서 끝까지 장례에 참석하지 못해 지금까지 한스럽게 여긴다. 이제 그 아들과 사위가 묘지명을 지어주기를 청하니 아! 차마 어찌 사양할 수 있겠는가.
공의 이름은 사도(思道), 자도 사도(思道)이다. 어릴 때 이름은 양필(良弼)이다. 이미 과거에 급제하여 마땅히 피하여야 할 일이 있어 이름을 사도(思度)라 하였다. 현릉을 섬기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이름의 뜻은 대체로 안에 있든 나가든 도가 아닌 것이 없다는 뜻이다.
정씨는 연일(延日 : 경북 포항시 영일읍)의 망성(望姓)이다. 증조부 균지(均之)는 금자광록대부 문하시랑평장사(金紫光祿大夫 門下侍郞平章事)에 추증되었다. 조부 윤(潤)은 봉선대부 헌부의랑 지제교(奉善大夫 獻部議郞 知製敎)였다. 아버지 유(侑)는 중현대부 종부령(中顯大夫 宗簿令)이었다. 어머니 채씨(蔡氏)는 경원군부인(慶原郡夫人)에 봉해졌는데, 봉헌대부 헌부의랑(奉常大夫 獻部議郞)인 유길(惟吉)의 딸이다. 연우(延祐) 무오년(충숙왕 5, 1318) 11월 을묘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독서할 줄 알았으며, 조금 자라서 시를 읊으매 호방한 기상이 있어 동료들 사이에 명망이 있었다. 나이 19세에 순천군(順天君) 채홍철(蔡洪哲)과 연평군(延平君) 안규(安規)가 같이 고시관으로 과거를 주관할 때 공은 한 번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후지원(後至元) 병자년(충숙왕 복위5, 1336)이다. 지정(至正) 신사년(충혜왕 복위2, 1341) 봄 권지전교교감(權知典校校勘)이 되었다. 얼마 안 있어 주부(注簿)로 옮겼으며, 여름에 낭(郎)이 되었다 겨울에 낭의 직을 버리고 당후관(堂後官)이 되었다. 수고로 승봉랑 감찰규정(承奉郞 監察糾正)에 임명되었다. 벼슬길에 들어온 지 10개월만에 참관이 되었다. 이 또한 드문 일이었다.
갑신년(충목왕 즉위, 1344) 명릉(明陵 : 충목왕)이 즉위하자 규정(糾正)에서 군부좌랑(軍簿佐郞)으로 뛰어 올랐다. 이듬해 봄 정랑(正郞)으로 올려졌으며, 여름에 전리(典理)로 옮겼다. 무릇 18일만에 옮겨 봉선대부 성균사예(奉善大夫 成均司藝)에 이르렀다. 겨울 11월 밀직사좌부대언 군부총랑 예문관직제학 지제교(密直司左副代言 軍簿摠郞 藝文館直提學 知製敎)에 발탁되어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에 임명되었는데, 관계(官階)는 계속 봉상(奉常)이었다. 좌랑(佐郞)으로 있은 지 1년이 지나 승선(承宣)으로 임명하는 명이 있었다. 이 또한 매우 드문 일이었다. 이듬해 좌부대언 전리총랑(左副代言 典理摠郞)으로 올려졌으며, 또 우대언 지군부(右代言 知軍簿)로 승진하였다. 6월 좌사의대부(右司議大夫)로 올려졌는데, 관계(官階)는 중정대부(中正大夫)였다. 겨울에 관계는 정순대부(正順大夫)가 되고 우대언 동지춘추관사(右代言 同知春秋館事)로 승진되었다.
또 이듬해 선비들에게 성균관에서 시험을 보여 지금의 지밀직(知密直) 박형(朴形) 등 92인을 뽑았는데, 당시에 훌륭한 선비를 얻었다고 칭송하였다. 여름 지신사 지전리(知申事 知典理)로 승진되었다, 가을 봉익대부 전리판서(奉翊大夫 典理判書)에 임명되었는데, 관직(館職)은 예전과 같았다. 얼마 후에 명릉이 장차 공을 크게 쓰고자 하여 공을 밀직사 직제학(密直司 直提學)에 임명하였다. 처음 대언(代言)에 임명된 지 무릇 22개월 만에 양부(兩府)에 들어갔다. 공의 나이 겨우 30세였다. 그러나 선비들의 여론은 지나치게 일찍 임명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였다. 당시 공이 얻은 명예를 가히 알 수 있다.
병신년(공민왕 5, 1356)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니 여묘(廬墓)살이를 하면서 3년상을 마쳤다. 계묘년(공민왕 12, 1363) 왕이 말하기를 “정모(鄭某)는 맡은 바 일을 충성스럽게 하고 효도 또한 이와 같으므로 나는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하고, 일성군(日城君)에 봉하였다. 이로부터 무릇 하늘과 땅에 기도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공에게 명하였으니 공의 정직함을 취한 것이다. 가을 밀직부사 상의 대보문 동지춘추관(密直副使 商議大寶文同知春秋館)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봄 한양부윤(漢陽府尹)이 되었다가 가을 동지밀직(同知密直)으로 중앙에 불려갔다. 얼마 안 있어 군(君)에 봉해지고 합포(合浦)를 다스렸다. 군사 기밀과 민간의 업무의 양쪽 모두 마땅함을 얻었고, 도내가 편안하게 되었다. 때마침 취성(鷲城 : 신돈)이 지금의 판삼사(判三司)인 최영(崔瑩)을 죽을 죄로 다스리고자 자기 무리인 이득림(李得霖)에게 국문하도록 하였다. 공은 죽기를 무릅쓰고 불가함을 고집하였다. 득림(得霖)이 취성에게 하소연하였고, 취성은 임금에게 아뢰어 합포를 진무하는 직책에서 파직시켰다.
정미년(공민왕 16, 1367) 첨서밀직(簽書密直)이 되었다. 신해년(공민왕 20, 1371) 지사(知司)로 승진되었다. 이듬해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의 호를 받았다. 또 이듬해 밀직(密直)으로 행안변부사(行安邊府事)와 진동북면(鎭東北面)이 되었다. 직명은 상원수(上元帥) 또는 도순문사(都巡問使)로, 군민(軍民)의 모든 사무가 한 몸에 모였다. 일을 처리하는데 마땅한 도리가 있어, 사람들이 지금까지 칭송하고 있다. 계축년(공민왕 22, 1373) 공신호 가운데 단성(端誠)을 고쳐 충근(忠勤)이라 하였다. 그 해 겨울 본관(本官)으로 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가 되었다.
금상(今上 : 우왕)이 즉위하자 광정대부 지문하성사(匡靖大夫 知門下省事)로 승진되었다. 얼마 안 있어 정당문학 지서연사(政堂文學 知書筵事)에 임명되었으며, 관직(館職)은 모두 예전과 같았다. 이듬해 평리상의(評理商議)로 고쳐 임명되었다. 얼마 안 있어 일성군(日城君)에 봉해졌다가, 또 얼마 안 있어 오천군(烏川君)으로 고쳐 봉해졌다. 대진현(大進賢 : 進賢館大提學)이 되고, 공신호를 더하여 충근절의익찬(忠勤節義翊贊)이라 하였다.
무오년(우왕 4, 1378) 공의 갑자(甲子)가 일주하여 다시 돌아왔으나, 명성과 절의는 조금도 어그러짐이 없었으나 병에 걸리니 천명(天命)이다. 기미년(우왕 5, 1379) 9월 15일 집에서 별세하였다. 향년 62세였다. 관청에서 장례 일을 돌보아주었으며, 11월 경신일 율촌(栗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아! 군자로서 그 수명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 자는 많다. (공은) 수명을 누리긴 하였으나 겨우 이순(耳順)을 넘겼다. 하늘이 사람을 없애는 것이 심하다고 할 수 있다.
공은 모두 두 번 장가갔다.
배씨(裴氏)는 소윤(少尹) 현보(玄甫)의 딸이다. 두 딸을 낳았다. 장녀는 전법총랑(典法摠郞) 이용(李容)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사헌지평(司憲持平) 안경공(安景恭)에게 시집갔다. 정씨(鄭氏)는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보(誧)의 딸이다. 아들 하나를 낳았다. 이름은 홍(洪)으로 지금 전교부령(典校副令)이다.
손자는 남녀 약간 명이 있다. 총랑(摠郞 : 장녀의 남편)은 아들이 없으며, 지평(持平 : 차녀의 남편)은 1남을 낳았는데, 이름은 금경(金經)이다. 부령(副令 : 손자)은 1남 2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명에 이르기를,
문정공(文貞公)의 어짊이여, 문무를 모두 갖추었네.
몸은 양부(兩府)에 들어가서 30여 년간 지냈으며
두루 네 임금을 섬기는 동안 풍채가 맑고 고상했도다.
검소하나 고집을 부리지 아니하며 호방하나 교만하지 않았네
아름답도다! 문정공이여 그 이름 얻음 마땅하네.
천년이 지나도록 오히려 이 묘지명이 증거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