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有元] 봉의대부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낭중(奉議大夫 征東行中書省 左右司郎中)이고, 고려국(高麗國)의 단성좌리공신 삼중대광 흥안부원군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端誠佐理功臣 三重大匡 興安府院君 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事)이며, 시호가 문충공(文忠公)인 초은선생(樵隱先生) 이공(李公) 묘지명 및 서문원나라가 일어난 지 백 여년이 되었으나 진사로서 벼슬이 재상에 이른 자는 아주 드물었다. 고려의 선비로서 과거에 급제한 이는 한 사람이고, 벼슬을 거듭하여 대부(大夫)에 이른 이는 오직 초은(樵隱)선생과 우리 부자(이곡과 이색)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벼슬이 모두 동성낭중(東省郎中)에 그쳤다. 황제의 수례가 북쪽으로 파천한 지 7년이 되었는데,
1 선생이 세상을 떠나시고, 색(穡)이 병으로 누어 일어나지 못한 것이 또 6년이 되었다. 내가 처음 병에 걸렸을 때에, 병세가 심각하였다. 선생이 내 집문을 지나다가 슬피 울고 오래 있다가 가셨는데 두어 달 만에 선생이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지금까지도 이를 슬퍼한다. 선생의 장손(長孫) 밀직대언(密直代言) 존성(存性)이 와서 말하기를, “선생은 우리 할아버지와 같이 문장을 가지고 의논하기를 가장 오래한 분이며, 우리 할아버지를 아는 분은 이 세상에서 선생만한 분이 없습니다. 마땅히 우리 할아버지의 묘지명을 써 주십시요.”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렇다. 죽고 사는 것은 타고난 명이 있는 것이나, 나의 죽음이 선생보다 앞섰거나 선생이 돌아가시면서 나도 잇달아 죽었다면 역시 그만이었겠는데, 지금은 나의 병도 조금 나았으니, 선생의 묘에 묘지명이 안 되어 있다면 내가 어찌 사양하랴.”했다. 선생의 성은 이씨요, 이름은 인복(仁復), 자는 극례(克禮)이며 경산부(京山府 : 지금의 경북 성주) 사람이다. 증조 장경(長庚)은 공검하고 위엄이 있어 고을 사람들이 다들 엄하다고 두려워하다. 비록 조정에 벼슬을 한자라도 행동거지에 대해 서로 돌아보며 말하기를, “우리 이공이 이를 듣는다면 그 뜻이 옳지 못하다고 하지나 않겠는가.”하였고, 또 그들이 허물이 있을 때에는 공이 반드시 글을 보내어 꾸짖었다. 늙은 뒤에 집에 있을 때에도 고을 관원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면, 반드시 평상에서 내려 땅에 엎드렸다가 그 소리가 들리지 아니할 때를 기다려서 일어나 앉았다 한다. 아들은 넷이다. 백년(百年)은 모관(某官)을 지냈다. 천년(千年)은 모관(某官)을 지냈다. 요양성 참지정사(遼陽省 參知政事) 승경(承慶)을 낳았고 손자가 귀하게 된 까닭에 모관(某官)에 추증되었다. 만년(萬年)은 모관(某官)을 지냈고, 막내아들은 조년(兆年)이다. 이 분이 바로 선생의 조부이다. 벼슬은 정당문학(政堂文學)이고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선생은 평소 한가로이 있으면서 말할 때마다 증조부 호장공이 대단한 분이라고 칭송하였고, 또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조부는 악한 것을 원수같이 미워하셨고, 남이 급한 일에는 물이 아래로 흐르듯이 달려가 구하셨다. 나는 일생을 두고 이를 사모하고 배우려 하여도 되지 않는다.” 하였다. 문열공(文烈公 : 이조년)은 아직 어른이 되기 전에 정신과 풍채가 준수하고 빼어났다. 초계 정윤의(草溪 鄭允宜)가 (경산부의) 부사로 왔다가 한 번 보고 보통 사람과 다름을 알고서 그의 딸로 처로 삼게 하였다. 곧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에 임명되니, 명성이 나날이 높아졌다. 충혜왕을 엄격하게 섬겨 임금이 꺼려했다. 매번 공이 들어 갈 때마다 임금이 신발소리만 듣고서도, “이 아무개가 오나보다.”하고서, 좌우에 있는 사람들을 내보내고 용모를 바르게 하였다. 기묘사변(己卯事變 : 충혜왕 복위, 1339 )
2때 문열공은 임금을 따라 원나라 서울로 가서 이익재(李益齋 : 이제현)에게 청하여 대신 글을 써 가지고 장차 승상부에 올리려 했다. 마침 승상(丞相) 이 실각하여 글을 올리지 못하였다. 이 사실을 들은 이는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 또 말하기를, “담(膽)이 몸보다 크다는 말은 이공(李公)을 두고 한 말이다.”하였다. 본국에 돌아와서 공을 정할 때 마땅히 추밀(樞密)의 관직이 돌아갔어야 했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이 아무개는 나이는 늙었으나 그 뜻이 아름답다.”하고서 정당문학(政堂文學)의 벼슬을 내렸다. 하루는 임금이 동쪽 언덕에서 참새 잡이 놀이를 하고 있었다. 공이 곧장 앞으로 들어가서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벌써 명이(明夷)
3시절의 일을 잊으셨습니까. 소인의 무리와 친하여 극히 하찮은 놀이를 즐기시는 것은 종묘를 받드는 도리가 아닙니다.”하니, 그 말이 매우 절실하였다. 임금이 속으로는 크게 화가 났으나 그 뜻을 밖으로 감내지 못하고 부드러운 말로 치사하고 보냈다. 공이 집에 돌아와서 탄식하기를, “임금의 나이가 한창인데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하고는 바를 마음대로 한다. 나도 이미 늙어 또한 아무런 도움이 없으니, 지금 물러가지 않으면 반드시 화가 돌아올 것이다. 또 자주 간하여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견책이 돌아가는 곳이 있을 것이다. 지금 내가 이미 그 아름다운 일을 받들어 드릴 수 없을 뿐더러, 도리어 그의 잘못만을 더하게 될 것이니, 이는 신하로서 임금을 사랑하는 바가 되지 못하니 떠나가는 것만 같지 못하다.”하고 다음날 필마로 고향으로 돌아가 죽을 때까지 벼슬길에 나오지 않았다. 선생의 아버지 포(褒)는 순박 돈후한 군자로서, 재상의 지위에 이르렀고 순서를 좇고 예법을 따랐다. 아들 5명을 두었다. 맏아들이 곧 선생이고, 다음이 지금 시중 벼슬에 있는 인임(仁任)이다. 그 다음은 아무개인데 병으로 벼슬길에 나가지 아니하였다. 그 다음의 아무개와 아무개는 모두 벼슬이 추밀(樞密)에 이르렀다. 선생의 우애의 정은 천성에서 우러나왔고, 여러 아이들도 선생을 섬기기를 매우 공손히 하여 세상 사람들이 다 부러워하였다. 선생은 태어나면서부터 용모가 준수하고 건장하였으며 점점 자라면서 글을 읽을 줄 알았으며, 행동거지가 노성(老成)한 사람과 같았다. 문열공이 매번 공의 등을 어루만지며, “우리 집안을 크게 빛낼 자는 너희들의 형과 아우일 것이다.”하였다. 아우는 시중공(侍中公 : 이인임)을 말한 것이다. 태정(泰正) 병인년(충숙왕 13, 1326) 선생의 나이 19세에 판서(判書) 신천(辛蕆)이 주관한 감시(監試)와 길창군(吉昌君) 권준(權準)과 밀직(密直) 박원(朴遠)이 지공거(知貢擧)인 과거에 연달아 급제하였다. 이듬해 3월 복주사록(福州司錄)에 임명되었다. 기묘년(충숙왕 16, 1329) 교감전교(校勘典校), 그 이듬해 전의직장(典儀直長)에 각각 임명되었다. 선생은, “문장을 하는 데는 정밀히 연구하고 널리 공부하지 아니하면 그 지극한 경지에 이를 수 없다.”고 말하였다. 붓을 잡으면 고치고 쓰고 또 손질하여 지극히 고심하여, 뜻을 얻은데 이르러서야 사람들에게 보였다. 말과 뜻이 엄중하고도 심오하여 일세에 뛰어났으며, 사물을 서술하거나 읊을 때에는 왕왕 풍자적인 뜻이 포함되어 있었다. 후지원(後至元) 무인년(충숙왕 복위, 1338) 사관들이 서로 말하기를, “이직장(李直長)의 문학이 높고 세속에 붙어 좇지 아니하니, 어찌 추천하지 아니하겠는가.”하였다. 이에 예문수찬(藝文修撰)에 임명되었다. 기묘년(충숙왕 복위8, 1338) 춘추공봉(春秋供奉)에 승진되었다. 경진년(충혜왕 복위1, 1340) 첨의주서(僉議注書)로 옮겼고, 지정(至正) 신사년(충혜왕 복위2, 1341) 승봉랑 감찰규정(承奉郞 監察糾正)에 승진되었으며, 5월에는 좌정언 지제교(左正言 知製敎)에 임명되었다. 조금 뒤 통직랑 전의시승 지제교(通直郞 典儀寺丞 知製敎)에 올랐다. 그 해 가을 정동향시(征東鄕試)에 제2등으로 합격하였다. 겨울에는 기거사인(起居舍人)으로 옮겼다. 계미년(충혜왕 복위3, 1342) 원나라 서울에서 실시하는 회시(會試)에 응시, 급제하여 장사랑 대령로 금주판관(將仕郞 大寧路 錦州判官)에 임명되었다. 원나라 서울에 있을 때 본국에서 우헌납(右獻納)으로 옮겼으며, 계미년(충혜왕 복위4, 1343) 다시 기거랑 기거주(起居郞 起居注)로 옮겼다. 갑신년(1344) 명릉(明陵 : 충목왕)이 왕위에 올라 유신(儒臣)들을 예를 갖추어 불렀다. 또 “이모(李某)가 원나라 과거에 급제한지 이미 3년이 되었는데, 그를 발탁하지 아니하면 어찌 나의 문학을 숭상하는 본의이겠는가.”하였다. 전리총랑(典理摠郞), 사복정(司僕正),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등 세 번 관직에 임명하고, 모두 관직(館職)과 지제교 춘추관편수관(知製敎 春秋館編修官)을 겸하게 하였다. 다음해 정월 임금은 “내가 이인복을 대접한 것이 아직도 다하지 못하였다.”하고 그의 원래 관직에 밀직사 우부대언(密直司 右副代言)을 더해주었다. 그 해 겨울 봉익대부 판서군부(奉翊大夫 判書軍簿)가 되었다. 또 다음 해 전리(典理)로 옮겼다. 이 해 10월 임금은 “이모(李某)를 지금부터 크게 써야 하겠다.”하고,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승진 임명하고, 또 선생에게 서연(書筵)에 나와 강의할 것을 명하였다. 선생은 용모가 엄숙하고 말이 간략하면서 입이 무거우므로, 충목왕이 늘 좌우에 있는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나는 이공을 보면 나도 모르게 몸과 마음이 숙연하여진다.” 하였다. 이 해 나의 부친 가정공(稼亭公 : 이곡)이 건의하여 충렬·충선·충숙왕의 세 임금의 실록을 편수하기로 하였다. 시중(侍中) 이익재(李益齋 : 이제현)와 찬성(贊成) 안근재(安謹齋 : 안축)가 년대를 나누어 집필하게 되었는데, 공도 참여하였다. 이듬해 봄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오르고, 그 해 가을에 다시 지사(知司)에 올랐으며 겨울에 또 좌사(左使)에 올랐다. 기축년(충정왕 1, 1349) 정동행성도사(征東行省都事)에 임명되어, 본국의 벼슬은 그만두었다. 신묘년(1351) 현릉(玄陵 : 공민왕)이 즉위하였다. 임진년(1352) 가을 조일신(趙日新)이 불평 분자의 무리들을 모아서 한밤중에 기황후(奇皇后)의 형인 기원(奇轅)을 죽이고, 또 왕궁에 들어와서 숙위(宿衛)하고 있는 근신(近臣)들을 죽이고서 스스로 정승이 되어 내외에 호령하였다. 조정의 신하들이 불안과 공포에 싸여 모두 입을 다물고 한 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다. 임금이 가만히 선생을 불러서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신하로서 감히 이러한 난동을 일으켰으니, 마땅히 고유한 형벌이 있을 것입니다. 하물며 원나라 조정이 당당히 있고 그 법령이 밝게 서 있는데, 만약 이를 머뭇거리면 신은 그 허물이 아마도 전하에게까지 미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하였다. 임금은 드디어 조일신을 죽이기로 결정하였다. 일이 진정되고 나서 선생에게 명하여 이에 대한 글을 지어 원나라에 보고하게 하였다. 임금이 본래 공을 중하게 여겨서 장차 크게 쓰려 하던 차에 이러한 대답을 듣고서는 더욱 소중히 대하였다. 계사년(공민왕 2, 1353) 다시 밀직사(密直司)에 들어가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가 되고, 가을에는 광정대부 정당문학 진현관 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匡靖大夫 政堂文學 進賢館大提學 知春秋館事 上護軍)에 승진되었고, 이듬해 감찰대부를 겸임하였다.
4을미년(공민왕 4, 1355) 봄 선생이 정부의 관직에서 사퇴하고,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다. 가을 다시 정당문학으로 돌아갔으며, 겨울 정동성 원외랑(征東省 員外郞)에 임명되었고, 또 감찰대부를 겸하였다. 병신년(공민왕 5, 1356) 관제가 새로 시행되어 금자대부(金紫大夫)의 직첩을 받고, 전과 같이 정당문학 보문각대학사 동수국사 판한림원사(政堂文學 寶文閣大學士 同修國史 判翰林院事)의 직책을 갖고, 또 어사대부를 겸임하였다. 그때 원나라에서 특사를 반포하기 위하여 온 사신이 돌아가자, 우리나라에서 마땅히 표문을 올려 은혜에 사례하여야 될 터인데 사절로 보낼 사람의 인선이 어려웠다. 임금이 이르기를, “지금 재상들 중에서 대체(大體)를 알고 절의를 지킬 이를 구한다면 이모(李某)와 같은 사람이 없다.”하고 드디어 사절의 일을 명하였다. 선생은 조금도 사양하지 아니하고, 갔다 돌아왔다. 사람들은 임금의 뜻을 잘 받들었다고 공을 칭송하였다. 정유년(공민왕 6, 1357)에 감수국사와 지공거가 되어, 지금의 정당문학 염흥방(廉興邦) 등 33명을 선발하였다. 당시의 공론은 훌륭한 선비를 얻었다고 칭송했다. 기해년(공민왕 8, 1359)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로 고쳐 임명되고 어사대부를 겸하였다. 선생은 일찍이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외람되게도 아무 재능 없는 사람으로 대관(臺官)의 일을 맡은 것이 두세 번이나 된다. 그러나 기강을 진작한 바가 없다. 스스로 생각하건대 세세한 일은 위에 번거롭게 주달할 것이 못되고, 큰일은 또 정부가 있으니 중간에서 흔들고 간섭할 것이 못 되므로, 나는 한 가지의 일도 말할 것이 없었다.” 하였다. 그러나 선생이 대관직에 들어가면서부터 백관의 기강이 숙연하였으니, 선생의 겸손함이 대개 이와 같았다. 경자년(공민왕 9, 1360) 참지중서정사(參知中書政事)에 임명되었다. 신축년(공민왕 10, 1361) 부친상을 당하였다. 그 해 겨울 사적(沙賊 : 홍건적)
5이 변방에 침입하여 국가가 남쪽으로 옮겨 우선 적의 예봉을 피하기로 하였다. 선생이 지금의 시중공(侍中公 : 이인임)과 같이 충주행궁(忠州行宮)으로 임금을 맞아 뵈었다. 임금이 몹시 기뻐하고 같이 가기를 명하였다. 다음해 2월에 우리 군사가 크게 집결하여 서울을 회복하였으나 큰 병란을 치른 뒤인지라 모든 일에 마땅한 조치가 있어야 하므로, 임금은 선생을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로 삼았다. 바로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었다. 겨울에 중대광 삼사좌사(重大匡 三司左使)에 올랐다. 계묘년(공민왕 12, 1363) 봄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임명되고, 여름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右文館大提學 監春秋館事)에 오르고, 단성좌리(丹誠佐理)의 공신호를 받았다. 갑진년(공민왕 13, 1364) 흥안군(興安君)에 봉하고 판예문관 춘추관사(判藝文館 春秋館事)가 되었다. 그 해 겨울 삼중대광 도첨의찬성사 판판도사사(三重大匡 都僉議贊成事 判版圖司事)에 올랐다. 패라첩목아(孛剌帖木兒)가 군병을 인솔하고 조정에 들어와 승상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대신하여 앉았다. 원나라에 들어가서 그 사실을 황제에게 알려야 하는데 인선(人選)이 곤란하였다. 임금이 또 “이모(李某)가 아니면 불가하다.”고 하였다. 선생은 원나라에 가서 승상을 만났다. 언사가 간명하고 모습에 위엄이 있었다. 승상이 여러 번 주목하고, 선생이 물러나가자 시종하는 자들에게 말하기를, “앞에 나와서도 두려워하는 바가 없다고 한 말은 바로 이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하였다. 임금이 천자에게 막속(幕屬 : 막료)으로 천거하였다. 또 선생을 좌우사(左右司)의 장으로 삼고, 봉의대부(奉議大夫)로 승진하였다. 을사년(공민왕 14, 1364)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에 봉하고, 곧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임명되었다. 윤10월에 내가 선생과 같이 공원(貢院)에 있었는데, 선생에게 봉군(封君)하는 명이 또 내렸다. 지금 전교시승(典校寺丞)으로 있는 윤소종(尹紹宗) 등 28명을 선발하였다. 기유년(공민왕 18, 1369) 선생이 지공거가 되고 내가 부지공거가 되어, 지금 좌헌납(左獻納)으로 있는 유백유(柳伯濡) 등 33명을 뽑았다. 경술년(공민왕 19, 1370) 검교시중(檢校侍中)이 되고, 신해년(공민왕 21, 1372)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가 되었는데, 관계와 작위가 이전과 같았다. 갑인년(공민왕 23, 1374) 선생의 나이 67세 3월에 등에 종기가 생겼다. 선생은 스스로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을 알고서, 옷을 갖추어 입고 북향하여 머리를 땅에 조아리며 사퇴, 하직하는 형상을 지었다. 시중공에 말하기를, “재신이 죽으면 관에서 장례를 치러 주는 것은 국가의 두터운 은혜이지만, 돌아보건대 나는 평일에 실오라기나 털끝만한 도움도 국가에 드린 바 없었으니 이대로 죽는 것만도 부끄러움이 있다. 공은 나를 위하여 잘 말하여 그런 은전을 내리지 말도록 하라.”하였다. 말을 마치자 원복(元服)을 몸에 입히게 하고 조용히 돌아갔다.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매우 애도하여 소선을 행하고, 조회를 정지하고서 사신을 보내어 제사를 올리게 하고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하였다. 서거한지 3일만에 도성 남쪽 속촌(粟村) 언덕에 장사지냈다. 이는 선생의 평일의 유명(遺命)에 따른 것이다. 이듬해 충정왕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증조부에게 벼슬을 증직하였다. 조부는 관함을 갖추어 쓰고 시호를 문열(文烈)이라 하였다. 공민왕 21년에 공로를 평론하여 성산후(星山侯)에 추증(追贈)하고, 충혜왕의 묘정에 배향하였다. 아버지도 관함을 갖추어 쓰고, 시호를 경원(敬元)이라 하였다. 증조모 아무개 씨는 아무개 군부인에, 조모 정씨도 아무개 군부인에, 모친 설씨는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인 문우(文遇)의 딸로 아무개 군부인에 각각 봉해졌다. 선생은 세 번 장가들어 아들 2명을 낳았다. 첫째 부인은 판사(判事) 강거정(姜居正)의 딸로서 아들 향(向)을 낳았다. 벼슬은 낭장이다. 강씨가 죽고 계실(繼室) 이씨를 맞으니, 모관(某官)인 아무개의 딸로, 아들 용(容)을 낳았다. 그의 벼슬은 봉상대부 전법총랑(奉常大夫 典法摠郞)이다. 두 아들이 다 선생보다 먼저 죽었다. 또 하씨(河氏)에게 장가들었다. 모관(某官)인 아무개의 딸로서 아들이 없었다. 손자 한 사람은 낭장(向)이 낳았는데, 벼슬은 대언(代言)이며, 증손녀 두 사람이 있었다. 대언(代言)이 먼저 모관(某官)인 윤모(尹某)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딸만 낳고 죽었다. 지금 다시 판개성부사 이성림(李成林)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색(穡)이 이미 선생의 뒤를 따랐으므로 일찍이 보니 선생은 남의 착한 일을 들으면 비록 작은 일일지라도 반드시 기뻐하고, 한 가지 일이라도 잘못된 것을 보면 반드시 얼굴에 노기를 띄었다. 그러나 입 밖에 내어 그 잘못을 말하는 법이 없었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선생은 입이 둔한 모양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나에게 말하기를, “내 성품이 편벽되고 조급하여 혹시 말하다가 실수할까 두려워서 말을 더듬었는데, 지금 늙었으나 아직도 마음의 움직임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니, 이것은 나의 수양이 아직도 다 이르지 못한 것이다.” 하였다. 아아, 선생의 학문의 정밀함과 지조를 지킴이 돈독함으로 말미암아 능히 그 타고난 기질을 변화하였으니, 그 행함에 앞서 삼가고 살핌을 다른 사람이 미처 따르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제 명(銘)하려 한다. 명(銘)하기를,“성산의 영화로서 천자(天子)뜰에 과거하니, 동해에 빛이 흘러 문성이 찬란하다.행실을 극히 삼가고 말을 어려워하니 오직 옛날의 인재요 금세의 준걸이었다.오직 어려운 때를 만나거나 어려운 사명이 있을 때면,공의 몸이 비록 파리하여도 공은 반드시 관문을 나갔다.황친(皇親)을 죽이고 황명을 거역함은 모두 왕정을 범한 것이라,만인의 눈이 구구하였으나 공은 조금도 근심하지 않았으며,공이 서쪽에서 돌아올 때 횐말을 타고 오시니 집집이 서로 경축하였다.우리 공이 돌아오셨다. 이 나라는 뼈만 남았더니 공이 와서 살을 붙였다.우리 공이 안 오시면 우리 추위 뉘라서 데워줄까.사람들이 말하기를, 공은 문장의 조종이라 일컬었다.오직 나라뿐이요, 한 몸과 집을 잊었으며, 전대에 또한 능하였다.열렬한 그 행실 태묘에 배향하셨다. 뒤를 열어 상서 내리니 자손이 길하고 창성하리라.속촌의 양지와 성산의 산마루에 영혼은 가지 않는 곳 없으리니, 조손이 서로 바라보리라.아, 흥안부원군이여, 길이길이 잊지 못하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