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당선생 김공묘지명 병서(松堂先生 金公墓誌銘 幷序)
지정(至正) 신사년(충혜왕 복위2, 1341) 나(이색)는 14세로 성균시(成均試)에 응시했다. 그때 뜰에서 선생이 관복(袍笏)을 갖추고 단정히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우뚝 솟은 태산처럼 엄숙하여 여러 선비들이 숨소리를 죽이고 감히 떠들지 못하였다. 그후 문생(門生)이 되어 오가며 가르침을 들었다. 따뜻한 말과 부드러운 낯빛으로 나라의 법도를 밝히고 인재를 이끄는데에 부지런히 힘썼고 풍속이 날로 쇠퇴해가는 것을 탄식하셨다. 집안에서는 재산을 모으는데 힘쓰지 않고 좌우에 거문고와 책을 가까이하며 담박하였다. 동쪽 언덕에는 소나무를 심고 남쪽 연못에는 연꽃을 키웠다. 매년 뜰에 목단꽃이 피면 술과 음식을 갖추고 문생들을 불러놓고 대부인(大夫人)에게 장수를 기원하고, 형제와 자손들이 화기애애 하였다. 효성과 우애의 지극함이 천지신명에게 통하여 대부인(大夫人)은 91세의 나이를 누렸으니 참으로 성대한 일이었다.
병신년(공민왕 5, 1356) 3월 대부인(大夫人)께서 병으로 돌아가셨다. 아버지 문정공(文正公) 묘 곁에 장사지내고 그 곁에서 복제(服制)를 마치었다. 선생은 평소 병이 있어 행보가 힘들었지만 조석으로 음식을 올리고 청소하는 것을 반드시 직접하며 조금도 빠뜨리지 않았다. (지금) 나라의 풍속에 부모의 무덤 지키는 것을 노비에게 대신하게 하고 그들의 신역(身役)을 면제해주었다. 선생은 차마 부모에게 가볍게 할 수 없다고 하여 직접 행하였다. 근래의 재상들에게서 듣지 못한 일이다.
선생의 성은 김씨, 이름은 광재(光載), 자는 자여(子輿), 호는 송당거사(松堂居士)이다. 광주(光州)사람인 사공 김길(司空 金吉)의 후손이다. 사공(司空)은 태조를 도운 공이 있었다. 그의 먼 후손은 중랑장(中郎將) 광서(匡瑞)이다. 중낭장이 삼사사(三司使) 위(偉)를 낳았다. 삼사사는 대장군(大將軍) 경량(鏡亮)을, 대장군은 감찰어사 수(須)를 낳았다. 원종초 삼별초(三別抄)가 (고려가 원에) 복속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반란을 일으켜 해도(海島)에 들어갔다. 어사(須)가 영광(靈光)을 지키다 죽었다. 어사는 국자좨주(國子祭酒) 고영중(高瑩中)의 손자인 몽경(夢卿)의 딸과 결혼하였다. 고씨는 102세까지 살았다. 처음에 고씨가 샛별(明星)이 가슴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서 쾌헌선생(快軒先生)인 문정공(文正公) 태현(台鉉)을 낳았다. (문정공)은 네 임금을 섬긴 원로로 나라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고문역할을 하였으며, 정승으로 벼슬을 그만두었다. 국초이래 문장을 모아 『해동문감(海東文鑑)』이라고 이름 붙였으며, 지금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성균시를 관장하고 예부시(禮部試)의 지공거(知貢擧 : 과거 고시관)를 역임하였다. 뽑은 선비 가운데 이름난 사람이 많았다. 죽계 안근재(竹溪 安謹齋 : 安軸)와 최졸옹(崔拙翁 : 崔瀣) 등이 특히 뛰어난 사람이다. 행수낭장(行首郎將) 김의(金儀)의 딸이 첫 부인이며, 아들 하나를 두었다. 광식(光軾)으로 벼슬이 선부의랑(選部議郞)에 올랐다. 태조 아들 효은태자(孝隱太子) 후손인 시랑(侍郞) 왕정단(王丁旦)의 딸을 둘째 부인으로 맞아들여 3남 2녀를 두었다. 큰 아들 광철(光轍)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밀직사(密直使)에 올랐다. 둘째가 선생(光載)이며, 셋째는 광로(光輅)로 과거에 급제하였다. 큰 딸은 정당문학(政堂文學) 안목(安牧)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밀양군(密陽君) 박윤문(朴允文)에게 시집갔다. 공의 형제 세사람이 모두 과거에 합격하여 대부인(大夫人)은 평생토록 나라로부터 녹을 받았다. 박씨(둘째 사위)의 아들 넷과 안씨(첫재 사위)의 손자 셋도 모두 과거에 합격하여 당시 사람들이 부러워하였다.
공은 지원(至元) 갑오년(충렬왕 20, 1294) 정월 갑자일에 태어났다. 태어났을 때 키가 두 자가 넘어, 부모가 기특하게 생각하여 특별히 사랑하였다. 관례(冠禮)를 치르고 나서 황경(皇慶) 계축년(충숙왕 즉위, 1313) 과거에 급제하였다. 좌주인 일재선생 권정승(一齋先生 權政丞 : 權漢功)은 공이 예의가 밝은 것을 사랑하여 후하게 대하고 성균학관(成均學官)으로 임명하였다. 지순(至順) 경오년(충혜왕 즉위, 1330) 충혜왕(忠惠王)을 따라 원나라 수도에 간 공으로 사복시승(司僕寺丞)에 임명되고 곧 도관정랑(都官正郞)으로 옮겼다.
후지원(後至元) 기묘년(충숙왕 복위8, 1339) 충혜왕이 조적(曹頔)에 폐위될 뻔 했다가 다행히 이겨냈으나, 그의 무리가 많이 (원나라) 권세가들에 붙어 자신들의 뜻을 이루고자 하였다. 왕이 원나라의 수도에 갈 때에 공은 ‘우리 임금이 위태롭다. 내가 차마 혼자만 면할 수 있겠는가’하고 따라 갔다. 천자의 은덕에 힘입어 (충혜왕이) 왕위를 회복하고 고려에 왔다. 경진년(충혜왕 복위1, 1340) 가을 7월이었다. 군부총랑(軍簿摠郞)으로 관리를 임명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성균제주 삼사좌윤 판전교시사(成均祭酒 三司左尹 判典校寺事)로 관직을 옮겼지만 항상 관직(館職)과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다. 다음해 가을 성균시를 주관하여 지금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인 성사달(成士達)
1 등 99인을 뽑았다. 당시 선비를 잘 뽑았다고 칭송되었다. 충혜왕이 평소에 공의 엄격함을 꺼렸고 (왕의) 주변도 공을 싫어하였다. 핑계댈 말이 없어 결국 ‘김공은 고요함을 사랑하며 벼슬에 나서는 것은 그의 뜻이 아니다’라고 말하니 왕이 그것을 믿어 공의 관직을 옮기게 하였다. 군소(群小 : 소인배)들이 더욱 날뛰었다. 계미년(충혜왕 후4, 1343) 겨울 악양(岳陽)의 화(禍)
2가 일어나 충혜왕이 별세하였다.
갑신년(1344)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여 공을 우부대언(右副代言)에 등용하고 곧 지신사(知申事)가 되었다. 권력을 잡은 대신이 자신에게 아부하지 않은 것을 미워하여 왕에게 아뢰어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임명되었다. 얼마 후 왕이 후회하여 곧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임명하고 관리 뽑는 일을 맡게 하였다.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승진하였다.
기축년(1349) 충정왕(忠定王)이 즉위하여 서연(書筵)을 열고 공을 스승으로 삼았으나, 공은 사양하였다. 첨의부(僉議部)에 들어가 평리(評理)가 되고, 광정대부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匡靖大夫 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事 上護軍)으로 관리 뽑는 일을 맡았다. 곧 바로 삼사우사(三司右使)로 관직이 바뀌었다. 왕에게 들어가 아뢰기를 ‘문관의 인사는 이조(吏曹)에서 관장하고 무관의 인사는 병조(兵曹)에서 관장하는 것인데, 정방(政房)에서 이를 모두 관장한 것은 권신(權臣)들이 시작한 것으로 훌륭한 제도가 아닙니다. 전하께서 신의 말을 들어 옛 제도대로 하면 편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을 따르면서, 반드시 공정해야 한다고 하면서 공에게 전리판서(典理判書)를 겸직하게 하였다.
신묘년(충정왕 3, 1351) 겨울 10월 현릉(玄陵 : 공민왕)이 왕위를 계승하자 공은 두문불출하며 대부인(大夫人)인을 봉양하면서 아침저녁으로 예를 다하였다. (대부인이 돌아가셔서) 여묘(廬墓)살이를 마치자
3, 시중 홍양파선생(洪陽坡先生 : 洪彦博)과 당시 재상들이 가서 위로하자, 공은 ‘나의 나이 예순 셋인데 처음 이곳에 살면서 하루아침에 몸이 아침이슬처럼 먼저 죽어 친척들에게 부끄러움이 될까 늘 걱정하였는데 (다행히)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덕’이라고 하면서 말을 마치고 눈물을 흘렸다. 여러 사람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탄복하였다. (여묘살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신주[版位]를 집 북쪽 모퉁이에 놓고서 제사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그치지 못하였다.
오랜 병으로 문밖에 나서지 못하였다. 공민왕이 그의 명성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공에게 ‘공과 함께 얘기하고자 생각한지 오래되었으나, 과인을 만나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공이 황공하여 아들과 조카들의 부축을 받고 궁궐에 들어갔다. 왕은 ‘나이와 얼굴은 그렇게 쇠하지 않았는데, 병이 있는 것이 어쩐 일인가’하면서 오랫동안 안타까워 하였다. 관리들에게 명령하여 사는 곳을 영창방 효자리(靈昌坊 孝子里)로 하고, 그 마을의 몇몇 호에게 조세를 면제해주고 제사지내는 것을 돕게 하였다.
신축년(공민왕 10, 1361) 겨울 11에 홍건적을 피하여 고창현(高昌縣 : 지금의 경북 안동지역)에 가서 계속 그곳에 머물러 살았다. 계묘년(공민왕 12, 1363) 봄 3월 작은 병에 걸렸는데, 기동하고 말하는 것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14일 째가 되자 부인에게 말하기를 ‘나는 이제 일흔넷이니 무엇을 한스럽게 생각하겠는가. 남자는 부인의 품에서 죽지 않는 것이 예에 맞으니 여러 비와 함께 물러가시오. 또 큰 소리와 빠른 말로 나를 소란스럽게 하지 마시오’라 하고 조금 있다 죽었다. 평소 (스스로를) 수양한 것을 알 수 있다. 아들과 사위가 관을 모시고 서울로 돌아와 아무 달(某月) 갑자에 덕수현(德水縣) 선영(先塋)에 장사지냈다.
공은 문하평장(門下平章) 양간공(良簡公) 김승택(金承澤)
4의 따님과 결혼하여 자식 둘을 두었다. 아들 흥조(興祖)는 쾌활하며 큰 뜻을 가졌다. 벼슬이 중현대부 군기감(中顯大夫 軍器監)에 올랐고, 수원과 해주 지방관을 역임하여 그 치적이 두드러졌다. 취성(鷲城 : 辛旽)의 손에 죽었다.
5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이를 안타까워하였다. 딸은 봉선대부 내부부령(奉善大夫 內府副令) 박문수(朴門壽)에게 시집갔다.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후손이다. 손자는 남녀 약간명이 있다. 군기감(흥조)은 감찰대부 신중전(申仲全)의 딸과 결혼하여 딸을 낳았는데, 낭장 송의번(宋義番)에게 시집갔다. 내부부령(박문수)은 두 아들을 낳았다. 큰 아들 총(叢)은 학문을 좋아하고 뜻을 키웠는데 전봉선대부 좌우위 보승호군(前奉善大夫 左右衛 保勝護軍)이다. 작은 아들 포(苞)는 진사로 전의녹사(典儀錄事)이다. 외증손(外曾孫)도 약간 있으나, 모두 어리다. 호군(護軍 : 외손자 총)이 공의 행장을 주며 한산 이색(韓山 李穡)에게 묘지명을 요청하면서, ‘그대가 마땅히 묘지명을 지어야 할 것’이라 하였다. 이에 묘지명을 지었다.
아아, 선생의 덕행과 정사(政事)가 이같이 두드러지니 그 자손이 마땅히 많아야 하는데, 군기감(軍器監)에게 후사가 없으니 이것은 하늘의 뜻이 일정하지 않은 것이요 하늘의 좋아하고 미워함이 사람과 다른 때문이다. 아아 슬프도다. 다행히 박씨(사위)가 남았는데 선비가 공을 세워 그의 외할아버지를 드러낸 사람이 역사에 적지 않다. 박씨는 힘써야 할 것이다. 힘써야 할 것이다.
명(銘)에 이르기를
동쪽에 언덕 있어 소나무 푸르니 군자의 집이다.
연못에 물 가득하여 연화 향기 맑으니 군자의 덕이로다.
나가서 임금 섬김에 정치와 문장으로 우리 왕국 바로잡았고
들어와 부모를 모시는데 나이 들수록 더욱 참되어 우리 민속(民俗)을 교화시켰다.
선생의 명성이 해동에 가득하여 영원토록 모범이 되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