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군대부인 왕씨(開城郡大夫人 王氏) 묘지명 및 서문
목은(牧隱) 이색(李穡) 지음
부인의 성은 왕씨(王氏)이고, 개성군(開城郡) 사람이다. 조부 근(覲)은 우리 태조의 11세손으로 조청대부(朝請大夫) 예빈경(禮賓卿)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하였고, 아버지 정조(丁朝)
1는 은청광록대부 추밀원사 호부상서 한림학사승지(銀靑光祿大夫 樞密院使 戶部尙書 翰林學士承旨)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이씨(李氏)는 금마군부인(金馬郡夫人)인데, 좌사간 지제고(左司諫 知制誥) 서춘(瑞春)의 딸이다.
부인은 14세에 문정공(文正公) 태현(台鉉)에게 시집갔는데, 바른 자태와 정숙한 덕은 훌륭한 가문[高門]의 배필이 될 만하였다.
부인은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장남 광철(光轍)은 밀직사(密直司)로 화평군(化平君)에 봉해졌으나 8년 전에 죽었고 시호는 문민(文敏)이다. 차남 광재(光載)는 삼사우사 겸 전리판서(三司右使 兼 典理判書)였는데 집으로 물러나 지금은 무덤 곁에서 (侍墓를 하고) 있다. 3남 광로(光輅)는 가안부녹사(嘉安府錄事)였으나 일찍 죽어 자녀가 없다. 큰딸은 정당문학 예문관대제학(政堂文學 藝文館大提學) 안목(安牧)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밀직사 우대언 좌사의대부(密直司 右代言 左司議大夫) 박윤문(朴允文)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세 명이 있다. 큰 손자 승조(承祖)는 천우위 해령별장(千牛衛 海領別將)이고, 둘째 손자 흥조(興祖)
2는 좌우위 보승낭장(左右衛 保勝郎將)이며, 셋째 손자 회조(懷祖)는 성균시(成均試)
3에 합격하여 충용위 호분별장(忠勇衛 虎賁別將)이 되었다. 손녀는 다섯을 두었다. 큰 손녀는 개성소윤(開城少尹) 최충손(崔冲孫)에게, 둘째 손녀는 합포만호(合浦萬戶)▨▨▨ 현성군(玄城君) 권용(權鏞)에게, 셋째 손녀는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郞) 유혜부(柳蕙符)에게, 넷째 손녀는 숭복도감판관(崇福都監判官) 홍인철(洪仁喆)에게, 다섯째 손녀는 내부부령(內府副令) 박문수(朴門壽)에게 시집갔다.
증손자 세 명과 증손녀 다섯 명이 있으나 모두 어리고, 외손자는 여섯 명이다. 안원숭(安元崇)은 군부판서 진현관(軍簿判書 進賢舘)이고, 박밀양(朴密陽)은 급제하여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이 되고, 박태양(朴太陽)은 급제하여 고공낭중(考功郎中)이 되고, 박소양(朴紹陽)은 성균시에 합격하고 원(元)에 들어가 형호지▨원수부주차(荊湖池▨元帥府奏差)가 되고, 박삼양(朴三陽)은 급제하여 충주판관(忠州判官)이 되고, 박계양(朴季陽)은 좌우위정용(左右衛精勇)의 산직(散職)을 받았다.
외손녀는 한 명으로, 봉익대부 우상시(奉翊大夫 右常侍) 민유(閔愉)에게 시집갔다.
외증손자는 15명이다. 민덕생(閔德生)은 상서좌사원외랑(尙書左司員外郞)이고, 민수생(閔秀生)은 성균시에 합격하였고, 민▨생(閔▨生)은 직사관(直史館)이며, 박숙▨(朴淑▨)은 서림장판관(西林場判官)이 되었으며, 나머지는 아직 관례(冠禮)를 올리지 않았다.
외증손녀는 17명이다. 한 명은 금오위 정용낭장(金吾衛 精勇郎將) ▨▨에게, 한 명은 요양등처
4 행중서성 우승지(遼陽等處 行中書省 右承旨)에게, 한 명은 비서감(秘書監) 김사렴(金士廉)에게, 한 명은 우부대언(右副代言) 기왈용(奇曰龍)에게, 한 명은 국자직학(國子直學) 성▨(成▨)에게, 한 명은 견예부 별장(堅銳府 別將) 구희(具禧)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는 결혼하지 않았다.
외현손은 다섯 명이 있다.
부인은 91세
5에 이르러 내외의 여러 자손들이 이와 같이 창성하였으니, 어찌 우연이겠는가. 나라의 제도에 세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면 그 어머니에게 평생 곡식을 주었는데,
6 광철, 광재, 광로가 모두 진사제(進士第)에 합격하였으므로
7 부인의 영예가 ▨▨(〔매우 컸다〕). 외손자 박씨 또한 훌륭함을 갖추었으니 당시 사람들이 공경하였다.
지정(至正)
8 16년 병신년(공민왕 5, 1356) 3월 18일에 침소에서 돌아가시니, 이 해 4월 9일에 덕수현(德水縣)
9 해운산(海雲山)의 문정공의 무덤에 장례지냈다.
부인은 자애롭고도 엄하고 총명하고 지혜로웠다. 집안을 다스리는데 법도가 있었고, 여러 친족들을 은혜롭게 어루만져 주었으므로 사람들이 ▨▨ 모두 자신의 어머니처럼 여겼다. 시어머니 고씨(高氏)는 예빈경 지제고(禮賓卿 知制誥) 영중(瑩中)의 손녀로 이른 나이에 홀로 되었으나 나이가 들수록 더욱 건강하여 백하고도 두 살의 장수를 누렸는데, 부인은 더욱 부지런히 모셨다.
성품이 불교를 좋아하여 금으로 『화엄경(華嚴經) 삼본(三本)』을 쓰고 ▨▨하였으니, 문정공의 명복을 빌기 위한 것이었다. 또 『법화경(法華經)』을 모두 이백여 권을 이루어 함(函)과 돗자리에 서적이 가득 찼는데 매우 정교하고 치밀하였다. 반드시 문정공의 기일에는 (그 불경을) 읽고 외우며 공양을 바쳤다. 항상 염불하였는데 돌아가실 때도 ▨▨▨▨하였으니 그 신앙이 독실하기가 이와 같았다.
내가 수묘(守墓)하는 오두막으로 삼사공(三司公, 金光載)을 ▨▨ 뵈었다. 공이 조용히 말하기를 “그대가 문생(門生)이 된 것은 우리 어머니의 덕입니다. 그대가 묘지명을 써주시오.”라고 하였다. 내가 의리상 사양하고 물러날 수가 없어서 ▨▨▨▨ 차례대로 적는다.
아, 선을 쌓거나 악을 쌓게 되면 재앙과 복이 그에 따라 온다는 것은 의심할 수가 없다. 문정공의 도덕과 공명이 세상에 밝게 빛나고, 삼사공과 그 형 광철이 모두 큰 재목으로 중용되어 ▨, 아들의 성(姓)이 크게 떨쳤으니 모두가 그 가문을 칭송하고 있다. 부인의 내조가 아니었으면 이보다 성할 수가 있겠는가. 마땅히 명(銘)을 지어야 할 것이다.
명(銘)하여 이른다.
문정공의 어짐은 백세(百世)가 되어도 사라지지 않을 것인데
부인이 그의 배필이 되니 공손하고 온화하였다.
아들 세 명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평생 나라에서 곡식이 내려주니 복을 받은 것이 많지 아니한가.
나이는 90을 넘어 ▨▨▨ 많은데
맏형과 막내는 이미 ▨▨▨하도다.
둘째인 삼사(三司)도 머리가 하얗게 세었는데
묘 곁에 머물며 상(喪)을 마치니, 슬프다, 여뀌와 쑥[蓼莪]만 자라나도다.
10
덕수현(德水鉉) 양지바른 해운(海雲) 언덕에
▨▨▨▨ 살펴도 거짓됨이 없도다.
지정(至正) 18년(공민왕 7, 1358) 3월 일
〔출전:『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