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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좌묘지(尹宣佐墓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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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묘지명은 이곡(李穀)의 문집인 『가정집(稼亭集)』 권12와 『동문선(東文選)』 권125에 수록되어 있으며, 1349년(충정왕 1)에 이곡이 작성하였다.묘지명의 주인공 윤선좌(尹宣佐 : 1265~1343)의 자(字)는 순수(淳叟)이며 영평군(鈴平郡 : 현재 경기도 파주시 일대) 사람이다. 삼한공신(三韓功臣) 신달(莘達)의 후손이다. 신달의 현손(玄孫)은 관(瓘)이다. 윤선좌의 증조는 세방(世芳), 할아버지는 응식(應植), 아버지는 균(均)이다. 어머니 송씨(宋氏)는 세견(世堅)의 딸이다.윤선좌는 1288년(충렬14) 과거에 1등으로 급제하였다. 충렬왕·충선왕·충숙왕때 관료로서 활약하였다. 특히 충숙왕의 측근으로서 충숙왕을 무고하고 심왕 고를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을 저지하여 충숙왕의 왕위 회복에 중심 역할을 한 사실이 묘지명에 자세하게 실려 있다. 부인은 윤씨(尹氏)는 해(諧)의 딸이다. 자녀 셋을 낳았다. 맏아들은 체(棣), 둘째는 찬(粲)이며, 딸은 유양준(庾良俊)에게 시집갔다. 계실(繼室)은 승평군부인(昇平郡夫人) 박씨(朴氏)로 아들 둘을 낳았다. 맏이는 음(廕), 막내는 승려이다. 두 번째 계실은 임씨(林氏)인데 아들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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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기
고려국 광정대부 첨의평리 예문관대제학감춘추관사 상호군치사 윤공묘지명(高麗國 匡靖大夫 僉議評理 藝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 上護軍致仕 尹公墓誌銘)
공의 이름은 선좌(宣佐), 자(字)는 순수(淳叟)이며 영평군(鈴平郡 : 현재 경기도 파주시 일대) 사람이다. 삼한공신(三韓功臣) 신달(莘達)의 후손이다. 신달의 현손(玄孫) 태사문하시중(太師門下侍中) 관(瓘)은 오랑캐를 평정하고 국토를 개척하여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관의 손자인 태사문하시중(太師門下侍中) 인첨(鱗瞻)은 난을 평정하고 나라를 바로 잡아 국가에 공훈이 있었다. 인첨이 판예빈성사(判禮賓省事) 종해(宗海)를 낳았고, 종해는 내고부사(內庫副使) 세방(世芳)을 낳았다. 세방은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로 추증된 응식(應植)을 낳았고, 응식은 첨의평리(僉議評理) 균(均)을 낳았다. 균은 찬성사(贊成事) 송세견(宋世堅)의 딸에게 장가 들었다. 공에게 두 분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된다.
공은 나면서부터 영리하여 7세에 능히 글을 지었고 무자년(충렬왕 14, 1288) 과거에 1등으로 급제하여 김해(金海)의 장서기(掌書記)를 거쳐 내직(內職)으로 들어와서 비서랑(秘書郞)에 보직되어 문한서직(文翰署直)으로 있다가 여러 번 당후관(堂後官)으로 옮겼다. 정미년(충렬왕 33, 1307) 충선왕이 왕위를 이어 정사를 펼치면서 여러 관원을 도태하였다. (공은) 좌정언(左正言)에 임명되고 다시 우사보 겸 언부산랑(右思補 兼 讞部散郞)로 옮겼다. 회양도(淮陽道 : 강원도 북부 지방)안렴사로 다시 내서사인 선부의랑(內書舍人 選部議郞) 등의 직에 옮겼다. 임자년(충선왕 4, 1312) 전라도 안렴사 때 옛날에 말고삐를 잡고 민정을 살피며 도끼를 가지고 형정(刑政)을 집행하던 풍모가 있었다. 그 일이 왕의 귀에 들려서 도진령(都津令)에 승진되었다.
계축년(충숙왕 즉위, 1313) 충선왕이 충숙왕(忠肅王)에게 왕위를 전하자, 충숙왕은 전부터 그 이름을 들은 바 있어 성균좨주(成均祭酒)를 내리고, 부인(符印)을 맡겨 왕의 좌우에 있도록 하면서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강의하게 하였다. 또 감찰집의(監察執義)에 전직하였다가 중간에 사고로 파직되었다가 신유년(충숙왕 8, 1321) 다시 복직 되었다. 이 해 심왕(瀋王)이 원나라 영종(英宗 : 1320~1323)의 총애를 얻어 왕을 무고하여 그 자리를 빼앗으려 하였다. 이익을 얻는데 근심하는 무리들이 모두 심왕에게 붙었다. 그 일당 십여 명이 갑자기 도성(都城)으로부터 와서, “심왕이 이미 나라를 얻었다. 나라사람들이 어찌 지금 왕의 비행을 써서 원나라 조정에 보내지 아니하는가” 하였다. 수십 장의 종이에 써서 민천사(旻天寺) 문 위에 붙이고 백관(百官)을 불러 거기에 서명(署名)하게 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달려갔으나 공만은 홀로 “나는 우리 왕의 비행을 알지 못하거니와 신하로서 임금을 참소한다는 것은 개나 돼지도 하지 않는다 ”하고 그 서장(署狀)에 침을 뱉었다. 이로 말미암아 대간과 문한(文翰)의 관원들이 다 서명하지 않았다. 뒤에 일이 정돈되고 나서 중서성(中書省)에서 그 서명한 서장을 왕에게 돌려보내니, 왕이 그 중에 서명하지 않은 사람의 수를 세어보고 감탄하여 “윤모(尹某)가 헌사(憲司)에 있지 아니하였던들 그 밖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그 때 왕이 5년 동안이나 원나라에 억류를 당하여 재정의 용도가 고갈하였다. 심왕의 무리들이 그런 줄 알고서 부고(府庫)를 봉쇄하고 물자를 보내는 일을 방해하였다. 공은 찰관(察官) 조관(趙琯)에게 편지를 보내어 창고를 주관하는 자를 독책하여, 물자의 운반이 비로소 이루어졌다.
을축년(충숙왕 12, 1325) 왕이 본국으로 돌아와 판전교(判典校)에 임명하고 관계(官階)를 통헌(通憲)으로 승진하였다. 조금 뒤에 민부전서(民部典書)로 한양윤(漢陽尹)이 되었다. 얼마 뒤 왕이 공주(薊國大長公主)와 같이 용산(龍山)에 가서 측근에게 “한양부윤인 윤선좌가 청백하고 검소하기 때문에 목민관(牧民官)으로 삼았다. 너희들은 부디 그를 흔들어 더럽히지 말라.” 하였다. 신미년(충혜왕 1, 1331) 나이가 들어 벼슬을 그만두었다. 을해년(충숙왕 복위4, 1335) 왕이 친히 수령을 발령내면서, 계림윤(鷄林尹)에 이르러 붓을 놓고 한참 생각하고 나서 “조정에 신하는 많으나, 한양윤인 윤선좌만한 사람이 없다.” 하고 즉시 공을 임명하였다. 왕에게 신임을 얻은 것이 이와 같았다. 공이 큰 고을의 수령이 되어 더욱 청렴하고 근면하여, 백성의 병폐가 되는 일은 반드시 제거하려고 힘썼고, 백성에게 이로운 일이면 이를 시행하여 하나도 놓치는 것이 없었다.
병자년(충숙왕 복위5, 1336) 첨의평리(僉議評理)의 벼슬을 더하여 벼슬을 그만두었다. 계미년(충혜왕 복위4, 1343) 9월 모 갑자일에 가벼운 병을 얻어, 자녀를 불러 앉히고 “지금 사람들이 흔히 형제간에 서로 화목하지 못하는 것은 재물을 다투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아들 찬(粲)에게 명하여 문서를 쓰게 하고 가산을 고르게 나누어 주고 나서 경계하기를 “화목하게 지내고 다투지 말라는 것으로 너희들에게 훈계한다.”하였다. 말을 마치고 의관을 바르게 하고 단정히 앉아서 서거(逝去)하였다. 모월 모일에 북원(北原)에 장사하니 나이 79세였다.
부인은 윤씨(尹氏)니 국학대사성(國學大司成) 해(諧)의 딸이다. 아들 셋을 낳았다. 맏아들 체(棣)는 공보다 먼저 죽었고, 둘째는 찬(粲)인데 급제하여 지금 전의시승(典儀寺丞)이 되었다. 딸은 대호군(大護軍) 유양준(庾良俊)에게 시집갔다. 계실(繼室)은 승평군부인(昇平郡夫人) 박씨(朴氏)니 아들 둘을 낳았다. 음(廕)은 급제하여 지금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이다. 막내는 머리 깎고 불도를 배웠으며 두 번째 계실은 임씨(林氏)인데 아들이 없다.
공은 평생에 집안 살림을 다스리지 않았고, 성품이 술을 마시지 않아서 사람이 일찍이 그가 희롱하고 해학하거나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교제를 신중히 하고 약속을 중하게 여겼다. 혼자 있을 때에도 항상 손님을 대하듯이 하였다. 오직 경전과 역사서를 스스로 즐겨 읽으며, 의심나는 것을 와서 묻는 자 있으면 늘 경에 의거하여 대답하였다. 노장(老莊)의 서적과 형명(刑名)의 학문도 깊이 연구하지 아니한 것이 없어서 학자들이 많이 따랐다. 문장도 맑고 쉬웠다. 정언(正言) 이상의 관직에다 문한관을 겸하고 있어서 당시 표전문(表箋文)은 그의 손에서 나온 것이 많았다.
장사한 지 7년 뒤에 나와 같은 해에 과거에 급제한 우대언 윤택(尹澤)이 공의 행장을 지어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청하면서, “슬프다. 이 어른이 비록 나의 고모부이나 은혜는 아버지와 같습니다. 마침 공이 죽었을 때에, 내가 남쪽 지방에 있었으므로 장사에도 오지 못하였고 장사날이 또 임박하여 묘지명도 갖출 여가가 없었습니다. 사람의 묘지명을 지으려면 우리 윤공 같은 분이라야 가히 부끄러울 것이 없을 터인데, 오히려 묘지명이 지금까지 없으니 한스러울 뿐입니다. 그대는 남의 묘지명을 많이 지었으나, 또한 우리 윤공같은 분이 일찍이 있었습니까.” 하였다. 나는 사양할 말이 없어 그냥, “그렇지, 그렇지.”하고 묘지명을 지었다.
명(銘)에 이르기를
사람들은 가난함을 근심하는데, 공은 부유한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어떤 이는 임금 앞에 아첨도 하건만 공은 곧은 말만 하였다.
누가 그 벼슬 높은 것만을 주장하던고, 벼슬이 그 덕 만은 못하리라.
덕과 나이가 함께 높았으니, 공의 존귀를 말해 무엇하리.
재주와 명망이 출중하여 등용될 길이 막혔다.
그렇지만 공은 또한 화를 내지 않았네.
혁혁하게 빛난 자 그 누구이던고.
다 사라졌지만 공은 죽었어도 오히려 산 것과 같으니
이 묘비에 새겨져 있는 명(銘)을 볼지어다.